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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86세 암벽등반가 '이본 쉬나르'의 학교에서 도망치기

친환경 기업, 『파타고니아』 창업자

기존의 학교 커리큘럼으로 세상사가 해결될 것이라 보는가? 유한한 지구 위에서 기업의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경제학자일 거라고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유어트 볼딩(Kenneth Ewart Boulding, 1910~1993년)이 말했다.

 

이처럼 모든 기업이 이윤추구와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 그와 정반대의 길에 도전한 한 기업가가 있다. 올해 86세 세계적인 아웃도어 기업인, 파타고니아의 창업자이자 전설적인 암벽등반가인 이본 쉬나르(Yvon Shouinard, 1938~)이다.

 

그의 자서전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을 읽다 보면, 끝없이 성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과 ‘휴식’을 필요로 하는 지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이 기업가의 진심 어린 시도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우리를 먹여주고 보호하고 살아가게 해 주는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기업모델을 만들기 위해 통념에 도전했다는 그의 ESG(환경, 사회적 역할, 투명) 경영이 무엇인지 2편의 연재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1편】 

옳은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압도적으로 성공하기

 

나는 한국의 농부로부터 지속 가능한 기업이 무엇인지 배웠다

 

학교와 수업이 싫었던 나는 산에 가서 암벽을 타고, 골프장 호수에서 몰래 낚시하고, 파도가 치면 서핑을 즐겼다. 그렇게 학교의 규칙과 교육과정을 버리고 자연이 만들어 놓은 커리 큘럼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집 헛간을 개조해 만든 대장간에서 내 손으로 암벽등반 장비를 만들어 썼다가, 내가 만든 장비의 품질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서 생각지도 않게 암벽 장비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회사를 세웠다.

 

그렇지만, 나는 사업을 하는 거의 60년 동안 정말이지 이윤을 추구하고 성장에 목을 매는 그런 사업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왕 사업을 하는 거, 이윤추구나 성장을 목 표로 하지 않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을 찾아보고 싶었다.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나는 60년대 초 주한 미군으로 근무하면서 보았던 한국의 농부로부터 지속이 가능한 경영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들은 자신의 논밭에 거름을 줘서 기름진 흙을 후손에게 물려줬다. 이 같은 유산(遺産)의 전승은 수천 년간 한국 땅에서 이어져 왔다. 


지금이야 농약과 화학비료를 써서 이 같은 전통이 상당 부분 퇴색됐다. 지금 흙 살리기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천연퇴비를 사용한 기름진 흙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면, 한국에서의 지속적인 농업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지속 가능한 업(業)이란 기업을 포함해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위태로운 시기를 맞고 있다는 전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 우리 회사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지구 최후의 날을 예측하는 책들이 자연의 파괴와 문명의 붕괴를 피하려면 즉시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권고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80대 중반을 살아낸 세월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됐든 한국이 됐든, 인생살이란 결코, 만만치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어떤가? 그런 80 중반의 할아버지로부터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선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그래서 나는 미래의 기업가가 될 짓을 했다. 학교에서 도망쳤다.

 

"난 커서 꼭 기업가가 될 거야” 이런 꿈을 꾸는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들은 보통 소방관이나 돈을 많이 버는 운동선수, 산림감독관이 되기를 바란다.

 

석유 재벌인 코크 형제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를 영웅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나는 크면 모피 사냥꾼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퀘벡 출신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아주 강한 분이셨다. 교육이라고는 3년 밖에 받지 못하시고 9살 때부터 가족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9명의 형제자매 중 가장 일을 열심히 하는 아버지를 메인주로 데리고 와서 방앗간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나이 10살 때였다. 이후 아버지는 미장공, 목수, 전기공, 배관공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메인주 리스본에 있는 워럼보 직물공장에서 방직기를 수리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육체노동에 대한 애정과 물건을 보는 안목, 특히 좋은 도구를 가려내는 눈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장작이 타고 있는 주방 난로 옆에 앉아 위스키 한 병을 마시고 전기 기술자용 펜치로 당신의 이를 뽑았다. 상한 이도 멀쩡한 이도 있었는데, 말이었다. 아버지는 손쉬운 일에 동네 치과 의사가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리스본에 사는 사람은 우리를 비롯해 거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곱 살까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누나인 도리스와 레이첼은 나보다 9살, 11살 위였고 형은 군대에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 이본느는 집안에서 가장 모험심이 강하셨다. 

