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넝쿨포럼 회장

  • 등록 2015.02.15 12: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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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과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지역 일꾼


전국에서 처음으로 마을버스를 만들고, 시내버스에 에어컨과 푹신한 에어 의자를 과감히 장착해 버스업계에 새바람을 일으킨 김석우 삼환운수 대표, 그는 인천시 대중교통 업계에 불어넣었던 혁신의 DNA를 두 번에 걸친 인천시 남동구 구의원을 지내면서 지역민들에게 펼쳐 보였다. 충남 당진에서 김치 한 단지와 쌀 한 말만 달랑 짊어지고 인천으로 올라온 김 회장은 일생을 오로지 뚝심과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던진 지역일꾼이다. 남다른 인생 역정과 아직도 못다한 꿈을 간직하고 있는 김석우 넝쿨포럼 회장을 만났다.


현재 대표직을 맡고 있는 삼환운수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오.


"삼환운수는 제가 창업했습니다. 저는 1979년도에 당진에서 인천으로 상경을 했습니다. 당진에서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농촌에서도 할 일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 어렵겠다고 생각해서 인천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때가 27살이었는데 포부도 컸습니다. 김치 한 단지, 쌀 한 말, 돈 10만원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시골에서 번 돈은 모두 부모님을 드렸죠. 그런데 올라와 보니까 최종학력이 중학교 졸업이다 보니 먹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할 일은 많이 있는데 배운 게 없고 기술이 없어서 갈 수 있는 일자리가 별로 없었죠."


"그래서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할 때 아버지가 입학금을 한 번만 줬습니다. 사친회비를 안 주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다니기도 어렵고 늘 교무실에 끌려 다녔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1학년을 마친 후 2학년부터는 돈을 벌어서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충청도 당진 시골에서 돈을 번다는 게 어렵지만 시골에도 할 일이 있었습니다. 쟁기질을해서 밭을 간다든가 소 마차를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경운기를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제가 있던 시골 마을에서 나만큼 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벌었습니다. 그때가 10대인데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드렸습니다."


"도시만 해도 구두도 닦고 신문배달도 할 수 있지만 시골은 그런 일이 없잖아요. 그래도 찾아보니깐 일이 있더군요. 그 당시는 시골에 도로는커녕 변변찮은 농로도 없었죠. 그때가 1960-70년대인데 가을에 농사를 다 짓고 물이 마르면 제가 조금씩 길을 냈었습니다. 그 길 위로 소마차를 끌어서 거름도 내고 산에서 걷어온 나무를 운반해 주며 돈을 벌었습니다. 길을 직접 만들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다치기도
하고 소와 함께 넘어지기도 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갈수록 고생만 되지 수익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버티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27살에 인천으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모아 놓은 돈이 없어서 10만원만 가져 온 게 아니라 부모님께 다 드리고 온 것입니다. 쌀도 몇 십 가마가 있었는데 한 말만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6남매 중 둘째인데 장남처럼 일을 했습니다. 막상 인천에 오니까 배운 게 중학교가 전부다 보니 할 게 없었습니다. 거기다 중학교도 일하면서 다니다 보니 제대로 공부를 했겠습니까.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한 거지요. 토요일은 일하려고 학교도 안 갔습니다. 인천에 와서 남의 집에 있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그리고 밥도 주고 돈도 준다고 해서 대형화물차 조수로 들어갔습니다. 원목을 나르던 화물차였는데 3개월만에 원목를 나르다가 허리에 부딪쳐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1년 동안 병원에서 보냈는데 중환자실에 3개월을 누워 있었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을 땐, 허리가 나아도 정상적인 인간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낙담해 병원에서 약은 안 먹고 술만 먹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살아나더라고요...허허. 퇴원을 했는데 할 일이 없었어요. 막일꾼으로 다니다가 쓰러지고...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생각한 것이 장사였습니다. 문제는 돈이 없는 거였는데 외상으로 해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옛날에 ‘OB베어’라고 생맥주를 파는 거였죠. 그때 인기가 대단했죠, 돈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팔아서 준다고 외상으로 오픈 한 겁니다. 그게 사업의 첫 발이었습니다. 그걸로 돈을 번 다음에는 4.5톤 화물차를 사서 시골에 있는 농산물을 도시로 갖고 와서 팔았습니다. 이후 식당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에 갔는데 부부가 10미터 정도 떨어져서 택시 합승을 하는 걸 봤어요. 지금 같으면 합승이 없는데 당시는 한 사람당 돈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1천원이면 갈 것을 2천원에 가야 하는 거죠. 그 시절에는 버스가 정확한 시간에 오질 않았거든요."


