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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피터 루거(Peter Luger) 스테이크하우스 등에서 수십 년간 웨이터로 일한 후, 2004년 뉴욕 맨해튼에 자신의 식당인 「볼프강 스테이크하우스」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걸쳐 35개 레스토랑의 제국을 만든 볼프강 츠비너(Wolfgan zwiener 1939~2024)씨가 지난달 85세로 사망했다.
1960년 독일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뒤 그는 브루클린의 피터 루거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스테이크 접시를 수만 번 오크 테이블에 실어 나르면서 익힌 스테이크하우스 경영방식을 파크 애비뉴(Park Avenue)에서부터 태평양 건너 일본, 한국, 필리핀 등지에서 모두 35개의 스테이크하우스를 오픈했다.
그의 아들 피터 츠비너는 아버지의 사망 원인이 폐암이라고 말했다. 츠비니가 피터 루거 스테이크하우스 등에서 웨이터로 일한 기간은 거의 39년, 그동안 그는 일주일에 6일을 서서 일했다. 일요일과 휴가에는 해변에서 자는 것을 좋아해 은퇴 후에 그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자외선 차단제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들인 피터 츠비너(Peter Zwiener)와 그의 형 스티븐(Steven)은 생각이 달랐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의논 끝에 이전에 밴더빌트 호텔(Vanderbilt Hotel ) 지하에 있는 짙은 파란색 타일 천장을 가진 공간에 아버지로 하여금 볼프강 스테이크하우스(Wolfgang's Steakhouse)를 열도록 조언했다.
고급 비프스테이크, 독일 감자, 쉬락(schlag; 거품을 낸 크림의 독일어. 과일, 디저트, 커피 등에 크림을 얹는 것)을 얹은 사과 스트루들(strudel, 자른 사과를 밀가루 반죽에 얇게 싸서 오븐에 구운 것)과 피터 루거 스테이크하우스의 몇 가지 특선 요리를 냈다. 그는, 나중에 사업파트너가 된 두 아들과 함께 여전히 테이블 시중을 들었다.
식당 소유주로서, 츠비너 씨는 검은색 나비넥타이와 면(綿)으로 된 앞치마를 벗고 정장, 실크 포켓 스퀘어(양복 주머니 따위에 장식용으로 꽂는 손수건), 광택이 나는 가죽 신발로 바꿨다. 이발소 빗의 이빨처럼 윗입술 위로 곧고 고르게 다듬어진 깔끔한 콧수염이 하얗게 변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모습은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과 해외에서 볼프강의 육류 대부분을 공급하는 브롱크스(Bronx) 소재의 마스터 퍼베이올스(Master Purveyors) 부사장인 마크 솔라즈는 "그는 멋지고 당당했으며 상대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지녔다"면서 "그는 영화에 나오는 배우를 떠올리게 했지만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2004년, 츠비너 씨가 첫 번째 볼프강 스테이크하우스를 열었을 때, 피터 루거의 소유주 중 한 사람은 “그는 그저 웨이터였을 뿐”이었다면서 그의 성공 가능성을 그다지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웨이터는 그를 울피(Wolfie)라고 부르며, 항상 자기 자리에 앉아서 손님들이 스테이크를 어떻게 좋아하는지 기억해 줄 사람은 그 사람뿐이라고 알고 있는, 실로 엄청난 숫자의 고객들로부터 충성심을 얻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맨해튼으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택시를 타고 그가 있던 옛 식당으로 가는 것 보다 그가 새로 연 식당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츠비너 씨는 뭔가 뒤죽박죽이 되기 쉬운 식당 안에서 뭔가를 찾아내 수치화하는 관찰력만큼은 비상했다. 그는 숙성된 일급 쇠고기가 도착하기 2분 전, 모든 식탁에 뜨거운 접시를 차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제한을 초과하면 그는 서빙 직원을 돌려보내 새로운 접시를 가져오게 했다. 접시는 더 뜨거워야 했다. 그래서 버터와 육즙이 식당 손님의 코 밑에서 튀고 연기가 날 정도가 되어야 했다. 그것은 피터 루거에게서 빌려온 어찌 보면 과장된 서빙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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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지글 익지 않는 스테이크는 "DOA-도착 시 사망"으로 간주했다. 그것도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2008년 볼프강 스테이크하우스가 베벌리힐스에 문을 연 지 몇 주 후, 오스트리아 태생의 셰프인 볼프강 퍼크(Wolfgang Puck)은 츠비너 씨를 상표권 침해, 불공정 경쟁 및 기타 여러 가지 혐의에 대해 연방 법원에 고소했다.
