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장을 무대로 삼은 수출정신

  • 등록 2024.11.23 18: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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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43)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그 시대의 수출 정신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보고 함께 했던 인물은 오원철 제2경제수석이었다. 오원철은 서울공대 화학공학과를 졸 업하고 공군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시발자동차 공장장 등 우리나라 초기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다가 5.16 후 국가재 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으로 참여했다.

 

오 원철은 상공부 과장 때 박 대통령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것을 계기로 대통령의 경제개발 노력과 수출에의 집념을 체험하게 된다.

 

 

오원철은 상공부맨으로 상공부 공업 제1국장, 광공전 차관보, 대통령 경제 제2수석 비서관, 중화학 공업 기획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박 대통령을 보좌하며 18년간 일했다. 수출 정신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세대들에겐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적어도 1960년대와 70년대는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경제 관료가 기업가들, 공돌이, 공순이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하나가 돼 ‘수출’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는 자원도 기술도 없는 현실을 절감해야 했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있는 거라곤 단순 노동력밖에 없었다. 수출하려면 원자재를 수입해야 했는데, 원자재를 수입할 달러가 없었다.

 

오원철 경제2수석의 저서에 따르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2차 연도인 1963년의 외환보유고는 1억 540만 달러, 이 중에서 달러는 9,329만 달러에 불과했다. 달러가 없어서 정부는 5개년 계획을 축소해야 했다. 이 당시에 한국을 믿고 돈을 빌려줄 나라도 국제금융기관도 없었던 것이 다. 당시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국가에게 차관을 줄 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일본은 국교가 없는 나라에게 차관협 정을 맺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오 수석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1965년에 맺게 되는데, 이때 대일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 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했다. 이 자금은 한국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됐다. 박 대통령은 차관을 얻기 위해 라인강의 경제 기적을 이뤘고,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서독을 방문했다.

 

서독의 에르하르트 정부는 분단 한국을 동정하여 1,350만 달러의 재정차관과 2,625만 달러의 상업차관 을 공여하기로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큰 도움이 됐다고 오 수석은 밝혔다. 오 수석은 서독 방문 때 박충훈 상공부 장관을 수행했다. 1964년 5월 박 대통령은 값싼 인력을 활용한 수출 경쟁력을 위한 목적으로 환율을 1달러당 130원을 약 2배인 255원으로 인상했다.

 

우리나라의 경쟁국인 대만과 태국, 필리핀보다 더 저렴해진 노임으로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되자, 수출제일주의와 공업 입국을 국가 최고 경제전략으로 삼고 전심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고 오 수석은 말했다. 1965년 수출 목표 1억 달러를 초과 달성하였고, 1970년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연평균 40%씩 초고속 성장을 질주한 대기록이었다.

 

다음은 오원철 당시 상공부 국장의 회고다.

 

“1964년 12월 31일 저녁 10시경, 드디어 1억 2000만 달러의 수출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각하! 수출 대전 1억 2000만 달러가 입금됐습니다. 이로써 금년도의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고 올립니다.’ 대통령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는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날을 기념하여 그날을 수출의 날로 지정해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1964년 6월 30일 오원철 상공부 공업1국장이 수출을 지원하고 독려하려는 조치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수출에 대한 기업들의 애로 사항이 있으면 공무원이 솔선해서 시정해 준다. 필요하다면 법을 개정하기도 하고, 새로운 행정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예컨대, 기능자가 필요하다면 국가 예산으로 양성해 준다. 수출업체에게 시중금리보다 싼 이자로 융자해 준다. 외자 도입도 우선적으로 해준다. 수출 공단을 조성해서 장기 상환 조건으로 저리로 융자를 해서 매각한다. 공업국 직원에게 수출 상품마다 수출공장마다 담당관을 지명했다. 업종별로 수출업체별로 작성해서 밀고 나간다.”

 

오원철 공업1국장은 섬유과장에서 봉제품 수출 7개년 계획을 작성하도록 했다. 1963년 봉제품 수출액은 8만6000 달러였다. 7개년 계획의 마지막 연도인 1971년의 수출 목표는 5천만 달러로 설정했다. 1963년 8만여 달러밖에 수출하지 못했던 것이 1965년 2년 만에 1,152만 달러어치를 수출했고, 1968년에 5,118만 달러로, 3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대통령과 담당 공무원, 기업가, 노동자들이 합심 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었다. 봉제품 수출과 같은 일이 다른 품목에서 일어났고, 공업 수출 품목은 점 점 늘어났다. 1965년부터 대통령 주재 수출 확대 회의를 매월 갖고 수출 동원 체제를 더욱 확고히 다져나가게 된다. 수출 확대 회의에는 정부와 기업체, 사계의 권위자도 참석해 참석인원은 100명 정도였다. 회의는 보고, 토론을 거쳐 합의를 도 출하는 방식이었으며 모두 공개됐다.

