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기술패권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기술유출 범죄도 고도화되고 있다. 이에 주요 선진국들은 경제안보에서 첨단산업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술 유출 방지와 처벌 관련 법안들을 속속 만들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는 기술유출 관련 규정이나 법안은 있지만 실질적인 처벌이 약해 기술유출 범죄 위험과 피해가 지속되고 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산업기술 해외유출 사건은 지난 5년간 총 96건이 적발됐고, 피해액은 23조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법원에서 2013~2022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1심 판결을 내린 141건 중 실형이 선고된 건 14건에 불과하고, 2022년 영업비밀침해행위는 28건 중 23건에 집행유예가 선고돼 재판부가 기술유출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규정이 추가되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산적한 문제가 많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 점점 더 다양화, 고도화되는 기술유출 범죄
기술유출 범죄는 갈수록 고도화·전문화되고 있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우리 기업의 기술을 빼가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어 관련 법령을 손봐야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많다. 과거에는 개인이 기업 기술자료를 빼돌려 해외 업체에 유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그 수법이 다양해지고 대담해지고 있다.
사례1) 헤드헌팅업체 설립해 인력 유출
지난 2018년 삼성전자 기술팀 부장이었던 김씨는 고용노동부에 '국외 유료직업소개사업'을 등록하지 않고 국내 반도체 전문인력을 중국 업체 '청두가오전'에 이직을 알선하는 식으로 인력을 유출했다. 김씨는 국내에 컨설팅업체를 설립,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국내 반도체 핵심 인력들에 접근해 고액 연봉과 주거비, 교통비 지원을 제안하며 상당수를 청두가오전에 이직 알선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헤드헌터비로 상당한 대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를 통해 유출된 기술은 국가핵심기술인 삼성전자 반도체 20나노급 D램 공정 자료로 4조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측정됐다.
사례2) 국내에 R&D 센터 차려 안방에서 기술유출
에스볼트 중국 본사는 국내에 에스볼트코리아를 설립하고 2020년 6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산학관에 연구소 겸 사무실을 차려 주요 전기차에 들어가는 삼성SDI·SK온 배터리 관련 전현직 임직원 5명을 통해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올해 초 검찰에 넘겨졌다. 에스볼트코리아는 설립 전 후 각종 배터리 업계 주관 협회에 참석해 A씨 등 핵심 기술을 다루는 국내 대기업의 'K-배터리' 연구원에게 접근했다. 기존 연봉의 최소 2배 인상, 막대한 보너스와 국내 근무 등 혜택을 제시하며 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을 통한 기술유출에 그쳤던 방법이 이제는 인력유출을 위해 헤드헌팅 회사를 차리고, 나아가 국내에 버젖이 R&D센터나 관련 회사를 만들어 국가핵심기술을 빼돌리는 대담한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를 강력히 처벌할 규정이 미비해 기술유출을 방지할 확실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산업스파이, 간첩죄로 엄히 다스려야...
그렇다면 다른 선진국들은 기술유출을 어떻게 막고 있을까. 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은 이미 간첩 행위에 대해 강력한 처벌 법규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연방법(U.S. Code) 제793조 등과 경제스파이법(EEA), 영업비밀보호법(DTSA)을 제정해 산업 기밀 유출 행위도 사실상 간첩죄로 간주해 엄히 처벌하고 있다. 일본도 2012년 ‘특별비밀보호법’을 제정해 간첩 행위에 대해 ‘적국’과 ‘외국’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한다.
독일 또한 형법 제94조를 통해 ‘타국’에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기밀을 권한 없는 자에게 전달하거나 공표하는 행위를, 중국은 형법 제11조에 간첩죄 조항을 포함해 2021년부터는 ‘반(反)간첩법’을 시행해 간첩행위뿐만 아니라 ‘국가를 배신하도록 선동·유혹·매수’하는 행위까지도 처벌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형법 제98조에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에 대해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적국’의 범위가 북한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북한 이외의 국가나 단체를 위한 간첩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허점이 있다.
최근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이 법사위에서 통과됐지만, 지난 3일 더불어민주당이 돌연 입장을 바꿔 ‘간첩죄’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은 외국으로의 확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악용될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어 검토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H 기관의 전문가는 "각국이 산업 스파이라는 개념으로 경제안보법을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핵심 기술뿐 아니라 외국인 투자, 연구자산, 데이터, 인적 자원 및 활동까지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술유출 규제가 한참 뒤처져 있는데 국가 존망이 달린 문제에 국가산업기밀 보호 정책이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한다"고 우려했다.
