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총리는 2015년 8월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순국열사 추모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사죄를 했다. 일본 내에서는 불편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양심 있는 정치인으로 더 알려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일평생 ‘우애’와 아시아의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에 대한 평전이 국내 음악 작가인 구자형 씨에 의해 출간돼 지난 10월 25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출판기념회에 초청된 하토야야 전 총리는 ‘세계 평화번영을 위한 우애’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가졌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우애란 자신의 존엄을 존중하는 동시에 타인의 존엄도 마찬가지로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타인의 지유도 존중하고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개성을 살리며 돕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우애는 사람과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국가간에도 성립되는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 우애의 이념에 기초하여 전쟁 없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을 주장했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아세안 10개국에 한중일 3개국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상을 밝혔다. 흔히 아시아는 EU와 같은 공동체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조화를 중시하면서 부화뇌동하지 않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 나라들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하토야마 전 총리는 강조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은 (과거에)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79년이 지난 지금도 진정한 화해를 달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일간에 우호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 일본측이 역사의 사실을 마주하고 침략과 식민 지배로 고통 받은 사람들과 국가에게 확실한 사죄와 배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구 식민지 사람들이 더 이상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책임을 계속 짊어지고 사죄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가 우애 사상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말해왔던 주장, 즉,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또 다시 강조했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하토야마의 우애 사상은 일본 내에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고 아시아 국가들과 국민들에게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시작할 때는 미약하나 고귀한 가치를 꾸준히 말과 행동을 일관되게 보여주면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내재돼 있는 선한 본성과 양심과 공감된다. 그런 공감이 어떤 계기를 만날 경우 갑자기 소용돌이치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이 그랬고, 인도의 간디 사상, 식민지 한국인들의 3.1운동 정신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하토야마의 우애 사상은 EU의 탄생을 꿈꾸며 “평화와 우애”를 설파한 오스트리아의 쿠텐호프 칼레르기 백작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쿠텐호프 칼레르기 백작은 유럽연합의 창설에 이바지한 오스트리아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 도쿄에서 일본주재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빈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시기에 평화적인 범 유럽기구를 건설하자는 운동을 펼쳤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7년 처칠 영국총리와 함께 유럽 회의를 개최했고 1952년 국제유럽운동의 명예총장을 지냈다. 유럽건설에 공헌한 인물을 기리는 카롤루스 대제상의 최초의 수상자가 된 바 있는 칼레르기 백자는 1972년 타계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의 할아버지인 하토야마 이치로도 총리를 지냈는데, 그가 칼레르기의 우애 사상에 크게 공감해 일평생 우애를 정치 신념으로 삼았다. ‘우애’ 사상은 하토야마의 집안의 신념인 셈이다.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는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키고 소련에 억류돼 있는 일본인들을 귀환시켰다. 이치로 총리는 일본인들은 귀환시켰지만 일본 식민지 당국에 끌려갔던 한국인 포로들과 노동자들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전한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번 평전 인터뷰에서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고, 최상의 태도이고, 최고의 결과입니다. 주로 가까운 나라와의 경쟁이 분쟁이 되고, 전쟁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이웃나라의 좋은 것들을 빼앗으려는 원시적 야욕, 노예처럼 부리고 싶은 비도덕적, 비인간적, 비윤리적 욕망 때문입니다. 전쟁 대신 대화는 철칙입니다. 그래서 우애의 정신, 우애의 운동이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애 사상으로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군사력이 약한 나라가 우애와 평화를 이야기한다고 전체주의 독재국가인 이웃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증명됐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원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소박하면서도 최소한의 소망을 짓밟았다.
북한의 김정은은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핵 개발에만 온힘을 쏟으며 한국과 일본,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급기야는 우크라이나 전선에 파병까지 했다. 이들에게 과연 우애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대화하는 게 평화를 가져오는 길일까. 만약 그렇게 순진하게 믿는다면 우크라이나처럼 침략을 당할지도 모른다.
전체주의 독재국가들을 상대하려면 첫째, 자주국방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한미동맹이 심하게 요동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스스로 고립주의를 선택하면 동맹 약화는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트럼프의 당선은 닉스 독트린의 재현과 같은 현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국은 이를 대비해 일본과 나토와의 관계를 군사동맹 수준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으며 제3세계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군사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트럼프의 당선은 글로벌 영향력 면에서 미국의 쇠퇴가 본격화되면서 다극화 체제가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로 전체주의 국가들의 국민들이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를 깨닫도록 돕고, 나아가 그들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장기적 게임을 전개한다. 전체주의 체제의 변화는 자국민이 선택해야 변할 수 있다. 외부에 의한 과도한 간섭이나 강요는 오히려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셋째, 현재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자본주의는 전체주의 체제보다 우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각 나라마다 모순의 성격과 양태도 다르다. 자유민주주의 세계는 스스로 개혁하고 혁신을 마다하지 않는 유연성을 보여줌으로써 우월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로 하토야마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힘 받을 수 있어
트럼프의 재선으로 미국 외교가 고립주의로 선회하면 한미동행과 미일동맹, 나토 모두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내부의 국방외교 분야의 전문가들이 트럼프의 '돈키호테'적 행동을 저지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당장 일본과 한국은 북한 위협을 받고 중국과 경쟁하는 공동의 입장에 처하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제2차 대전 패전 후에 아세안에 많은 공을 들이고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은 유럽과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섬으로써 사이가 멀어져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틈을 타고 인도경제에 투자가 몰리며 급부상하는 것도 중국 경제에게는 악재다.
아세안 10개국들도 미묘한 입장차는 있겠지만 미-중 대결 속에서 어느 한쪽에 서기보다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일본내 전문가들은 하토야먀 당시 총리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때부터 중국의 G2 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주도권 회복을 노린 의도가 깔려 있다고 봤다.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상은 중국의 부상에 대한 대응 성격으로 제안됐지만 지금은 중국경제의 위축, 미국의 고립주의 경향으로 인해 오히려 호기를 맞고 있는 모양새다.
중국도 심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 예전 같지 않은 경제성장률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인도와의 국경 갈등을 일단 봉합했다. 한국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 모습이다. 북한 파병에 대해 중국의 입장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 증국이 북한 파병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순간, 유럽과의 사이는 더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트럼프가 재선돼 중국과의 무역 마찰이 격화되고 동시에 한국과 대만, 일본에 대해서도 바이든 정부시절의 보조금을 폐지하고 무역적자 해소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에 대해서도 트럼프가 악수를 둘 개연성이 충분하다. 트럼프의 고립주의는 결코 미국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경제는 AI와 같은 첨단기술만 발달돼 있을 뿐 제조업은 허약하다. 경제란 첨단기술 우수하고 금융이 발달돼 있다고 돌아가는 게 아니다. 각 부문이 모두 잘 돌아가야 한다. 미국경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보잉사 노동자들이 35%의 임금 인상합의안을 부결시켰다. 지난 3분기 적자가 62억 달러라고 하는데, 노동자 평균연봉이 1억원이 넘는다. 미국 항공제조업의 낙조가 보이는 것 같다. 미국 연준의 금리 조작은 ‘횡포’에 가깝다. 고립주의는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 게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 아세안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근접한 상설 모임을 결성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우리가 하토야마 전 총리의 우애 사상과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가벼이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