 

1946년 가족 모두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된 건 순전히 어머니의 계획이었다. 어머니는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날씨가 아버지의 천식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아버지가 직접 만든 가구를 비롯해 온갖 세간을 경매로 처분하고 6명의 가족이 크라이슬러에 끼어 탄 채 서부로 향했다. 그런데 66번 국도 어디쯤에선가 우리 가족은 인디언의 움막을 보고 차를 멈췄 다. 어머니는 여행을 위해 챙겨 두었던 옥수수를 꺼내 호피족 여자와 그녀의 배고픈 아이들에게 전부 건네주었다. 그게 자선 활동에 관한 나의 첫 경험이었다. 

 

버뱅크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다른 프랑스계 캐나다인 가족의 집에 얹혀살았다. 나는 공립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급에서 가장 키가 작았고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게다가 이본이라는 여자 같은 이름 때문에 끊임없이 놀림을 받았다. 어떻게든 나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기업가라면 누구나 할 법한 짓을 했다. 학교에서 도망쳤다. 


부모님은 나를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시켰다. 수녀님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해 내 성적표는 거의 D 일색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나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나는 대부분 시간을 혼자 보냈다. 이웃 아이들이 혼자 길을 건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때, 나는 자전거를 타고 11~12km를 달려 사설 골프장 안의 호수까지 가곤 했다. 경비들의 눈에 띄지 않게 버드나무 사이에 숨어 송어와 농어를 낚았다. 


그리피스 공원과 로스앤젤레스 강과 같은 도심 속의 미개척지를 발견한 이후에는 학교가 끝나면 그곳으로 달려가 작살로 개구리를 잡고 올가미로 가재를, 활과 화살로 토끼를 사냥했다. 여름이면 깊은 웅덩이에서 수영했는데, 한 영화 스튜디오에 딸린 필름 현상실의 배출 파이프가 그곳으로 연결된 탓에 웅덩이에는 거품이 가득했다. 내가 혹시 암에 걸린다면 아마 원인은 그 시절에 있을 것이다. (『파다타고니아-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p.31~p.35에서 전재(全載) 』,  

 

 

암벽등반 장비를 내 손으로 만들려고 대장장이 일을 독학했다

 

고등학교는 최악이었다. 기술 외에는 어떤 과목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반항아였고 방과 후면 늘 남아서 벌을 받았다. 나는 “앞으로는 ...를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장을 500번쯤 쓰는 벌을 받았는데, 연필 세 자루에 막대를 끼우고 고무줄로 묶어서 한 번에 세 줄을 쓰는 빛나는 창의력을 발휘해 예비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나는 공부보다 등반, 카약, 민물낚시에 매진했다. 한 번은 로프 3개를 한데 묶어 엄청나게 긴 줄을 몸에 걸고 라펠 (rappel, 높은 곳에서 밧줄을 타고 수직으로 내려오는 것)을 시도하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처음 한 발을 떼어 허공으로 뛰어올랐을 때 로프가 엉기면서 내 목을 감았고 다른 로프가 아래로 늘어지면서 공중에서 뒤엉겨버렸다. 로프를 끌어올리려니 이놈의 로프가 어찌나 무거운지, 젖 먹던 힘을 다해 끌어올리긴 했으나 엉킨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을 버티다가 힘이 빠지자 더는 못 버티겠어,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머니 얼굴이 스쳐 가고 생을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기적처럼 매듭이 풀렸다. 아, 구사일생으로 발을 땅에 디딘 순간, 나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 키며 땅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눈썹이 희고 양쪽 흰머리만 소복하게 남은 내 머리가 가운데가 벗겨져 대머리가 되는 동안, 정말이지 온갖 위험한 일을 해 오면서 죽을 뻔한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은 솔직히 그다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모든 생명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나를 비롯한 인간의 잘못으로 정말 멋진 많은 동식물과 귀중한 토착문화가 파괴되고 급기야 여섯 번째 대 멸종의 목격자가 된다는 게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종이 처한 곤경을 바라보는 일은 나를 슬프게 한다.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2년제 지방대학에 다니면서 형이 운영하는 흥신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등반 장비를 직접 만들고 싶어서 1957년, 고철상에서 석탄 땔 때 쓰는 중고 화덕과 60kg이 넘는 모루, 집게와 해머들을 사서 대장간 일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요세미티의 높은 암벽을 오르려면 수백 개의 피톤을 박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장비는 모두 유럽산이었고 피톤은 연철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 번 암벽에 박아 넣은 피톤은 그 자리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유럽인들은 등반을 정복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뒤따르는 정복자들이 등반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남겨 두었고 다시 사용하려고 뽑으면 피톤의 머리가 부서지곤 했다.