전국 최초로 마을버스를 만들다


"그걸 보고 대중교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가용 마을버스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최초로 마을버스를 만든 것인데 영업용이라 아니라 자가용이다 보니 불법이었죠. 마을버스란 업태가 없었잖아요. 그런 게 없었으니까, 영업용 허가를 낼 수가 없었죠. 버스를 사다가 100원씩을 받고 사람을 태우는 거였어요. 동암역까지요. 그러다 보니까 택시들이 버스 앞에 와서 방해를 하고 그랬죠. 그때가 1982년이었습니다. 게다가 택시기사나 버스기사들이 늘 신고를 해서 제가 검찰로, 경찰로 수시로 잡혀갔습니다."


"제가 가서 하는 말이 '제가 죄를 지었으면 잡아 가세요'이거였죠. 잘못한 것은 교통이 불편한 사람들 편리를 도와준 죄 밖에 없다. 그러니 잡아가려면 잡아가라. 그러다보니까 잡아가도 귀찮잖아요. 벌금을 내고 풀려났어요. 벌금을 많이 내라고 하면 돈이 없으니 잡아가라고 하니까 ...저한데 얼마 벌금을 낼 거냐고 물어보고 벌금을 물렸죠.(웃음) 제가 하는 걸 보면서 하나 둘 마을버스가 생겼어요. 그 사람들이 저한테 찾아와서 물어보죠.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래서 인천시청에다가 정상적으로 허가를 내줘라. 주민이 편리한 것인데 왜 안 해주냐고 했죠. 필요치 않으면 그 사람들이 이용을 안 할 것이고 나 역시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필요로 하니까 하는 거다. 이건 범죄가 아니지 않나. 그래서 1992년도에 한정 면허라는 게 나왔죠. 기간을 두는 면허였는데 정해진 기간까지 하고 난 후는 다음에 또 보는 거죠. 그렇게 연장을 계속해오다가 현재는 지선버스로 되어 허가를 받게 된 것이죠. 정상적인 대중교통 수단이 된 것입니다."


적자노선 버스 인수해 최초로 에어컨과 푹신한 에어 의자 설치


"마을버스만 하다가 나중에 삼환교통이라는 걸 만들어서 시내버스도 했습니다. 인천에서 운행되던 시내버스들 중 도저히 운행을 못하겠다는 적자노선을 제가 반납 받아서 한 거죠. 당시 인천시가 18개 적자노선을 반납을 받았는데 저희 회사가 공개모집을 통해 3개 노선을 인수했습니다. 그땐 시내버스에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걸 받아서 최초로 에어컨을 장착했습니다. 그리고 에어의자로 교체했습니다. 고속버스에나 몇 대 장착했던 것을 수입품이었는데 제가 그걸 모든 버스에 장착했습니다. 운전수들이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서 난리가 났죠. 3개 노선만 받아서 70대를 운행하려면 150명을 모집해야 했는데 굉장했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적자를 줄일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시내버스를 보니까, 버스를 기점에서 출발해 종점으로 가는 방식으로 운행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중간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려는 사람은 한 시간을 기다려야했어요.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기점과 종점, 양쪽에서 동시에 버시를 출발하게 한 겁니다. 같은 시간에 동시출발을 하게 되면 어느 정류소에 있든간에 훨씬 빨리 버스를 탈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래 되니 주민들도, 시청에서도 난리가 났죠. 김석우가 버스를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공무원들이 제 말을 많이 따라주었죠. 수익도 올리고 지역민들의 불편도 해소한 겁니다. 적자투성이인 버스를 반납 받아서 1년 만에 흑자를 만들었죠."


