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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 말의 탄생

-한글 창제 이후 500년 가까이 한글 연구 및 재정립 이뤄지지 않아
-조선어학회, 주시경 선생 ‘말모이’ 작업 46년 만에 ‘조선말 큰 사전’ 발행
-혼탁해진 한글 사용·낮아진 사전의 위상…우리 말 보존 노력, 앞으로도 계속돼야

 

[M이코노미 김선재 기자] 우리 ‘말(語)’과 글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쓰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 우리 말과 글, 그리고 그것을 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환경 속에서 태어나 살아왔기에 그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우리의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 사용을 억압해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 말과 글 사용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우리 말과 글을 쓸 수 있게 된 데는 당시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희생과 그 과정을 뒤따라가 본다.

 

세종(世宗)은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중국의 것인 한자(漢字)고, 그 수가 많아 백성들이 이를 익혀 사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자음 17개(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ㆁ, ㆆ, ㅿ), 모음 11개( ㆍ,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등 총 28개로 이뤄진 우리 고유의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이라고 하고, 세종 즉위 28년이 되던 해인 1446년 9월 반포해 백성들이 익히고 쓸 수 있게 했다. 우리가 부르는 ‘한글’이라는 말은 1910년대에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으로, ‘한’은 ‘크다’는 말이다. 즉, 한글은 ‘큰 글’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글은 ‘상말’, ‘언문(諺文)’, ‘암글(여자의 글, 한글을 낮춰 부르던 말)’ 등으로 불리면서 19세가 말까지 한자보다 열등하고 천한 문자로 여겨졌다. 세종은 ‘나라 말씀이 중국의 말과 달라 한자와 잘 통하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늘 씀에 편하게’ 하기 위해서 조선만의 문자를 만들었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쉽다’는 것 때문에 이를 비하했다. 때문에 세종의 한글 창제 이후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글에 대한 연구와 재정립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한글에 대한 연구와 재정립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일합병 몇 년 전에 시작됐고, 본격화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0~40년대였다. 주시경 선생은 ‘강대국은 모두 자신의 언어를 사용한다’,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우리의 문화를 없애려고 할 것이고, 결국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으려 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한글 연구 및 재정립에 모든 힘을 다했다. 주시경 선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도 그의 제자 등 뜻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한글에 대한 연구와 재정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됐고, 그 노력은 모든 국어사전의 표준이 되는 ‘조선말 큰 사전’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지난달,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1930~40년대에 사전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말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사람들의 희생을 소재로 한 영화 ‘말모이’가 개봉했다.

 

 

주시경 “민족의 언어, 사라지지 않으면 민족정신 보존할 수 있다”

 

‘말모이’는 ‘사전’의 순우리말로, 주시경 선생은 민족계몽운동단체인 ‘조선광문회’에서 그의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과 함께 ‘말모이’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주시경 선생이 ‘말모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한 독립협회에서 신문 교정원으로 활동했던 때다. 여기서 주시경 선생은 맞춤법이나 용법 등이 정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주시경 선생은 신문사 내에 ‘국문동식회’를 조직해 국문 사용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고, 1907년 대한제국의 학부(學部, 대한제국 행정기관. 학교 정책과 교육에 관한 사무 담당)에 설치된 ‘국문연구소’의 위원으로 들어가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만들고 국어교육과 연구를 병행했다.

 

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저서 ‘우리 말의 탄생-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에서 ‘국문연구소’가 사전 만들기의 기점이 됐다며, 이를 대한제국의 ‘아카데미 프랑세즈’라고 평가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1634년 프랑스에 설립돼 59년간의 작업 끝에 ‘아카데미 사전’을 편찬했다. ‘아카데미 사전’은 프랑스어 용법을 확립하고 표준화했고, 이후 여러 차례 증보를 거쳐 지금까지 프랑스어 사전의 표준으로 평가받는다.

