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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병자호란'이 380년 후 대한민국에 묻는다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M이코노미 김선재 기자]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는 외부세력으로부터 수백차례의 침략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단 한 차례도 다른 나라를 공격하거나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자평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횟수야 어찌됐든 외세의 침략에 지배층들은 제 살 길 찾아 도망가기 바빴고, 위정자들은 서로 명분을 따지면서 사분오열했다. 그러는 사이 속절없이 희생되는 쪽은 백성들이었다.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공격을 안 한 것인가, 못 한 것인가? 그렇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왜 대비하지 않았나? 그때나 지금이나 과연 백성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백성을 위한 정치는 무엇인가? 영화 ‘남한산성’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 M이코노미매거진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이 청(淸)의 침략을 받았던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저항한 47일간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로, 김훈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병헌(이조판서 최명길 역), 김윤석(예조판서 김상헌 역), 박해일(인조 역), 고수(서날쇠 역), 박희순(수어사 이시백 역) 등 선 굵은 연기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는 충무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해 화재가 되기도 했다. 지난달 3일 개봉한 영화는 같은 달 20일 기준 370만9,950명의 관객이 들었다.


영화는 청과 화친을 맺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 ‘임금의 나라’ 명(明)을 두고 오랑캐와 화친을 맺는 것은 명을 배신하는 것이라며 청과의 화친을 배척하는 ‘척화파(斥和派)’ 김상헌의 대립이 이끌어간다. 둘의 대립은 그대로 옮겨진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에 영상까지 더해져 보다 치열하고 불꽃 튀었지만, 실제 역사가 그랬듯 인물들이 내리는 결정과 진행되는 상황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임금은 무능했고, 정치인들은 제 살기 바빴고, 나라에는 힘이 없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희생되는 것은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며 성을 지켰고, 청나라 군대의 창과 칼에 무참히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는 신하들을 탓하기에 정신이 없었고, 조정 대신들은 명분 싸움에 골몰하며 서로 분열하고 상대방을 깎아 내렸다. 어디에도 백성들은 없었다. 이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백성을 위한 정치는 무엇인가?’ ‘백성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한 나라에 두 번 당한 우물 안 개구리 조선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은 만주에서 세력을 급격하게 키운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그런데 ‘병자호란’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2차 침입이다. 1차 침입은 ‘병자호란’ 발발 9년 전인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23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이 쫓겨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을 당시 조선과 ‘군신 관계’에 있던 중국의 명은 임진왜란에 군대를 파병한 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었고,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여진족은 그 틈을 타 후금을 세우고 명을 공격했다. 계속되는 후금과의 싸움이 힘겹게 된 명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이 조선에 군사를 보냈던 적을 들어 출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금은 조선의 출병을 반대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명과의 명분, 의리를 생각해서 명에 군대를 보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을 돕기는 하되 중국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후금과 다퉈 훗날의 위협을 만들지 않는 것이 조선에 이득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광해군은 명의 요청에 따라 파병을 결정하면서도 적당한 때에 후금에 항복하도록 하는 이중전략을 사용했다. 당시 광해군은 명에 파병되는 군사를 이끄는 강홍립을 불러 “장군은 명나라를 도와 싸우는 척하다가 금나라가 이길 것 같으면 금나라에 항복을 하시오. 뒷일은 내가 맡겠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광해군의 이같은 외교적 입장에 대해 훗날 우리는 ‘중립외교’ 혹은 ‘실리외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광해군의 결정은 ‘임금의 나라’였던 명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서인(조선의 붕당 중 하나.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들은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하며 ‘향명배금(向明排金)’을 표방하며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쓰게 된다. 단적인 예당시 요동을 수복하려는 명의 군대를 조선 내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군사원조를 해주기도 했다.


때마침 명과의 전쟁으로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후금은 명을 도와주는 조선을 공격해 후환을 없애고 물자난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반란(이괄의 난. 반정공신들의 반대세력으로부터 반역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자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이괄이 일으킨 난)을 일으키고 후금으로 도망친 이괄의 일부 세력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됐고, 현재 조선의 군대가 약하니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고 후금을 종용하자 후금의 태종은 조선에 대한 공격을 결정한다.


