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소비자 모두를 위한 퍼블릭 글로서리

  • 등록 2025.08.25 10: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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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혜숙 소장(한국공공식료사회연구소)

 


왜 퍼블릭 글로서리인가?


 

“농민이 가격을 지켜야 소비자의 밥상이 안정된다.” 프랑스의 「에갈림(EGalim)법」이 보여주듯 생산자가 원가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할 때 비로소 농민의 삶은 지켜지고 소비자는 예측 가능한 가격으로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공영도매시장은 여전히 하루 단위 경매에 의존하며 가격이 출렁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과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 악순환을 끊어낼 해법이 바로 ‘퍼블릭 글로서리(Public grocery)’다. 퍼블릭 글로서리는 단순히 신선 농산물을 파는 ‘시장’을 넘어 소비자와 농민을 직접 연결하고 가격 변동을 완화하는 공공 유통 거점이다. 가장 큰 특징은 민간 유통업체의 이윤 논리에 좌우되지 않고 공공이 개입해 사회적 가치와 지역의 지속성을 함께 추구한다는 점이다.

 

즉, 농민에게는 가격결정권을, 소비자에게는 투명한 기준에 따른 합리적 소비를 보장하는 플랫폼이다. 이는 관료들의 행정 편의주의나 국제 통상적 우려보다 중요한 국민 편익을 우선하는 수단이다. 소비자와 농민이 함께 기후위기와 시장 불안을 이겨내는 새로운 연대의 토대가 된다.

 


소비자는 또 다른 주체다


 

“배추 한 포기가 7천 원이라니, 김장철도 아닌데 이렇게 비쌀 수가 있나요?”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던 60대 주부는 가격표를 한참 바라보다 결국 발길을 돌렸다. “수박은 3만 원이 넘는데, 아이들 먹이고 싶어도 선뜻 손이 안 가요.” 젊은 부모들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섞여 있다. 무더위를 식히던 여름 과일이 이제는 ‘사치품’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소비자들의 마음은 불안과 피로로 가득하다. 하루가 멀다고 바뀌는 가격표 앞에서 “오늘은 사야 하나, 내일은 더 오를까?” 갈등이 이어진다. 민생회복지원금으로 지갑이 잠시 두둑해졌지만, 동시에 가격이 치솟으니 혜택이 무색하다는 불만도 나온다. 실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원금 수령 이후 수박을 ‘더 많이 구매하겠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서민 가계를 돕기 위한 정책이 오히려 가격 변동성을 키운 아이러니가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격 급등락이 단순히 날씨 탓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염·폭우 등 생산량 감소 요인에 더해, 경매 중심 유통구조가 야기한 수요 충격을 고스란히 가격에 전가하면서 변동성을 더욱 키운 것이다. 한국의 도매시장은 여전히 ‘그날그날의 경매’에 전적으로 의존해 공급과 수요의 작은 변화에도 크게 가격이 출렁인다. 예측 장치와 안정 장치가 부재한 탓이다.

 

이처럼 농산물 가격 변동성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의 구매 행태와도 직결된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농민의 노력만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식량주권을 지키기는 어렵다. 결국 소비자 역시 어떤 먹거리를 어떤 방식으로 소비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선택함으로써 시장 균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이러한 관점에서 녹색소비자연대가 2022년 시작한 CRA(Consumer Rapport Agriculture) 운동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소비자는 친환경 농산물을 구매하고, 농부는 안정적 판로를 확보해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연대 모델이다. 이 운동은 “소비자와 농부의 행복한 동행을 통해 웃는 농부와 지속가능한 농촌을 만든다”는 목표로, 2025년 8월에는 제40차 ‘소농(笑農)과 함께하는 CRA 행복한 동행’ 캠페인까지 진행했다.

 

해외의 공공 플랫폼도 같은 방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사회·연대 식료품점(Épicerie solidaire)은 단순한 저소득층 식료품 할인점이 아니다. 이곳은 지역의 먹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작은 실험실이자 생태·연대 전환의 거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에피세리즈(Epi’Cerise)와 오 카디 플뢰리(Au Caddy Fleury)는 “모든 사람이 양질의 식품에 접근할 권리”를 실현하겠다는 목표로 출발했다. 단지 저렴하게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주민과 수혜자를 인터뷰하고 워크숍을 열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자원봉사자, 공무원, 소비자가 함께 모여 20여 개의 실무 그룹을 꾸렸고, 새로운 활동들이 하나둘 태어났다.

