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협과 민주적 거버넌스 부족
4 .19혁명은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정부의 독재정치에 저항해 일어난 것인데, 이를 정치문화와 거버넌스라는 관점에서 근본적인 원인의 일단을 찾아볼 수 있다. 즉 타협과 양보를 할 줄 모르는 정치문화와 국가의 비전과 정책 어젠다를 설정하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과 야당을 설득하고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정치 리더십 및 행정 거버넌스 능력이 부족하게 되어서 정치 파탄의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단독 선거로 수립되자마자 정국을 주도했던 이승만과 한민당이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놓고 첨예하게 맞섰다. 당시 제헌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새로 나라를 세우는 정부 시스템으로서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는 대통령 중심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민당 지도부는 대통령제를 독재로 흐를 위험이 있다며 내각제를 선호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제로 바꾸지 않으면 정치 일선에 물러나겠다고 하자 한민당은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여 마침내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헌 헌법이 1948년 7월 17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 헌법에 따라 국회 본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통령이 선출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잡고 난 뒤 한민당이 간절히 원했던 내각 참여는커녕 한민당을 배제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다고 여긴 한민당은 정부와 대결적인 각을 세우게 된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한민당을 좀 포용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하여 우익 정치세력만이라도 대동단결하여 정쟁을 완화하고 국가 발전을 위한 정책 입안과 추진에 힘을 모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정당이라는 비판을 받는 한민당을 포용하기 어려운 배경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후 한민당의 당세는 소속 의원들의 탈당과 국회 요직 선거에서 잇단 패배,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농지개혁 과정에서 보인 어정쩡한 태도 등으로 인해 위축되고 있었다. 한 민당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견제 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에 따라, 신익희의 대한국민당과 지청천의 대동청 년당과 연합해 1949년 2월 민국당을 창당했다.
민국당은 출범 후 즉각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제헌헌법 제정 1년도 안 된 시기에 제출된 개헌안은 시기상조론과 명분론에 막혀 부결됐다. 이승만 대통령과 야당이 연속적인 격돌을 빚고 있는 가운데 어느덧 1952년 대통령 선거를 헌법 규정에 따라 국회에서 간선을 뽑는 시기가 다가왔다. 대통령 재선을 바라는 이승만 대통령이 무리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때도 한민당과 다른 정당 세력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거나 새로운 정당을 좀 더 일찍 창당했더라면 한국의 민주주의 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야당은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당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재선을 위해서 자유당 창당을 추진하게 된다. 자유당은 원내 의원들과 원외 인사 중심으로 각각 따로 결성됐다. 정부와 자유당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민국당 등 야당들이 제안한 내각제 개헌안을 절충해 사실상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발췌 개헌안을 연행과 감금 등의 물리력을 동원해 통과시켰다.
원내와 원외로 나누어져 있던 자유당은 1953년 10월 통합돼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여당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자유당은 1954년 9월 압도적인 국회 의석수에 의지하여 현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 규정 적용을 배제한다는 개헌안을 제출해 개헌정 족수 1표가 모자라 부결 선포됐으나, 이틀 뒤 4사5입 논리를 들어 부결 선포가 잘못됐다고 번복했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자유당 독주,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무리한 행보에 대해 언제쯤부터 민심 이반이 시작됐을까. 아마도 재선까지는 아직 전쟁 와중이었기 때문에 아니었을 것 같고, 1954년 11월 29일 4사5입 개헌 통과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사5입 개헌으로 위기를 느낀 민국당 등 야당들은 통합에 나선다. 야당 통합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자유당이 의원 정족수의 과반수가 넘는 114석 을 차지한 데 반해, 제1야당인 민국당은 15석에 그쳤고 무소속 67명, 나머지 군소정당·단체들이 차지한 데 있다. 자유당 독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던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혁신계 정당을 제외한 야당 세력은 1955년 9월 15일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됐다. 민주당도 내 각책임제 개헌을 주요 정책으로 표방했다. 1956년 5월 15일 3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당은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지명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진보당 추진위는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꼽혔던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고, 부통령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 이어서 http://www.m-economynews.com/news/article.html?no=44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