현재 버스의 문제점은 뭐라고 보십니까?


"지금은 버스사업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버스 사업은 이제 끝났다고 봐요. 준공영제로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이냐면 시하고 사업자하고 같이 협력해서 하는 건데 이대로 가다 보면 적자가 나요. 그러면 시에서 지원을 하는 겁니다. 결국 지원금이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천시만 해도 처음에는 1백억이면 될 것이라고 계획을 세워서 했는데 2백억으로도 안되고 5백억이 들어갑니다. 앞으로 천억이 들어가게 될 겁니다. 서울은 조 단위가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허가만 내 주면 자기들이 잘 운행해왔는데 지금은 지원을 해주면서도 어렵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내고 수익도 내고 해야 하는데 사업주가 그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공영제를 하면서 환승이라는 게 생겼거든요. 환승은 무료입니다. 현재 10명이 타면 5명은 환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지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앞으로 서울과 수도권을 연계하여 환승을 하자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점점 지원금이 늘어나야 합니다. 세금만 자꾸 늘어나고 싸다 보니까 소비를 함부로 하게 되고요. 그만큼 낭비가 된다는 얘기죠. 수도, 하수도, 전기, 쓰레기 다 낭비를 하지 않습니까. 아끼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철에서 빨리 나가서 탈 수 있어야 이용을 많이 하죠. 그전에는 택시가 먼저였습니다. 버스는 저 뒤에다 정차하도록 돼 있다 보니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면 10분을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버스를 역전 바로 앞에다 넣어줘야 한다고요. 택시하고 싸움 많이 했죠. 제가 삼환교통을 가지고 송래역을 들어 갔는데 그전에는 버스가 안 다녔어요. 그전에는 역이 아주 작았어요. 그런데 제가 버스를 가지
고 들어가니까 역이 확장이 되고 역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고 그런 거죠. 저는 어디든 버스가 젤 앞으로 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중교통을 위해 제언을 한다면?


"현재로서는 뚜렷한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버스전용차선을 만든다고 해도 인천은 몇 군데 되지 않습니다. 서울은 그래도 나름대로 되어 있지만 인천은 버스전용차선이 있어도 불법차량 때문에 되질 않아요.
또 버스기사가 브레이크를 잡지 않았는데도 넘어져서 병원에 가는 사람이 많아요. 그것 때문에 저도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그 보험료가 생으로 나가는 거죠. 버스전용차선을 제대로 만들고 환승이 수월하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역전이나 전철역에서 버스를 가장 먼저 탈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역전까지 버스를 갈 수 있게 만든 게 접니다. 전철에서 빨리 나가서 탈 수 있어야 이용을 많이 하죠. 그전에는 택시가 먼저였습니다. 버스는 저 뒤에다 정차하도록 돼 있다 보니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면 10분을 걸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버스를 역전 바로 앞에다 넣어줘야 한다고 요. 택시하고 싸움 많이 했죠. 제가 삼환교통을 가지고 송래역을 들어갔는데 그전에는 버스가 안 다녔어요. 그전에는 역이 아주 작았어요. 그런데 제가 버스를 가지고 들어가니까 역이 확장이 되고 역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고 그런 거죠. 저는 어디든 버스가 젤 앞으로 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동구의원을 2년 연속 지내고 구의회 의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만 아쉬움이 없습니까?

 

"저는 구의원 두 번만 한다고 하고, 그 말대로 딱 2번 하고 그만뒀습니다. 다른 사람도 해야죠. 초선이라면 1년은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한 번 더 해서 일을 제대로 해야죠.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로 4선, 6선 이렇게 하는데 그게 일 잘해서 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오래 한다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회장을 맡았다면 처음에는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죠. 그러나 몇 년 지나면 머리 속에 다 들어오죠, 그때부터는 처음의 의욕도 시들해지고 대충하게 되는 거죠."