 

지역 생산자 시장을 열어 농민에게는 가격결정권 보장과 안정된 판로를, 주민에게는 신선한 먹거리를 보장했다. 매장 옆에는 유기농 채소밭을 만들어 저소득층도 함께 가꾸고 수확을 나누도록 했다. 남는 과일은 주스로 가공하고 퇴비화 시설을 도입해 음식물쓰레기를 줄였다. 포장을 최소화한 대량 판매 구역은 불필요한 쓰레기를 줄이는 효과도 냈다. 환경부, 농업부, 지역 정부와 민간재단이 함께 지원에 나선 결과였다. 연간 약 5만 유로라는 적은 예산으로도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순한 지원 사업 차원을 넘어섰다. 주민들은 더 신선한 농산물을 손에 넣었고, 지역은 짧은 식품 공급망을 확보했으며, 매장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작은 생태 전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소비자가 단순히 ‘구매자’로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곳의 소비자는 농산물 생산 원가를 알게 되었고, 자원봉사자 및 퇴비화 참여자가 되며 지역 유기농 밭을 함께 가꾸는 기후농부가 되었다. 또한 지역 공동체는 짧은 공급망과 순환경제(자원과 제품의 가치를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면서 폐기물을 최소화하는 경제활동) 구조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간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연대의 장으로 진화한 것이다.

 


퍼블릭 글로서리의 효과


 

이처럼 해외의 공공 주도 플랫폼은 가격 변동성 완화, 농민의 소득 안정, 소비자의 합리적 구매, 지역사회의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효과를 동시에 거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퍼블릭 글로서리가 정착한다면, CRA가 강조하는 농민과 소비자의 신뢰와 상생, 순환경제 운동이 지향하는 자원 순환과 환경 지속성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적 가치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과도 크다.

 

경매제에서 하루 단위로 20~30%씩 출렁이던 가격 변동 폭을 줄여 소비자 물가 안정에 기여하고, 농가의 소득 예측 가능성을 높여 부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게다가 가격 폭등기에 반복되던 긴급 수입과 정부 시장 개입 비용을 줄여 장기적으로는 통상 마찰과 재정 지출 절감까지 가능하다.

 

퍼블릭 글로서리는 단지 새로운 유통 거점이 아니다. 한국 농산물 가격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이중 전략하에 실현해야 한다. 하나는 공영도매시장의 대규모 물류망을 활용해 전국 차원의 가격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 동네 주민자치센터에 퍼블릭 글로서리를 설치해 생활권 소비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주민주권형 플랫폼으로 만드는 것이다. 전자는 도매시장 중심의 경매제에 휘둘리지 않는 거시적 가격 안정 장치, 후자는 주민이 주체가 되어 먹거리의 유통·가격·소비를 함께 결정하는 생활권 민주주의 모델이다.

 


밥상 물가와 미래를 지키는 길


 

국민주권 정부라면 이제 먹거리 권리 또한 주민주권으로 구현해야 한다. 동네 주민자치센터에 열리는 퍼블릭 글로서리는 농민에게는 가격결정권을, 소비자에게는 안정된 밥상을 보장하는 공공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주민들은 소비자이자 협력자로 참여하고, 농민은 공급자이자 권리자로 존중받으며, 모두 함께 지역 먹거리 생태계를 새롭게 설계하게 된다.

 

퍼블릭 글로서리가 확산될수록 가격 급등락의 불안은 줄어들고 농가 소득은 예측 가능해지며 주민들은 기후위기 속에서도 지속가능한 먹거리 안전망을 누릴 수 있다. 이제 유통 권력의 편의가 아니라 국민의 편익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공영도매시장과 주민자치센터를 잇는 퍼블릭 글로서리 체계야말로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밥상 물가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한국 농정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민생을 지키기 위해 지급된 지원금이 무색하게, 농산물 가격 폭등으로 다시 서민의 살림살이를 옥죄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정부의 정책적 대응에 더해 소비자의 행동 변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농민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구조적 위기는 사회 전체가 함께 분담할 때 비로소 해법이 보인다.

 

소비자 스스로 식량주권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행동할 때,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책임을 나누며 기후위기와 시장 불안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밥상 물가는 안정되고 우리의 먹거리 미래도 지켜질 것이다.

 

 

 

편집국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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