도시에서 가장 큰 식당이 (자기 이름을 딴) 볼프강이라는 것에 익숙해 있던 퍼크 씨는 이 침입자의 테이블 앞에 앉은 손님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수상 경력이 있는 셰프"의 요리를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지나가다 들르는 식당처럼 '보행자용' 음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츠비너 씨는 역소송을 제기했다. 양측은 4년 전에 츠비너 씨가 뉴욕시 외의 모든 장소에서 베벌리힐스의 문에 적힌 「볼프강 츠비너의 볼프강 스테이크하우스」라는 간판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판사가 퍼크 씨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결국 이 사건은 법정 밖에서 해결되었다.
그 무렵, 볼프강 스테이크하우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현재 맨해튼에는 스테이크하우스가 5곳, 뉴저지에 1곳, 하와이에 2곳, 키프로스에 한곳, 중국, 일본, 한국, 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 20곳 이상이 있다. 올해 말에는 대부분 아시아 국가에 15곳이 더 생길 예정이다.
볼프강 아우구스트 프리츠 츠비너는 1939년 6월 17일, 현재 폴란드에 있는 스파 타운인 바트 잘츠브룬에서 폴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스 샤를로테 츠비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주 남짓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츠비너 씨는 전쟁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군인인 아버지가 지뢰가 터져 죽었다고, 집이 없어졌다고, 식량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만약 그가 1942년 노보시엘체 마을에서 죽은 아버지를 만났더라도 그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부모님이 한때 실레시아에서 운영했던 레스토랑과 숙박 시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10대 초반에 독일 브레멘의 무역 학교의 호텔 경영 프로그램에 등록하여 2년간 견습 과정을 거쳐 부모님의 길을 따라갔다고 했다. 졸업 후 그는 북독일 로이드 노선의 크루즈 선박에서 웨이터로 채용되어 2년간 전 세계를 돌았다.
독일로 돌아와서는 기회가 희박했다. 1960년 맨해튼에서 엘리베이터 회사를 소유한 삼촌이 그에게 일자리와 이민 후원을 제안한 후, 그는 바다 여객선 베를린을 타고 미국으로 항해했다. 그는 곧 페루 리마에서 뉴욕으로 이사한 엘레나 델가도를 만나 1962년에 결혼한 뒤 웨이터 직업으로 돌아왔다.
그는 독일 커뮤니티에서의 인맥을 활용해 퀸즈(Queens)소재 서니사이드 브라우홀(Sinnyside Brauhall), 미드타운 소재의 새 힐튼 호텔의 연회장, 14번가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인 뤼코프(Lüchow)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피터 루거를 창업한 독일인 가족은 츠비너 씨가 1964년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이미 식당이 팔린 상태였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웨이터는 독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많았고, 불만투성이였지요." 아들인 피터 츠비너 씨가 말했다. 반면 그의 아버지 처신은 빼어났다. "아버지는 친절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이 10대였을 때, 도어맨 파트타임 일자리를 주었다. 그러면서 돈을 저축하고 대학에 가야 하는 중요성을 심어줬으며 레스토랑 직업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식당 일을 하면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니까 하는 말이었다. 두 아들은 처음의 두 가지 조언은 받아들였지만, 마지막 조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티븐 츠비너는 현재 맨해튼 스테이크하우스를 감독하고 동생인 피터는 츠비너 스테이크하우스 체인의 사장이다.
츠비너 씨에게는 아들들 외에도 아내와 두 명의 손주, 두 명의 증손주가 있다.
츠비너 씨의 부음기사를 보고 필자는 우리나라의 뒤떨어진 서비스(혹은 웨이터) 풍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특히 알바는,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시간때우거나 싫으면 금방 그만둬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열네 살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함흥물산이라는 회사에 사환(인턴사원에 해당)으로 취직했던 오리온 창업주 이양구는 그곳에서 배운 정직과 신용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웨이터나 사환을 성실하게 하다가 자신의 사업을 일으킨 사람이 많고 많다.
알바를 하는 모든 이가 사업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알바를 하더라도 성심성의를 다한 서비스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테이크하우스 제국을 세운 츠비너 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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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MBC 뉴미디어뉴스국장<br>
-전 MBC 보도본부 특임국장](http://www.m-economynews.com/data/photos/20241147/shp_1732240405.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