 

나는 크롬몰리브덴 강철로 만들어진 수확 기계의 날로 나의 첫 번째 피톤을 만들 어 요세미티 등반에 사용했다. 이 피톤은 요세미티의 크랙 등반에 이상적이었고 몇 번이고 뽑아서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알음알음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왔다. 크롬 몰리브덴 강철로 1시간 동안 만들 수 있는 피톤은 2개였다. 나는 이것을 개당 1달러 50센트씩 받고 팔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산은 20센트면 살 수 있었지만, 나처럼 최신식 등반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든 새로운 장비가 필요했다. 

 

나는 또, 카라비너(carabiner, 타원 또는 D자형 강철 고리)도 더 강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 낙하단조(落下鍛造, 금속을 녹인 후 틀 안에 붓고 낙하해머로 두들겨 형체를 만듦) 주형 (鑄型, 거푸집)을 샀다. 부모님으로부터 825달러 35센트를 빌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아메리카 알루미늄 본사로 직접 찾아갔다. 18살짜리가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리바이스 청바지와 가죽끈 샌들을 신고 간 거였다. 

 

나는 1년에 200일을 침낭에서만 잤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버뱅크에 있는 우리 집 뒷마당의 낡은 닭장을 작업장으로 만들었다. 도구들을 대부분 가지고 다닐 수 있어서 차 안에 싣고 캘리포니아 해변을 돌아다니면서 서핑을 한바탕 즐긴 다음, 해변에다 모루를 내려놓고 끌과 망치로 앵글 피톤을 만들다가 중단하고, 파도가 좋다는 또 다른 해변으로 옮겼다.

 

나는 쓰레기통에서 음료수 병을 주워다 팔아서 자동차 연료비를 충당했다. 겨울에는 장비를 만들고, 4월~7월에는 요세미티의 암벽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여름이 되면 열기를 피해 와이오밍, 캐나다, 알프스의 높은 산을 찾아다녔다. 


가을에 요세미티로 다시 돌아와 11월 눈이 올 때까지 머무르는 방식으로 몇 해를 보냈다. 그동안 나는 차 뒤에 싣고 다니는 장비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수입은 많지 않았다. 하루 50센트에서 1달러 정도로 몇 주를 버틴 적도 있었다. 

 

하자 있는 캔 식품을 파는 할인점에서 나는 찌그러진 고양이 먹이 로 쓰는 참치 통조림 두 상자를 사서, 그것에다 피켈로 잡은 얼룩 다람쥐, 푸른 들꿩, 호저와 오트밀, 감자를 보충해 먹었다. 나는 1년에 200일 이상 군용 슬리핑 백에서 잤지만, 마흔이 될 때까지 텐트를 사지 않았다. 바위와 낮게 드리운 전나무 가지 아래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1962년 가을, 척 프렛과 나는 동부 해안 등반을 마치고 오는 길에 화물열차를 탔다가 애리조나 윈슬로에서 체포되어 18 일간 유치장에서 보냈다. 뚜렷한 소득원이 없는 상태로 목적 없이 방황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내가 가진 돈은 15센트 뿐이었고, 눈이 오고 있었다. 경찰은 30분 안에 그곳을 떠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등반을 통해 자립심을 배웠으니까. 

 

몇 주 뒤 영장이 날아왔다. 나는 혈압을 올려서 신체검사에 탈락할 생각으로 간장을 통째로 마셨다가 너무 역해서 토했다. 내가 입대하자 내 직업이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군은 자신들의 논리에 따라 나를 나이키 미사일 시스템 정비공으로 만들려고 했다. 기초 훈련을 받은 나는 버뱅크 출신의 한 여성과 급히 결혼식을 올리고 곧장 한국으로 파병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장교(將校)에게 경례하는 것도 잊고, 단정치 못한 겉모습에 단식 투쟁을 하거나, 약간 정신이 나간 듯이 행동하는 등 계속 말썽을 부렸다.

