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대멸종 공포

2024.03.14 13:40:27

무법이 판치는 서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마을. 거친 모래바람을 뚫고 긴 코트를 걸친 한 사나이가 나타난다. 머리를 숙인 채... ‘돌아온 장고’처럼 멸종공포가 지구로 돌아와 세계적인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 ‘많다’는 뜻의 ‘poly’와 ‘위기’의 ‘crisis’를 합성한 말. 다양한 위협 요소가 세계적으로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상황)는 현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100년 전에 일어났던 위기를 살펴보면 복합 위기의 탈출구가 있지 않을까?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을 3편에 걸쳐 나눠 싣는다.(Extinction panic is back, right on schedule, 뉴욕타임스2024년 2월 2일자 Opinion기사 참조-편집자 주)

 

 

전쟁, 핵, 전염병, 그리고 인구 붕괴 등 지구를 덮치는 종말론적 공포

 

“총을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학생의 질문은 강의실 온도를 몇 도나 뚝 떨어드리는 살벌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동료 학자들, 대학생 몇 명, 그리고 기후 정의에 관해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초청 연사와 함께 만찬장에 있었다.

 

뭔가 혼란스러움을 감지한 그 학생은 명확하게 밝혔다. 즉 가까운 기간에 지구 행성에 대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런 대재앙은 사람들이 벽으로 둘러쳐진 공동체에 숨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느냐. 공화당원들이 무장하고 있는 판에 그녀는 자신이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초청 연사는 그 학생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더니 “학생이 총을 사는 것보다는 채소를 기르는 것에 대해 걱정을 더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런 식의 대화는 수년 동안 내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해 그 학생의 견해가 특이했다기보다는 이미 그런 견해는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자인 폴 세인트 아무어(Paul Saint Armour)는 행성의 대멸종을 예상하고-모든 역사적 대재앙과 지정학적 트라우마가 우리를 엄청나게 충격적인 미래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한 느낌은 전형적인 현대인의 태도라고 기술했다. 현대인의 그와 같은 태도는 복합 위기가 닥쳤다고 알려진 모든 곳에서 관찰할 수 있다.

 

기후 공포증은, 바로 그 학생이 표현한 것과 같은 종류로 심리학, 실험 치료법 그리고 “불에 타고, 물에 잠기는 세상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의 도덕성”이란 제목을 단 뉴욕타임스의 최근 기사에 관한 토론에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도록 하고 있다.

 

공중위생 인프라는 우리가 최악의 전염병을 각오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가운데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팬데믹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성공을 거의 눈앞에 두고 있는 ‘Open AI’의 쿠데타는 결과적으로 인공지능 기술이 곧 인류의 멸종을 위협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벌이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는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 인간을 앞지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다른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임박한 인구의 붕괴를 경고하고 나섰다. 엘론 머스크는 임신과 인구 감소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천만 달러를 기부하고 인구 감소 현상을 지구 온난화보다 문명에 훨씬 더 큰 위험이라고 불렀다. 미국의 양당 정치인들은 모두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물리적 충돌은 제3차 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N-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도널드 트럼프는 그것이 “핵의 단어”라고 서둘러 규정한다. 그는 그 단어를 집회에서 화두로 삼고 있다. 우리 인간종족이 핵의 길에서 벗어나 있을 수도 있는, 우리의 이기심과 폭력에 의해 꺼져버린 핵의 신념은, 아마도 양당을 자극하는 최후의 믿음일지 모른다.

 

역사의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대멸종의 공포

 

어떤 의미에서 그런 걱정은 새롭지 않다. 종말론적 근심은 인류 문화의 중심이었으니까. 그런 근심이 중심에 자리하긴 했지만, 항수(恒數)는 아니었다. 근심은 과학, 기술, 그리고 지정학적 정치의 급격한 변화에 반응하면서 멸종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인간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 넣는 경향이 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지나친 염세주의는 근심을 조용히 가라앉히기도 전에 일부 기간(期間)에 걸쳐 기승을 떨었다.

 

오늘날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실존적 도전은 마치 전례가 없었던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멸종의 공포는 이미 100년 전에 발생했고, 그와 유사한 공포가 지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1920년대는 역시 당시 일반 국민은-최근의 펜데믹, 대단히 파괴적인 세계 전쟁, 그리고 놀랄만한 기술진보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 일반 국민과 같이-속세의 번뇌에서 곧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던 기간이었다.

 

1920년대의 멸종공포를 이해하는 것은 격동의 2020년대와 우울한 기분이 만연했던 지난 10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그런 역사적 메아리를 듣는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에 근거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역사의 메아리로 하여금 오히려 우리의 문명을 위협하는 바로 그 진짜 불에서 나오는 오래된 기우(杞憂)의 연기(煙氣)를 날려버릴 수 있도록 우리를 돕게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역사의 메아리는 또한 종말론적 두려움이 ‘인간은 본래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위계질서를 따르는 존재이며 생존은 자원과의 제로섬 전쟁’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일련의 아이디어들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보수주의와 관련이 있다. 다만 기후 종말론을 좌익에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우익에 생존주의자적 이데올로기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좌익이든 우익이든 어느 쪽이든 역사의 메아리를 냉소적인 견해라며 우리의 종말을 과거의 결론으로 간주하라고 우리를 고무하고 있다.

 

멸종공포를 공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확신이다. ‘인류는 잘못되어 있고 구원을 넘어서 자기 손에 죽을 운명인, 지상에서 펼쳐지는 야외극의 비극적인 영웅이며 그런 영웅을 위해서 오로지 마지막 한 막(幕)이 남았다,’고 하는 확신 말이다.

 

물론, 그런 반어법은 이 냉소주의이며-그리고 차꼬가 풀린 바로 냉소주의의 하녀인 개인주의는 재앙으로 가는 차의 바퀴에 기름을 치는 격이다. 결국, 여러분은 자기-파괴가 인류의 하드웨어에 내장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일진데 변화와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을 왜 귀찮아하느냐? ”고 묻고 싶다.

 

앞서 있었던 멸종의 공포를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의심할 만한 이러한 염세주의가 과연 생산적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이어서)

 

윤영무 본부장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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