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0일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시끄러워질 것으로 예상했다. 2017년부터 4년 동안 트럼프 1기 행정부를 경험했고, 이번 대선 과정에서 그가 제시한 다양한 정책 구상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취임한 이후 거의 매일 지구촌 전체가 트럼프의 과격 행보로 경악을 금치못하는 뉴스를 목도하고 있다. 역시 트럼프는 트럼프다.
1주일 전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 25% 관세를, 중국에 대해는 1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발표로 세상을 뒤흔들어놓더니, 이번에는 중동의 가자지구를 미국이 접수하겠다고 말해서 지구촌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가자 지역은 이스라엘의 맹렬한 타격으로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고, 각종 불발탄이 가자 전역에 산재한 만큼 지역 개발에 심각한 장애물이 존재한다. 개발이 이뤄진다고 해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강제로 이주시킨다면 인종청소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가 된다.
미국이 가자 지역을 소유하는 것도 당연히 국제법 위반이다. 가자 접수 논란으로 지구촌은 또다시 트럼프가 왜 불법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거침없이 제기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특별한 이해타산 없이 충동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이해한다. 미국 정부 고위 관리 중에 이번 가자 관련 발언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는 점이 그런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를 지켜본 사람 중에는 트럼프를 매우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하기 때문에 충동 발언으로 결론을 내는 것은 조심스럽다.
실제로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서 내놓은 외교 관련 과격 발언 중에 다른 나라의 양보를 받아낸 사례가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한 언론은 트럼프의 외교 전략을 ‘타초경사(打草驚蛇)’ 전술을 원용한 것으로 풀이해서 주목을 받았다. ‘풀을 때려서 뱀을 놀라게 한다’는 의미로 중국 병법서 가운데 하나인 ‘36계’ 중 13계에 해당하는 전술이다. 숨어있는 적군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적군이 놀라 스스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전술인데,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해서 화를 자초하지 말라는 정반대 의미도 갖고 있어서 항상 맥락을 살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타초경사 전술을 사용한다는 분석은 실제 사례에서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파나마 운하 문제와 관련해 파나마 정부는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지난 2일 마르코 루비오 신임 국무장관이 파나마를 방문해서 파나마 정부를 설득, 또는 압박한 이후 태도를 바꿨다. 미국 정부 소속 선박에 대해 파나마 운하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 정부는 운하 이용료 수십억 원을 아낄 수 있게 됐고, 트럼프는 파나마로부터 수십억 원을 뜯어냈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할 수 있게 됐다.
캐나다와 멕시코도 사태 수습을 위해 양보안을 제시했다. 트럼프 요구 사항 중에 일부를 수용해서 마약과 불법 이민자 이동과 관련해 미국과의 국경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트럼프는 즉시 관세 부과 시점을 한 달 연기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캐나다와 멕시코를 롤러코스터에 올려놓고 뒤흔들 수 있다는 점을 과시한 것이다.
가자 지역을 미국이 접수한다는 구상도 타초경사 전술로 본다면 향후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 구상에 절대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물론 여타 중동 국가들, 요르단이나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정부 등이 상당한 수준의 양보안을 제시할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가자 지역을 미국에 넘기는 것도 용인할 수 없고, 가자 주민 200만 명을 갑자기 수용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자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하마스 조직의 무력화, 또는 테러 중단 약속 등을 조건으로 가자 지역 재건과 평화 유지 비용을 중동 국가들이 내겠다고 제안하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풀을 흔들어서 숨어있는 뱀을 놀라게 만들고 손쉽게 제압하는 신통력을 보이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전술에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 움직였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치광이가 아니고 절세의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평가가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타초경사 전술은 단기적으로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 불리해서 이 전술을 구사하는 경우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데, 트럼프 대통령이 주의를 기울인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파나마, 캐나다, 멕시코의 양보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 나라들은 압도적인 세계 최강국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서 일단 양보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미국에 대한 신뢰감이 극도로 줄어들 것이다.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쾌감, 적개심은 단지 세 나라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지구촌 대부분 나라들도 각각의 상황에 따라 앞으로 트럼프의 협박을 받고 양보안을 제시하는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의 국가 이미지는 국제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공정한 패권국이 아니라 세계 최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추잡한 깡패국가로 변화할 것이다.
많은 나라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안보와 통상 분야 국가 발전을 도모하는 구상보다는 다른 강대국과의 협력을 모색할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 나날이 중요성을 더해가는 공공외교에서 미국이 치명적인 역주행에 나서는 시나리오다. 파나마 운하 문제로 수십억 원을 아끼고 캐나다와 멕시코의 양보로 수백억 원을 아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이미지 추락으로 발생하는 장기적 손실은 수십조 원이나 수백조 원 이상이 될 것이다.
단지 공공외교 차원을 넘어서 국제 질서가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 체제에서 여러 강대국이 집단적으로 질서를 관리하는 다극 체제로 변경될 수도 있다. 군사적으로는 러시아,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협력하려는 나라는 많아질 것이고, 독일과 일본, 영국, 프랑스, 한국 등이 국제 사회 주요 현안에서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미국이 국제 질서를 주도함으로써 얻는 배타적 이익 독점 구조는 사라지고, 미국이 상실할 가치는 아마도 수천조 원 이상이 될 것이다. 집단지도체제에 참여하는 강대국은 자국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커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점도 존재한다. 강대국 간 서열과 영역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모순은 불가피하고, 약소국을 앞세운 대리전을 포함해 전쟁과 테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새롭게 강대국이 된 나라는 특히 위험하다. 강대국 차원에서 외교 정책을 독자적으로 전개해본 경험이 없어서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한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 시각에서 본다면 미국 주도 단극 질서가 여전히 유리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과격한 외교 구상이 풀을 때려서 뱀을 놀라게 만드는 수준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결국 어리석게도 화를 자초하고 미국을 유일한 패권국에서 하나의 강대국으로 국제적 위상을 격하하는 자해를 범한다면 다극 질서를 현실로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나라의 평화적 공존에 기여하는 집단지도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사활적 과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