1672년 1월 후금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을 통해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후금의 조선에 대한 압박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후금은 식량 지원을 강요하고 병선을 요구하는가 하면 압록강 일대의 민가를 약탈하는 등 끊임없이 조선을 괴롭혔다. 이에 조선 내부에서는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과의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러나 만주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까지 세력을 확장한 후금은 조선에게 군신 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황금·백금, 전마(戰馬) 3,000필,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했다. 1636년 2월에는 용골대·마부태 등은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해 올리던 칭호)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 씨의 문상을 위해 조선에 왔는데, 이들은 여기에서 조선에 군신관계를 또 한 번 강요해 조선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 인조는 이들의 접견을 거부하고 이들에 대한 감시를 지시했는데,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사신들은 도주를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조정이 평안도관찰사에게 내린 유문(諭文)을 탈취에 본국으로 돌아간다. 유문의 내용은 ‘절화방비(絶和防備)’였다. 즉,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무기를 보내는 등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유문을 통해 후금은 조선의 의도를 인식하고 2차 침입을 결심한다.



그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이들에 대한 척화의지가 매우 높았던 때였기 때문에 청의 요구는 무시됐다. 11월에는 왕자와 대신,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을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조선은 이를 또 한 번 묵살한다. 이에 청은 총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니, 이것인 1636년 12월 1일 발발한 ‘병자호란’이다. 조선으로 쳐들어온 청의 군사들은 조선의 군사들이 산성에 진을 치고 수비를 펼치고 있는 것을 알고 이를 지나쳐 단 10일 만에 한양에 다다른다. 청 군사들의 너무 빠른 진격에 당황한 인조는 일단 가족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중 청에 의해 강화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이 모두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당시 남한산성에 있던 식량이라고는 양곡 1만4,300석과 장(醬) 220항아리 정도. 불과 50여일밖에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사이 청의 군사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한산성에 이르러 성을 포위했고, ‘고립무원’의 조선은 47일간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조선은 결국 청에게 항복하게 되고, 청의 요구에 따라 인조는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현재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나루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써 신하의 예를 보이는 치욕을 겪게 된다. ‘삼배구고두례’는 3번 절하면서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에 박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인조가 그냥 땅에 이마를 갖다 대 이마에 흙이 묻는 것 정도로 표현됐지만, 실제는 인조가 땅에 머리를 세게 박아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의 무능과 조정의 분열, 왜곡된 사대주의에 갇혀


