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선거에 관한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평생 수없이 많은 선거를 지켜보다 보니 비슷한 구호와 반복되는 장면들 속에서 어느새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라는 생각도 들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며 생기는 경험과 통찰 덕분에 예전처럼 뜨겁게 반응하지 않아도 사람과 정책을 조금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관심의 크기는 줄어들 수 있어도 판단의 깊이까지 얕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의 작가 로저 로젠블랫은 최근 노년에 관한 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원칙들을 제시했다. 뉴욕 타임스는 오늘(27일)자 사설에서 그의 책에서 발췌한 우아하게 늙는 법, 11가지를 제시한다.
“불멸을 추구하지 마세요”, “테두리만 보세요”, “타협하지 마세요”, “이걸 다시 해야 한다는 말이 들리면 도망치세요” 등 짧고 농담처럼 들리는 문장들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숨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원칙들이 개인의 노년뿐 아니라 오늘의 지방선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방선거는 흔히 중앙정치의 ‘축소판’처럼 취급된다.
대통령 선거나 총선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지역 토호와 정당 조직의 영향력이 더 크게 작동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과 가장 가까운 정치는 사실 지방정치다. 골목길 조명 하나, 버스 노선 하나, 복지관 운영 하나가 모두 지방정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지방선거야말로 거창한 이념보다 삶의 태도가 드러난다.
로젠블랫의 우아하게 늙은 법 가운데 “불멸을 추구하지 마세요”는 지방정치에서 꼭 필요한 말이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거대한 개발사업이나 전시성 사업에 집착한다. 화려한 랜드마크를 세우고, 자신의 임기 안에 성과를 남기려 한다. 하지만 시민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역사에 남을 기념물이 아니라 안전한 골목과 안정된 삶이다.
정치가 불멸을 꿈꾸기 시작할 때 행정은 과시가 된다. 지방정치는 오래 기억될 업적보다 지금 시민에게 필요한 실용을 우선해야 한다.
“타협하지 마세요”라는 원칙 또한 선거철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는 협치와 조정의 과정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원칙까지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선거에서는 유독 학연과 지연, 조직 논리가 강하게 작동한다. 능력보다 줄이 우선되고, 정책보다 이해관계가 앞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대립이 아니라, 시민의 이익이라는 기준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타협은 가능하지만, 양심까지 할인해서는 안 된다.
로젠블랫은 또 “우리는 이걸 다시 해야 한다는 말이 들리면 도망치라!”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만남을 갖고 나서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는 말은 거의 실현 불가능한 거짓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는 선거철 정치인의 언어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만들겠습니다”,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매번 반복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비슷한 말들이다. 유권자들은 이제 익숙한 구호에 박수 대신 질문해야 한다. 예산은 가능한가? 실행 계획은 있는가? 지난 약속은 지켜졌는가? 를 따져봐야 한다. 공허한 수사는 정치의 언어이지만, 검증은 시민의 의무다.
로젠블랫의 우아하게 늙어가는 원칙인 “테두리만 보세요”라는 조언은 중심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장 화려한 자리, 가장 큰 목소리, 가장 눈에 띄는 성과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오히려 가장자리에서 드러난다.
지방정치도 마찬가지다. 좋은 지방정치는 중심의 환호보다 주변의 침묵을 먼저 듣는 정치다. 결국 지역의 품격은 가장 약한 곳을 어떻게 돌보느냐에 달려 있다.
개인의 삶에서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시끄러운 이웃, 얄팍한 동료, 끊임없이 비교를 부추기는 사람들은 우리의 시선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런 소음에 매번 반응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중심의 소란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다. 주변의 불필요한 소음을 흘려보내고 자신이 향하는 길에 집중할 때,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안정적으로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상기하자.
로젠블랫의 원칙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겸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덜 욕심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지방정치도 마찬가지다.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더 많이 경쟁하는 정치가 아니라 조금 더 조용하고 성실한 정치가 필요하다. 시민들 역시 감정적 분노와 진영논리 대신 생활의 기준으로 후보를 바라봐야 한다.
지방선거는 거대한 국가 담론보다 훨씬 생활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더 진솔해야 하고,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불멸을 꿈꾸는 정치보다 하루를 안전하게 만드는 정치, 중심만 바라보는 정치보다 가장자리를 돌보는 정치가 필요하다. 로젠블랫이 말한 ‘우아하게 늙는 법’은 결국 민주주의가 성숙해지는 방법과도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