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내란 사태가 122일만에 정리되자 세상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헌법재판소 윤석열 파면 결정이 1주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벌써 윤석열 이름 석자를 잊은 모양이다. 일상을 되찾은 사람 중에 윤 아무개를 거론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이재명이 좋다, 안된다 등등의 옥신각신이 진행 중이다. 괴이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가를 철저하게 치른 만큼 대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윤석열 내란은 국가적, 민족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고 앞으로 대한민국 미래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 내란 사태로 노출된 다양한 문제점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또는 전화위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 고민하는 노력도 생략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 여론 또는 담론 전개가 너무 경박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기 전에 수많은 억측이 인구에 회자된 상황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당초 예상했던 3월 14일에 발표가 없이 넘어가자 헌법재판소가 결정 발표를 일부러 늦춘다는 전망이 속출했다.

헌법재판관 8명 중에 5명은 파면 찬성인데 다른 3명은 기각 또는 각하 의견으로 맞서고 있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5대3 교착설’이 대표적이다. 5대3 시나리오는 마은혁 재판관 임명이 지연되는 상황과 겹치고, 4월 말 두 명의 재판관 임기 종료 상황과 맞물려 그럴듯 하다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등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5대3 시나리오가 여론을 주도하자 4대4 시나리오도 소문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파면 결정 선언이 늦어지면서 국민의 인내심은 고갈되고 있는데도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느긋하게 개인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비방중상도 시장 골목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4월 4일 헌재 결정문이 공개되면서 모든 억측의 진상이 노출됐다. 5대3이 사실이었다면 모든 탄핵소추 사유에 대해 재판관 8명이 단 하나의 항목에도 예외가 없이 찬성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분적으로 향후 유사한 사례가 나왔을 때 혼란을 방지하자는 취지로 제도 개선 필요성을 보충 의견으로 낸 재판관이 있었지만, 발표문 어디에도 기각이나 각하를 고민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야당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 협조하지 않아서 대통령이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표현이 있었지만, 그것도 역시 계엄을 정당화하는 차원이 아니고 윤 전 대통령이 정치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포함된 것이다.
결국 5대3설이나 4대4설은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 선고문에서 드러났고, 깃털처럼 가벼운 우리 사회의 담론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헌법재판소 선고가 늦어지는 것이 미국이 개입한 결과라는 주장도 며칠동안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집권하는 것을 미국이 반대한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미국 외교사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설득력이 거의 없는 허망한 억측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은 과거에 남의 나라 내정에 개입한 적이 자주 있었지만, 점차 개입 정도를 줄여가는 추세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개입해야할 필요성이 감소하기도 했고, 개입을 통해 얻어낸 이익보다도 개입과 관련한 부작용이 훨씬 크다는 것을 교훈으로 깨달았기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과거 교훈을 무시하고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보들이 가끔씩 나타났지만, 큰 줄기로 보면 미국의 내정간섭은 줄고 있다.
또 하나, 미국이 타국에 간섭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작은 나라에 국한된다. 미국이 무리한 내정간섭을 하기에 대한민국은 너무 큰 나라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지 못해서 20년 가까이 속절없이 국력을 소모하는 상황을 지켜만 보는 고통을 바로 몇 년 전까지 경험했다.
대한민국은 정책 비중으로 본다면 이라크나 아프간에 비해 오히려 더 큰 나라다. 또한 이재명 후보는 현실적으로 조기 대선에서 승리 가능성이 가장 큰 예비후보다. 그런 후보의 집권을 반대하다가 실패하면 한미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은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다양한 억측에 대해 논리적인 정합성 분석과 더불어 우리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3월 14일에 선고를 할 것이라는 시사를 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신속한 처리 방침을 발표한 점, 그리고 과거 사례를 참고해 3월 14일이 유력하다고 추측을 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약속한 날짜가 없는데 선고가 지연됐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번 헌재 결정문을 보며 문장은 간결하고 경쾌했지만, 내용은 묵직하고 단호했다. 문장 구성에 엄청난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윤 전 대통령 주장을 조리있고 단호하게 반박하는 논리를 명쾌하게 담았다. 이 정도의 최상급 문장을 만들어내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심판의 경우 윤 전 대통령과 그의 변호인들은 매우 많은 주장을 제기했다. 대부분 헛소리였지만, 대통령직 파면을 당할 수 있는 피청구인 주장을 무시할수는 없는 일이다. 꼼꼼하게 따져서 논리적으로 근거가 없고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윤석열 파면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가벼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며칠 전 우원식 국회의장은 6월 3일 치러지는 대선을 계기로 개헌을 하자고 제안했다가 며칠 만에 철회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대한민국에서 개헌 제안은 새로운 제안이 아니다. 1987년 개헌 이후 38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개헌 논의가 진행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개헌 논의는 국론 분열 원인만 제공하고 매번 표류하는 운명을 반복했다.
그동안 논의됐던 개헌 필요성 논점을 보면 내각제 개헌이나 대통령 임기 4년 중임 등 권력구조 개편을 필두로 해서 비례대표제 변경, 선거 연령 조정, 지방자치제 강화, 세종시 수도 지정, 사회적 소수자 권리 보호, 디지털 권리 조항, 기후변화 대응 및 환경권 명기, 노동권 확대, 국민 소환제 등 시민 정치 참여 보장, 헌법전문 조정, 영토 조항 수정, 검찰 개혁, 경제민주화 조항 등을 들 수 있다.
4년 중임제 도입을 위해 원포인트 개헌을 강조해도 실제로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위에 열거한 주장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격렬한 투쟁과 분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헌 논의는 갑자기 거론하거나 추진할 수 없는 극히 무거운 사안이다.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을 갖고 한편으로 정밀한 검토를 진행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적 공감대를 수렴하면서 조심스럽게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불과 60일도 남지 않은 대선을 치르면서 개헌 국민투표를 같이 하자는 발상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동안 묵직한 모습으로 국민을 안심시켜준 우원식 국회의장 이미지를 생각할 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벼운 주장이었다.
대한민국은 윤석열 내란과 파면 과정을 통해 전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담론의 가벼움은 국가적 자부심과는 차이가 크다. 우리가 경험한 대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현안을 토론할 때는 중심을 잃지 않고 근본 요소와 특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균형감을 갖고 판단하고 토론하는 역량을 길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