"국회의원도 두 번만 해도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방자치단체장이든 구의원이든 그 일을 하려면 첫
번째는 솔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부지런해야 하고 세 번째는 낭비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장들 보면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축제를 한다든가 하면서 낭비를 많이 하는데 난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구청장이 되고 싶었던 게 그거였습니다. 낭비하지 않는 것을 한 번 보여주겠다. 공무원들한테 주민들한테도 돈을 낭비하지 않고도 일 잘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끝내려고 했는데 공천을 주지 않더군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너무 잘 아는데도 공천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구청장이 되려고 했던 건, 아까 말씀 드린 이유가 있고요. 그 다음에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남동구에 보면 수급자가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일을 주고 싶었습니다. 정부에서 일자리도 주고 수급도 주자. 그래서 그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나아지도록 해주자. 저는 국회에 들어가서도 그걸 하고 싶었습니다. 현재 어떠냐면 수급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잡아서 얼마를 받게 되면 수급을 안 줘요. 안 주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일을 안 하는 겁니다. 조금 더 벌어서 부자가 될 것도 아닌데 피곤하게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냥 주는 거나 받자 이런 거죠. 그래서 저는 수급도 주고 일자리도 주자는 거였습니다. 대신 그들이 어느 정도 월급이 올라가면 수급을 끊는 겁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으로 올라가면 수급을 80만원 주던 것을 60만원으로 줄이고 다시 150만원을 받으면 40만원으로 줄이고 200만원을 받으면 수급이 제로라든가 이렇게 단계를 줘야죠. 그래서 그 사람들도 생활할 수 있는 패턴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거죠. 그런 얘기를 아무리 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또 지역을 둘러보면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대형화물차고지를 별도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역 곳곳에 대형화물차의 불법주차가 아주 많잖아요. 그 사이 사이로 잘못하면 아이들이 지나다니다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여성들의 경우 위험하기도 하고요. 주택가에다 세워놓았다가 시동을 걸면 소음 공해도 있고 해서
그런 차들을 외곽으로 빼놓을 방법을 강구하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료는 아니죠. 그렇다고 이용료가 높으면 안 오니 합리적인 요금을 책정하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래서 예전에 그린벨트를 얘기했습니다. 그린벨트가 대부분 변두리에 있거든요. 수도권에 있는 밀집지역을 그린벨트로 묶은 다음에 다른 지역에 그린벨트를 조금 풀어서 빌라라든가 주택을 짓고 이주시켜 그린벨트를 교환하는 겁니다. 대신에 똑같은 평수를 주고 일부는 분양을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중앙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지자체나 이런 곳에서 이런 건의를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전문 지식 있는 사람들이 파고들어서 연구를 해보면 답이 나오리라고 봅니다."

요즘 보도를 보면 ‘인천이 뜨고 있다’는 표현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안상수 시장님 재임시절에 각종 개발이 활발했죠. 8년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노대통령 계실 때인데, 야당 시장이지만 당시는 활발했어요. 물론 많이 오버 한 것도 있습니다. 그 바람에 빚도 졌으니까요. 그 시절, 우리나라의 포크레인이나 중장비는 모두 인천으로 가야 먹고 산다고 할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그러다 4년 동안 침체되어 어려웠습니다. 앞으로 인천은 발전이 무궁무진하다고 봅니다."


"항구와 국제공항 있죠, 또 섬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연안부두에 철책선이 있었는데 그걸 없애면서 거기를 그냥 낭떠러지인 채로 놔뒀다는 게 아쉽습니다. 그걸로 관광수익을 창출했어야 하는 데 그게 부족했던 거죠. 예를 들어 배도 띄우고 레스토랑도 하고 할 게 많죠. 외국 가보면 바닷가를 이용해서 만든 게 좀 많습니까. 그런데 인천이 그걸 다 막아버린 겁니다. 앞으로 인천이 이걸 개방해서 만들어 내야죠."