 

 

‘국어연구학회’는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조선언문회’로 이름을 바꾸고 1911년부터 ‘말모이’ 작업을 시작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말모이’는 약 4년간의 작업 끝에 원고가 거의 완성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4년 주시경 선생이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고, 김두봉 선생의 1919년 중국 망명, 1920년 이규영 선생의 사망 등으로 ‘말모이’ 작업은 중단된다. 그러나 이들의 ‘말모이’ 작업은 향후 조선어학회에 의한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됐기 때문에 우리말 사전 편찬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 선생 사망 15년 후 다시 시작된 사전 편찬 작업

 

주시경 선생 사망 후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됐지만, 한글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1921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은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고, ‘한글’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사전 편찬 작업이 다시 시작된 것은 주시경 선생 사망 15년이 흐른 뒤 이극로 선생 등에 의해서였다. 이극로 선생은 당시 드물게 중국과 독일에서 유학을 한 지식인이었는데, 1927년 4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1929년 10월 자신을 포함한 108명의 위원들과 함께 ‘조선 사전 편찬회’를 조직, 주시경 선생의 ‘말모이’ 원고를 바탕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및 ‘조선말 큰 사전’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는 일제의문화통치기로 한글 연구가 어느 정도 용인되는 상황이었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사전 편찬을 위한 첫 번째 단계로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이후 125차례의 논의를 거쳐 1936년 10월 6,511개의 표준어를 지정한 ‘조선어 표준말 사정안’을 내놓는다. 이는 한글 정리 및 사전 편찬을 위해 문자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정하고,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현이 지역별로 다른 상황에서 기준점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전국의 사투리를 수집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사투리도 우리말이고, 표준어에 해당하는 각 지역의 표현을 알려 다른 지역 간에도 소통이 이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연구회’ 때부터 발생해오던 ‘한글’ 잡지에 ‘각 지역의 말을 모아주세요’라는 광고를 내고 사투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전국 각지의 사투리가 ‘조선어학회’에 모였다. 개인이 조사한 사투리 수집본이 전달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사투리를 ‘조선어학회’는 의미에 따라 분류하고, 옛말, 새말, 사투리, 전문어, 고유 명사 등으로 재분류해 점차 사전의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이같은 작업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비밀리에 진행됐다.

 

또 한 번의 위기…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그러나 1930~40년대는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목적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원래 하나다) ▲일선동조(日鮮同祖, 일본과 조선의 조상은 동일하다) ▲창씨개명(創氏改名,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꿔 일본인으로서의 영광을 누리자) ▲황국신민(皇國臣民, 황제의 국가에 신하된 백성으로 충성을 다하자)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또한 집권 초기부터 학교에서 국어(일본어) 교육을 하고 한글은 한자와 함께 외국어로 취급하던 일제는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학교에서도 일체의 조선어와 조선말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의 눈에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던 중 1942년 기차 안에서 조선말로 대화하던 여학생들이 한 조선인 경찰관에게 발각되고, 경찰이 이들을 취조한 끝에 사전 편찬 작업에 관여하던 인물의 이름을 자백받게 된다. 이에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당시 가장 수위가 높은 치안유지법상 ‘내란죄’를 적용, 사전 편찬 관계자뿐만 아니라 이 일에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1943년 4월까지 전국의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모두 검거했다. 사전 편찬을 위해 만들었던 원고 역시 모두 압수했다. 이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당시 재판부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며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 역설적으로 일제의 재판부가 조선말 사전 편찬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해준 것이다.

 

모진 고문과 옥고로 인해 1943년 12월 이윤재 선생과 1944년 2월 한징 선생이 옥사했고, 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했던 이극로 선생은 검거된 33명 중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고, 외솔 최현배 선생은 징역 4년, 일석 이희승 선생은 징역 2년6개월이 선고되는 등 사건으로 인해 16명이 기소됐고, 12명은 기소 유예처분을 받았다.

 

이극로 선생은 ‘옥중음(獄中吟)’에서 “괴로움을 무릅쓴 사전 편찬은 지사로서의 의무를 다한 일이었네. 이것이 또한 범죄라면 마침내 시황제의 손에 불살라지리. 목 놓아 통곡하고 싶어도 어이하여 그렇게 할 수 없는고. 깊은 밤 감방에서 홀로 누워 있노라니 눈물만 흐를 뿐”이라며 사전 편찬에 대한 의무감과 당위성, 사전 편찬 작업이 중단된 데 대한 통한을 표현했다.