사실 조선은 이 두 번의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고, 설사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이처럼 처참하게 치욕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선조 때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이 있었고, ‘병자호란’ 전에는 ‘정묘호란’이 있어 조선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변화를 읽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이에 소홀했고, 심지어 내부에서 분열했다. 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대주의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탁상행정,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 자신의 파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한 때문에 불과 30~40년 사이 4번의 큰 전쟁을
겪었던 것이다. 결국 정치가 나라의 명운을 망친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당시를 바라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왜 지도층들은 전쟁 이후 군사들을 더 강력하게 키우지 않고 조선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움직임이나 정세의 변화를 읽으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병사호란’ 전 조선에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으로 당시 500만명이었던 조선의 인구가 300만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큰 전쟁을 겪었던 나라의 지도자와 정치인들이라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군사들을 더 강하게 하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획득해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인조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일관된 기준 없이 즉흥적으로 사안을 결정했고, 일이 잘못되면 신하를 탓하기 일쑤였다. 그런 임금 앞에서 신하들 역시 임금의 비위 맞추기와 제 살 길 찾기에 여념이 없을 뿐 임금의 정확한 결정을 돕기 위해 나서는 이들은 없었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꽉 찬 그들의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다. 당시는 중국의 주도권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명청교체기’였다. 명이 쇠퇴하고 청이 새로운 강자로 중국을 주도하게 됐지만, ‘임진왜란 때 명이 군사를 보내줘 전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도 명과 같이 살고 죽어도 명과 같이 죽어야 한다’는 식의 명에 대한 왜곡된 사대주의는 우리와 인접한 강대국간 세력 교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강국을 억지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성리학의 나라’로서 몇백년간 명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살아온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명을 향해 새해 예를 올리는 장면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의 극을 보여준다. 김훈 작가는 이에 대해 지난 달 26일 방영된 JTBC‘썰전’에 출현해 “당시 집권세력들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싸움을 세력 대 세력의 싸움으로 보지를 못하고 ‘문명 대 야만’의 싸움으로 본 것”이라며 “그런 ‘관념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청을 끝까지 오랑캐로 봤다. 그러다 보니 눈 앞에서 벌어지는 객관·현실이 안보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도 이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인조와 함께 조선에서 가장 무능했던 임금으로 꼽히는 선조 재위 시절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조정은 왜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국방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랑캐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후금(청)의 군사지원을 거절했다. 후금(청)의 군사지원을 계기로 명을 정벌하고 조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했던 청의 입장을 사전에 파악해 이를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전쟁은커녕 오히려 조선에 이런저런 이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정의 분열도 나라의 명운을 망치는 데 한몫했다. 실제로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이후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빠르게 분열했다. 반정 이후 서인들은 공(功)에 따라 공이 많은 ‘공서(功西)’와 공이 별로 없는 ‘청서(淸西)’로 나뉘었고, 연령에 따라서 노장파와 소장파로 갈라졌다. 노장파를 ‘노서(老西)’, 소장파를 ‘소서(少西)’라고 부른다. 공이 많은 인물을 중심으로 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반정공신 중 하나인 ‘원두표(元斗杓)’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원당(原黨)’과 이에 반대하는 김자점(金自點)을 중심으로 청의 힘을 빌려 목소리를 높이려는 ‘낙당(洛黨)’이다. 공서, 청서, 노서, 소서, 원당, 낙당. 나라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된 것이다.



‘병자호란’ 중에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정은 전쟁을 끝낼 실질적인 방법을 찾지 않고 여전히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라져 싸우기 바빴다. 영화 속에서는 최명길과 김상헌이 각자의 명분을 내세우며 인조 앞에서 논쟁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최명길은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뿐입니다. 어찌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겠습니까?”라고 말했고, 김상헌은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습니까?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삶을 욕되기 하는 자이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그저 말의 전쟁. 전쟁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끝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정의 이같은 분열은 꼭 인조 때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도 조정은 제 살 길 찾기에 급급해 서로 분열했다. 특히, 전쟁에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그의 공을 깎아 내리기에 정신이 없었고, 오히려 그를 모함하기도 했다. 이에 휘둘린 선조 역시 자신이 의주로 도망가는데 도움을 준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면서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가 모반을 일으킬 것이고 의심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이상한 일. 당시 조선의 이런 부조리들이 쌓이고 악화돼 터진 것이 바로 4번의 큰 전쟁, 삼전도의 굴욕, 그리고 일제 식민지 등 조선의 망국이었다.



결국 희생되는 것은 백성
…이들을 위한 나라·정치는 있는가?


조정의 무능과 현실을 외면한 대책 없는 명분주의, 사대주의로 상처 입는 것은 결국 백성이다. 전쟁 중 여성들은 청 군사들의 노리개가 됐고, 노동력이 있는 남성들은 당장 노예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당시 조선의 백성 50만명이 인질로 청에 끌려갔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은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고 조롱한다.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으로 그려졌다. 성첩을 지키는 백성들이 혹독한 추위에 괴로워한다는 서날쇠의 말을 들은 김상헌은 인조에게 청해 성첩을 지키는 백성들에게 가마니를 지급해 추위를 막도록 해달라고 한다. 그러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한 말들이 하나둘씩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자 조정 대신들은 성첩을 지키는 백성들에게 나눠줬던 가마니를 다시 회수해 말의 먹이로 사용하자고 건의한다. 김상헌은 이에 반대했지만, 줏대 없는 인조는 이를 허락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 안에 식량이 모두 바닥나자 조정은 말을 잡아 식량을 마련하기로 한다. 말을 지키겠다고 백성들에게 지급한 가마니를 회수해 말의 먹이로 줬지만, 식량이 떨어지자 그 말을 잡아 먹는, 백성들의 추위를 막아 줄 가마니도 잃고 전쟁에 쓸 말도 잃어버리게 된 무능의 정치,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정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말고기를 먹던 한 백성은 “그럴 줄 알았으면 말이 살쪘을 때 잡아주시지”라며 정치인들의 무능을 조롱한다.