 

하지만 군사 법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군은 나를 민간인들과 일하는 곳으로 보냈다. 거기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발전기를 켜고 끄는 것뿐이었다. 나는 한 친구에게 돈을 주고 그 일을 맡기고는 작업장을 몰래 빠져나와, 젊은 한국인 등반가들 몇 사람과 서울 북한산의 매끈한 화강암 봉우리를 등반하기 시작했다.(북한산 인수봉의 쉬나드 A, 쉬나드 B코스 라는 이름은 그때 만들어졌다) 

 

 

북한산 인수봉에 내 이름의 암벽 코스를 개척하다 


1964년 기적적으로 명예제대를 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바로 요세미티 계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다시 등반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업장을 버뱅크의 록히드 항공기 공장 근처의 양철 헛간으로 옮겼다. 그해에 나의 첫 번째 카탈로그가 나왔다. 생산품목과 가격을 나열해 놓고, 5월부터 11월까지는 빠른 배송을 기대하지 말라는 직설인 문구를 적었다. 


나는 등반을 함께하는 친구 5명을 내 첫 직원으로 고용했다. 1966년 나는 버뱅크에서 서핑하기 좋은 해변과 가까운 벤투라로 이주하고, 버려진 도살장의 양철 보일러실을 빌려 작업장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장비에 대한 수요가 손으로 만들어서는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다 보니 정교한 도구와 주형, 기계를 도입해야만 했다. 그즈음 톰 프로스트, 도린 프로스트와 동업을 시작했다.

 

톰은 항공 엔지니어로 디자인과 미학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고, 도린은 장부 작성과 업무 마무리를 도맡았다. 그들과 9년 동안 나는 거의 모든 등반 정비를 재설계하고 개선함으로써 더 강하고 더 가볍고 더 단순하고 더 기능적으로 만들었다. 


나와 그들의 마음속의 최우선은 항상 품질이었다. 적절치 못한 도구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이 우리 제품의 최대 고객이었으므로 죽음에 이르는 그 사람이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디자인에 관한 나와 우리의 지침은 프랑스의 비행사인 생텍쥐페리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항공기뿐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산업 활동, 모든 계산과 추정, 사람들이 초안을 만들고 청사진을 그리는데 보낸 모든 밤은 하나의 원리로 수렴된다. 
‘단순성’이라는 궁극의 원칙으로 가구의 곡선이나 배의 용골이나 비행기의 동체를 다듬는다고 생각해 보자. 장인 정신을 담은 수 세대에 걸친 실험을 통해 인간의 가슴이나 어깨의 곡선과 같은 궁극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법칙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일에 임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완벽함이란 더는 더할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는 뺄 게 없는,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상태에 이를 때에 달성된다. 

 

 

완벽함은 더는 뺄 게 없을 때 이루어진다. 그것이 단순함이다 


나는 선(禪)을 통해 단순해지는 법을 배웠다. 단순해지는 것이 가장 풍성한 결과를 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벽을 오르는 사람은 커다란 등반 장비들을 베이스캠프에 남겨 두고, 오로지 자신의 기술과 바위의 특성에만 의존해 암벽을 맨손으로 오를 수 있도록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했을 때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 동안 강철 피톤을 벼리는 대장장이로서 선을 배웠다. 과도한 움직임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손을 바꾸지 않고 움직였다. 피톤을 잡고 두드리고 다시 노에 넣어 온도를 높이고, 또 다른 피톤을 집는 과정이 궁도나 다도가 보여주는 유려함이나 우아함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긴 일과가 끝나면 낡고 녹슨 기름통이 수십억 개의 작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암벽등반을 가서 내가 만든 도구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선(線)이 가장 간결했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뭔가를 추가해서 도구의 성능을 높이려고 했을 때, 톰과 나는 ‘제거’를 통해 보호라는 목적과 강도(剛度)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무게와 부피를 줄이면서도 성능을 높이는 목적을 달성했다. 


다음 편에서는 제2편 『유기농 목화 사업』이 이어집니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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