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질서와 정의 무너져, 정치 철학자 ’존 롤스‘에게 배운다 독자 여러분,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어수선한 시국이라도 이는 더 좋 은 나라가 되기 위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일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써는 대통령 조기 선거를 치러야 할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나, 국민은 어느 쪽이 든 우리나라 정치 엘리트들이 각자의 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분명히 표명해서 광범 위한 대다수 국민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계속돼 온 빈부의 양극화와 극단적인 진영 갈등으로 인해 진실을 담은 말의 질서가 무너졌고 올바른 도리-정의(正義)는 나뭇가지처럼 갈라져 서로의 말과 정의에 대한 믿음 자체 가 약해진 암울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말과 정의가 무너진 우리나라의 긍정적 비전에 대한 영감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 을까요? 20세기 대단히 탁월한 미국의 정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연구 결과에서 찾아보면 괜찮을 듯합니다. 2002년 81세로 사망한 그의 철학은 이기심과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호혜(互惠)와 협력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1971년에 출간한 ‘정의론’이란 자신의 논문에서 그는 자유주 의 사회에 대한 인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 가운데 가 장 유명한 사고(思考)는 ‘무지의 베일’입니다.
‘무지의 베일’은 이를테면 5명의 친구가 피자 한 판을 가장 공평하게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됩니다. 여러 명이 피자를 가장 공정하게 나누게 하는 ‘무지의 베일’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피자를 맨 먼저 자른 사람이 맨 나중에 먹게 하는 순서를 따르면 가장 공평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만약 공정한 사회를 마음에 두고
있는 정치인(정당인)이라면, 그는 자신의 지위, 인종, 출신 지역, 종교 혹은 경제적 지위 따위를 전혀 모르고 있어야 만-‘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어야만-가장 공정한 사회를 조 직하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의 출신 지역이 경기도라면 아무래도 경기도 에 유리한 정책을 만들 것이고, 아버지가 빌 게이츠와 같 은 억만장자라면 누진세를 피하려고 할 것이니, ‘무지의 베 일’을 쓰지 않은 사람은 공정한 사회를 위한 정책 아이디 어를 낼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무지의 베일‘은 예로 든 피자의 어느 조각이 내게로 올 것 인지 모를 때만 피자를 보다 공정하게 자르게 될 것이라는 직관적인 아이디어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대접을 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대접하라-”는 고전적 황금률(Golden Rule)의 정치적 버전으로 볼 수 있 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면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대접하라 황금률은 기원전부터 인류의 수많은 문화, 종교에서 보편 적으로 발견되는 원칙입니다. 지금까지도-개인적인 차이 가 있지만- 널리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존 롤스는 그런 의 미에서 우리가 사회의 핵심인 정치와 경제 제도, 즉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두 가 지의 지도원칙(guiding principles)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시민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하고-이를테면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기본 적인 자유를 누려야 하고 평등한 지위를 누리며 정치에 참 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등의 원칙‘입니다. 둘째는 우리 는 평등한 기회와 널리 공유되는 번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경제를 조직해야 하며, 가장 못사는 계층의 삶을 바라볼 때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불평등을 인정 하고 그들에게도 똑같이 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차별의 원칙입니다.
평등한 가운데 차별을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고고(孤高) 한 생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실제로 관념적이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사회주의 자 등 이데올로기에 관련 없이 그의 말을 인용하며, 심지 어 자신들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 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그의 생각을 선뜻 받아들여 당장 실천에 옮기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 1943 년~. 미국의 경제학자. 2001년 '비대칭 정보화의 시장에 대 한 분석'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와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1971년~ ‘부’ 소득과 불평등에 대해서 연구하는 프 랑스의 경제학자,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의 101년 역사상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수가 팔린 《21세기 자본, 2014년》) 의 저자) 등 많은 진보성향의 경제학자들이 존 롤스로부 터 영감을 얻으려고 하면서 상황은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롤스는 이상주의자이면서도 현실주의자로 자신의 원칙에 따라 조직된 사회는 공정할 뿐만 아니라 안정적일 것이라 고 주장했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원망의 정치가 생기는 이유 그는 경제적 성공이 개인의 가치와 동일시되는 현대 미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심하게 불평등한 사회에 서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자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원망(怨望, 못마땅하게 여겨 탓하거나 분하게 여겨 미워함)의 정치가 행해질 것이라는 놀랍도록 예지력 있는 경고를 1971년 자신의 저서에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순히 물질적 평등을 더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롤스의 생각은 미국 민주당 뿐만 아니라 주요 선진국의 주류 진보당인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 독일의 사회민주당, 호주의 노동당 등은 채택해 보지도 않았고 시행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80년대 들어 발흥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와 고삐 풀린 무한 시장 경제의 철학을 수용하면서 노동 계층의 대부분을 소외시켰습니다.
그러자, 소외된 노동 계층은 신자유주의를 경멸하고 동시에 기술적 실용주의를 조화시켜 우파 포퓰리즘에 맞섰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당은 어땠나요? 서로 정치적 이득을 위해 싸우느라 국민을 위한 일을 제대로 한 게 거의 없습니다. 롤스의 주장처럼 포용적이고 관대한, 그리고 활기찬 민주주의, 기회 균등, 공정한 결과를 위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지금 그러한 사회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솔직하게 말하고 앞으로 정치인들이 책임지고 실천해 나갔더라면 국민의 지지가 대단했을 겁니다.
일부 사람들은 롤스가 경제 성장을 극대화하고 복지 지급을 통해 ‘패배자’에게 보상한다는 데 익숙한 재분배 정치 를 옹호했다고 하는데 이는 진짜 오해입니다. 좋은 일자리, 공정한 부의 분배, 직장 민주주의 그는 우리가 지금 사전 분배(pre-distribution, 세금과 혜택을 통해 소득 불평등을 사후에 해결하기보다는 소득 불평 등이 발생하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예일 대학의 교수인 Jacob Hacker가 그의 논문 "중산층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초"에서 만들었습니다.
사전 분배는 법적 규칙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최저임 금법, 단체 교섭법, 독점 금지법, 지적 재산권, 주택 품질 기 준 등이 있다)라고 부르는 생각의 첫 번째 챔피언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좋은 일자리, 공정한 부의 분배, 직장에서 더 큰 민주주의를 촉진함으로써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제적 의제에 대해 천착했습니다.
물론 그의 생각과 비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비평가들로부터 경제적 자유를 방해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비전은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동적인 시장 경제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과 비전의 목표는 경제를 통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돌아가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저성장 시대의 공영으로 가는 화해와 갱신의 정신 이처럼 존 롤스의 생각에서 정치인들이나 정당인들은 최고의 자유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둔 큰 그림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정변(政變)이 어떻게 끝나든, 저 성장 시대로 접어든 우리나라 경제는 앞으로 빈부, 진영 간 화해(和解)와 갱신(更新)의 정신이 복원되지 않으면 나라의 정의(正義)는 사라지고 국민은 여러 동강으로 분열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국민의 믿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정치인들이 바뀌어야 하고, 국민은 진영 간에 화해하고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회복시켜야 합 니다.
2025년, 그러한 혁신이 시작되는 해가 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