이런 장면도 있다. 김상헌은 서날쇠로 하여금 왕의 격서를 검단산에 있는 군영에 전달하도록 한다. 천신만고 끝에 서날쇠는 격서를 군영에 전달하지만, 군영의 간부들은 청의 군사들이 두려워 군사지원을 하지 않기로 하고, 왕의 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격서를 들고 온 서날쇠를 죽이려한다. 그러나 서날쇠는 이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몸을 피해목숨을 구한다. 여기에서 서날쇠는 자신을 죽이러 온 군영 간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 같은 벼슬아치들을 믿지 않아”


정치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명분이라는 것이 과연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영화는 질문한다. 왕의 격서를 검단산 군영에 전달하라는 김상헌의 지시를 받는 장면에서 서날쇠는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전하의 명령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해 한 해 배불리 먹고 지내는 것이 소인의 바람이옵니다.”


“저희 같은 백성은 조선이 명을 섬기든 청을 섬기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한반도 정치는 그때와 다른가?


영화 ‘남한산성’을 본 정치인들은 저마다 다른 평가를 내놨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영화를 관람한 후 자신의 SNS에 “얼마든지 외교적 노력으로 전쟁을 예방하고 백성의 도탄을 막을 수 있었는데, 민족의 굴욕과 백성의 도륙을 초래한 자들은 역사 속의 죄인이 아닐 수 없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이 잘못된 현실 판단과 무대책의 명분에 사로잡혀 임진왜란에 이어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당시 척화파의 주장을 현 보수세력에 빗대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의 우리 상황을 돌아보면 크게 다르지않다. 여전히 강대국 사이의 대한민국은 위기에 처해있다”면서 “우리의 힘을 키우고 외교적 지혜를 모으고, 국민적 단결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병자호란의 시대상황을 지금 북핵 위기와 견주는 것은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면서도 “대사가 주는 여운이 정치란 무엇인가, 외교란 무엇인가, 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반면,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군주가 무능하면 백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며 무능한 지도자에 대한 비판에 무게를 뒀다. 홍 대표는 SNS를 통해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전란의 참화를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무능과 신하들의 명분론 때문”이라며 “북핵 위기에 한국 지도자들이 새겨 봐야 할 영화”라고 말했다. 장제원 자유 한국당 의원도 “예조판서의 명분과 이조판서의 실리는 모두 조선의 충신”이라면서 “조선의 백성들을 죽음과 고통과 굴욕으로 몰아넣은 자는 명분도 실리도 타이밍도 모두 잃어버리고 어떤 것도 결단하지 못한 무능하고 모호한 임금”이라고 지적했다.



영화가 보여주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모습은 오늘날 한반도 현실과 비슷하다.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세이프가드 발동,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등 우리나라에게 통상 압력을 가하고 있는 미국과 핵·미사일을 앞에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 이런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나라와 주한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를 두고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는 중국 등 한국을 둘러싼 외교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고 위태롭다. 그런가 하면 내부적으로 수년째 계속되는 경제불황은 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더더욱 어렵게 하고, 청년들의 취업난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중심을 잡고 지금의 어려움을 수습하고 해소해야 할 정치권은 입으로만 ‘국민’을 말할 뿐 당리당략에 따른 정치로 서민들의 어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키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정치인들이 남긴 감상평 역시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에 따른 아전인수식 해석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볼 때 ‘병자호란’이 일어난 그때나 전쟁이 일어난 지 380년이 넘은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모습은 그게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영화가 던진 질문, ‘국민들을 위한 정치는 존재하는가? 국민들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국민들을 위한 나라’는 인조도, 김상헌도, 최명길도 없어야 가능한 것은 아닐까? 적어도 현재 좌우로 갈라져 국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 서로 대립하는 정치권의 모습이 청산됐을 때나 비로소 조금이나마 가능할 것이다.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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