 

오원철 수석은 수출 확대 회의의 내용은 비밀이 없었으므로 정치계도 이해하고 학계도, 언론계도 국민도 이해하게 되고 동질화됨으로써 힘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1969년의 수출 목표는 7억 달러였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 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고 후임에 이낙선 장관이 10월 21일에 부임했다. 1969년은 4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목표 달성이 아슬아슬했다. 대만으로 수출하기도 한 소형 선박 20척이 연말까지 인도되고 대금 614만 달러가 입금 되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공사의 파업 여파 등 의 곡절이 있었으나 무사히 연말에 선박을 대만측에 건네고 대금 인수증을 받았다.

 

인수증을 받은 날은 12월 31일, 하필이면 그날 눈이 많이 내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항공편이 결항됐다. 인수증을 가진 직원은 비상등을 켜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와 오후 3시에 한국은행에 입금했다. 한국은행은 마감시간도 늦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상공부 조선과장의 회고를 오 수석은 전했다.

 

“당시 상공부에서는 이낙선 장관 이하 모든 직원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은행으로부터 ‘입금 완료’라는 통보가 왔다. 모두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이 장관은 즉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는데, 박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치하를 들었는지, 이 장관이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것이 안경 너머로 보였다.”

 

이낙선 장관은 1970년 수출 목표를 10억 달러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한국 무역협회, 서울대 무역연구소 등은 목표 달성이 비관적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각 수출업 체가 내놓은 수출 계획의 합계액도 8억5000만 달러였다. 박 대통령은 수출 10억 달러는 우리의 수출 역사상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분발을 촉구했다고 오 수석은 전했다.

 

결과는 10억 380만 달러였다. 1967년 3억 달러 달성에서 10억 달러 달성에 이르는 데는 불과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60년대 수출 달성의 최전선은 여성 단순 기능공이 주로 담당했다. 하지만 여성 노동을 이용한 경공업 제품 수출로는 획기적 성장은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미국의 월남전 패배와 닉슨 독트린, 북한의 잦은 도발 때문에 방위산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반드시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야 했다. 고부가가치의 중화학공업 제품을 수출해야 100억 이상의 수출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오 수석은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과 100억 수출 목표 를 하나의 프레임을 묶어야 중복투자를 막고, 가동률을 높이며, 수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대통령의 재가 를 받아 실행에 옮겼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2월 12일 중화학공업 기획단을 출범시켰다. 박 대통령은 ‘전 산업을 수출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테크노크라트들은 공장을 건설할 때나 공업계획을 수립할 때에는 꼭 수출 가능성 여부를 따졌다.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공장 규모를 국제 규모 단위로 지어서 세계 일류로 키워나가도록 했다고 오 수석은 밝혔다.

 

여기서 전 산업을 수출화하는 전략은 최종 제품은 물론이고 중간 소재와 원료까지도 가격과 품질면에서 수출가능 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했다고 그는 전했다.

 

오 수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100억 달러 수출 목표 제시  1972년 5월 30일쯤이었다. 상공부가 작성한 당초 1980년 목표는 55억 달러였다. 이것이 갑자기 100억 달러 목표 로 바뀌게 됐다. 중화학공업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하자 제철,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공작기계, 전자 분야에서 수출이 큰폭을 늘어 나기 시작해 드디어 1977년 100억 달러의 위업을 달성했다.

 

1970년대는 남자 기능공이 산업의 역군으로서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1960년대와 70년대 수출 증가와 경제성장에서 늘 중심에 선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오원석 수석은 말했다.

 

“박 대통령은 무역 확대 회의와 월간 경제 동향 보고, 분기 별 심사분석, 초도 순시를 통해 현장에서 기업들의 애로를 사항을 보고 받으면 즉시 계획 수정과 보완, 지원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렇게 신속하고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쓰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었다”고 오 수석은 말했다.

 

◇과거의 수출 정신 계승하되 새로운 수출 정신 필요

 

과거의 수출 정신을 요약하면,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경제 관료들이 완벽에 가까운 사전 및 실시계획을 세우고, 기업가와 노동자들, 그리고 전 국민의 일치된 단결을 바탕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성공 포인트는 수출 목표 달성이라는 타깃을 향하여 비상한 집중력을 일관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점검 및 독려하고, 상황 변화에 맞춰 수정과 보완을 반복하는 유연한 운영력이다.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신은 ‘잘 살아보세’,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늘날의 수출 정신은 과거의 좋은 점은 계승하되, 세계 시장의 환경이 달라지고 우리 자신의 경제 위상과 역량 및 지정학적 위상이 높아진 만큼 인류 공동 번영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정신이 필요해 보인다. 즉 예전 수출 정신은 우리나라부터, 잘 살자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동맹은 물론이고, 우리의 후발 국가, 이웃 국가들과도 더불어 상생하는 수출 정신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1960-70년대와 그 이후 상당 기간, 미국 경제는 우리의 수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비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그럴 여유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중국도 수출 밀어내기가 막혀 공급과잉에 상당 기간 시달릴 전망이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수출해야 하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지,만 수출 전략과 정신의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내 지도를 놓고 수출 계획을 점검했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세계 지도를 펴놓고 수출을 점검하고 무역 상대국과 상생하며 인류 공동 번영 방안을 선보 일 차례다.

 

 

이상용 주필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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