 

기적적으로 발견된 사전 편찬 원고…1947년 ‘조선말 큰 사전’ 1권 발행

 

이들에 대한 재판은 1945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고, 옥고를 치르던 이극로 선생 등 살아남은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은 석방된다. 석방 후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일제에 압수당했던 원고를 되찾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법원, 경찰서 등 압수당한 원고가 있을 만한 곳을 모조리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1945년 9월8일 ‘조선어학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경성역(현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 조선말을 풀이한 원고 뭉치가 한 무더기 있는데 와서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 일제에 압수당한 13년의 노고가 담긴 원고가 3년 만에 다시 ‘조선어학회’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돼 있는 상자 안에는 400자 원고지 2만6,500여장이 담겨있었다. 사건의 재판을 위해 증거물로 보내려던 것으로, 일제가 패전 후 급하게 한국을 떠나면서 두고 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김병제 선생은 1946년 10월9일자 자유신문에 원고를 찾았을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원고를 쉽사리 찾게 될 때 20여년의 적공(積功)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음은 신명(神明)의 도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매, 이 원고 상자의 뚜껑을 여는 이의 손이 떨리었다. 원고를 손에 드는 이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47년.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조선말 큰 사전’ 1권이 발행된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우리말을 집대성한 결과이자 민족적 권위를 인정받은 단체에 의해 만들어져 이후 수없이 많이 발간된 ‘국어사전’의 기준이 된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이 탄생한 것이다. 주시경 선생의 ‘말모이’ 작업 시작 이후 46년,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 시작 이후 28년 만이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 ‘한글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선말 큰 사전(3권부터 ‘큰 사전’으로 제목 변경)’ 발행 및 한글연구를 계속한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지만, ‘조선말 큰 사전’은 1권 발행 이후 1957년 10월9일까지 10년간 총 6권, 3,5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결실을 맺었다.

 

혼탁해진 한글 사용…사전(辭典)의 사전(死典)

 

우리 고유의 말과 문자를 갖고 그것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은 모국어를 가진 나라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다. 또한 국어사전은 모국어를 가진 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이다. 만약 과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어를 국어로 쓰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일본어 사전이 국어사전이 됐을 수도 있다.

 

 

‘조선말 큰 사전’ 머리말에는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 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라고 돼 있다. 나라 고유의 문자와 말은 그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한글 사용과 사전의 위상을 보면 우리말에 대한 소중함과 그에 대한 인식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10월9일 한글날이나 돼야 우리말에 대한 소중함을 잠깐 생각하는 정도랄까? 아이들은 우리 말 단어를 모르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영어 단어 모르는 것은 창피해한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는 언제부턴가 영어 수업이 국어 수업보다 더 중요한 취급을 받게 됐고, 우리 말보다 영어를 더 배우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든다. 교과서에서 한글의 기원을 교육하고 문법을 가르치지만, 어디까지나 학교 공부를 위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 대학생들은 강의를 영어로 듣고 논문도 영어로 쓴다. 혹자는 우리 말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길거리에 내걸린 간판 역시 온통 영어다. 한글 표기가 없다면 여기가 외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접을 못 받는 한글은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 문자다. 한글은 제2회 세계 문자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문자의 기원, 구조와 유형, 글자의 결합 능력, 독립성 및 독자성, 실용성, 응용 개발성 등에서 그 우수성이 인정되고, 문맹률이 1~2% 수준일 정도로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어휘가 풍부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UNESCO)는 1990년부터 매년 9월8일 전 세계 문맹 퇴치를 위해 헌신하는 개인, 단체, 기관을 대상으로 ‘세종대왕 문해상’을 시상해오고 있는데, 상 이름에 ‘세종대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한글이 그만큼 배우기 쉬워 문맹을 없애는 글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한글은 5대 언어의 위상을 자기하고, 세계 6,000여종의 언어 중 분포와 응용력에서 10위 안에 들 정도다. 교육부의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국내 외국인 유학생은 2008년 6만3,925명에서 2018년 14만2,205명으로 10년 사이 2배 넘게 증가했다.

 

사전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발달로 대부분의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됨에 따라 사전을 사용하는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사전(辭典)’이 ‘사전(死典)’이 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의 국어사전 납본(정기간행물법상 출판사 의무로 규정된 출간물 본보기로 도서관에 제공) 현황에 따르면 새로 발간된 국어사전 수는 1991~2000년 101권에서 2013년 1권으로 급감했다. 거의 발간되지 않는 것이다.

 

 

사전은 증보를 통해 기존의 말의 의미 변화나 새로운 말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결국은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포털사이트 등을 통해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기존에 발간된 사전을 디지털 환경에 맞게 가공한 것이기 때문에 사전의 증보가 없다면 나중에는 말의 뜻을 알고 싶어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 ‘말모이’에는 “말과 글은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낫다”는 대사가 나온다. 외국어 홍수 속에서 외국어를 조금 덜 쓰고, 바른 표현을 찾아 쓰기 위한 노력을 조금씩 기울인다면 지금보다 더 건강하게 우리말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후대에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이 멸망한다”는 주시경 선생의 말을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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