도시행정학을 공부하고 계시는데 인천의 발전을 위해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동네 봉사하고 다녔더니 사람들이 출마하라고 해서 구의원이 된 겁니다. 시의원을 하라고 하는 걸 내 머리로는 도저히 시의원이 되면 안 되겠다 해서 구의원을 간 겁니다. 그때 구의원들은 공천이 없었습니다.
일만 잘 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구의회로 간 건데 거기서 한 의원이 저를 자극시켰죠. 의장출마를 하는데 배우지도 못한 사람(중졸인 자신을 지칭)이 의장출마를 한다고요...거기서 제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40대 후반인데 야간고등학교를 다닌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인천 전문대학교를 들어가 졸업을 했는데 4년제로 편입을 하려고 하니까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방송통신대학교를 2년 다녔습니다. 그후에 인천대에 4년제로 편입을 했습니다. 간신히 졸업했죠. 다행히 교수님들 잘 만나서 도시행정학이라는 걸 공부하고 지금은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논문을 써야 하는데 못 썼어요. 도시행정학을 해보니까 행정은 물론 건설, 토목, 주택, 교통 등을 두루 배우더라고요. 그걸 하고 보니까 눈이 떠지는 겁니다. 인천 돌아가는 거와 구가 돌아가는 게 다 보이는 겁니다."


어제 국회현정기념관을 가니까 수도꼭지를 올리면 물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곳은 정반대죠. 가는 곳마다 다르면 수도꼭지를 잘못 틀어 물이 얼마나 낭비됩니까. 이걸 법으로 정해야 합니다. 가정집이든 어떤 시설이든 똑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전기도 마찬가집니다. 모든 건물마다 마스터키를 만들자. 불을 켜고 나갔을 때 마스터키로 문을 잠그고 나가면 자동으로 꺼지게 하는 거죠. 그런 것만 제대로 된다면 원자력 발전소 하나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경제 전체가 참 어렵다고 걱정이 많습니다. 인천시의 지역 경제는 어떤가요.


"인천은 특색 있는 지역입니다. 저도 인천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인천은 토박이들이 7%밖에 안 됩니다. 이북에서 피난오신 분들이 10여% 그리고 충청과 호남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고 영남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외지 사람들이 많다 보니 애착이 없었던 거죠. 축구를 해도 고향축구를 응원했거든요. 이제는 우리 자식들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인천을 응원하고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죠. 공항, 항구, 섬 등을 잘 활용해서 우리 인천이 서비스로 성장해서 일자리 창출하라고 하는데 저는 가공 생산을 하는 중소기업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 인천에는 남동공단 등 두 곳이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인천 3백만 인구가 살아가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서울로 가는 겁니다. 외국에서 기업을 많이 유치해야 합니다. 부족한 공장을 많이 만들고 기업을 많이 유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천의 기업환경이 좋아야 합니다. 인천사람들이 인천에 있는 기업들을 배려하고 아껴줘야 합니다. 외국기업들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이유가 노사분규잖아요. 우리가 이제는 성숙된 마음으로 그런 것을 없애고 기업들이 우리 인천에 와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에 대한 불만이 높습니다. 국회의원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한다고 보는지요.


"중앙당부터 고쳐져야 한다고 봅니다. 중앙당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서 공천을 주면 비리가 적을 거 아닙니까. 그래야 주민들의 신뢰를 받습니다. 당리당략이라든가 자신들을 위한 욕심을 버려야죠. 내가 다음에 또 국회의원에 출마를 안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분명히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 그러면 되잖아요. 그
렇게 되면 아마도 국민들이 또 뽑을 겁니다. 국회의원들이 출마할 때는 굽신거리다가 당선되고 나면 목에다 힘이나 주고... 이런 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밖에 지역 활동으로 활발히 하고 있는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넝쿨 포럼과 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는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많습니다. 정치를 하고 싶은 것 외에 인재를 키워주고 싶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인재를 후원해 그 사람이 돈 걱정 않고 소신껏 정치를 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리가 안 생깁니다. 작년에 이런 일을 하려고 넝쿨포럼이란 걸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오로지 국민을 위한 일만 하도록 후원하는 정치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15


이상용 대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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