◇ 무형기술, 가치평가 안 돼 무죄율 높아... 전문기술평가기관 필요
미약한 처벌이 기술 유출의 주요 원인이라는 비판이 가해지는 가운데 국회와 관련 기관들의 기술 유출 처벌 규정이 추가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국가핵심기술 유출 시 벌금을 15억원 이하에서 최대 65억원으로 올린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국방부도 3일 방산기술 국외 유출에 대한 처벌을 기존 ‘20년 이하 징역 또는 20억원 이하 벌금’에서 ‘1년 이상 유기징역과 20억원 이하의 벌금을 병과’할 수 있도록 바꿔 징역 상한선을 없애고 징역과 벌금을 모두 부과할 수 있도록 ‘방위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공포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지난 3월 양형기준을 새롭게 공표해 국가핵심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는 경우 최대 징역 18년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처벌과 양형 기준이 높아져도 기업기술에 대한 경제적·기술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으면 처벌의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세종에서 기술유출 사건을 전문으로 맡고 있는 정창원 변호사는 "이것이 실재 재판에서 기술유출 피의자의 무죄판결을 높이는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정 변호사는 “형사재판은 피의자의 신체적 금전적 실형을 선고하기 때문에 입증의 정도가 높다. 그런데 기술유출은 눈에 보이는 물품 외에 물품 안에 들어간 일부 기술의 가치 산정이 어렵고, 반도체의 경우 양산기술이 반도체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기술인데 이런 무형 기술에 대한 가치 평가를 검찰이나 재판부에서 하는 게 어렵다. 그러다 보니 보수적인 판결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M이코노미뉴스와의 통화에서 무형의 기술과 SW 등에 대한 가치평가를 위한 전문기관 설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무형 기술에 대한 가치 판단뿐만 아니라 기술 SW 등에 대한 평가 기준도 부재한 상태다. 부동산의 경우 한국부동산원 등이 전문적 평가를 하고 있는데 기술에 대해서는 감정평가사나 변리사 등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기술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제품, 기술, SW, 노하우, 영업비밀 등에 기대이익과 가치평가를 위한 별도의 전문기관 설립 및 운영이 필요하고, 법원과 검찰 모두 기술평가기관의 평가를 민사적 손해와 형사적 처벌의 입증자료로 인정하면 된다”며 “검찰의 경우 이공계 출신의 로스쿨 변호사 등을 임용하고, 첨단범죄 수사부 등을 통해 보강된 수사체계를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법원도 이공계 출신의 로스쿨 변호사 등을 임용해 기술유출을 전담하는 재판부 신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강력한 몰수·추징필요... 기술자엔 획기적 지원 정책 펼쳐야
이와 더불어 정창원 변호사는 기술유출 피의자가 얻는 이익보다 더 높은 벌금 및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면 기술유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 변호사는 “물건의 일부에 핵심기술이 쓰인 경우 현재 법에는 그 부분 만큼만 몰수가 가능하다. 그런데 실제로 전체 물건 중 기술이 얼마만큼 쓰였냐 여부를 판단하는 게 너무 어렵다”면서 “명품 상표를 도용한 물건 적발 시 물건을 통째로 압수하는 것처럼 영업기밀이 유출돼 만들어진 분리 불가능한 전체적인 물건을 몰수하거나 추징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면 실질적으로 몰수 추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법에 대해 그는 “이게 실제 자유형보다 훨씬 무서운 거다. 실형의 경우 2,3년 살다 나오면 되는데 몰수추징의 경우 갑자기 회사가 통째로 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이니까 기술유출 예방에 훨씬 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배 인하대 교수는 기술유출 방지 해결책에 대해 “외국기업의 국내 R&D 센터 설치 등에 대한 국가안보 및 심사요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주요국과 같이 국내와 외국계 사모펀드를 이용한 기술 유출 가능성 등에 대비하기 위해 외국투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고 이를 위한 국가안보 심사를 법률로 제정해야한다”고 말했다.
인력유출 방지를 위해서는 “첨단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임직원을 특정하여 파격적인 대우로 종신 고용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퇴직한 임직원들의 노하우를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동시에 양자와 인공지능 등 최고의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최첨단 기술 인력의 해외 전직을 막고, 최고급 해외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세금과 주거, 교육과 복지, 연구 환경과 자금 등에 획기적인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