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방송인 이연아, 웃음과 긍정으로 새 희망을 쓰다!

  • 등록 2016.02.17 09: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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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이코노미 조운 기자)언제나 밝은 미소로 긍정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탈북 미녀, 이연아. 한국에 온 지 이제 5년차가 된다는 그녀는 2016년을 새로운 도전의 해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긍정’의 에너지로 똘똘 뭉친 이연아 씨를 만나봤다.


애교 섞인 목소리와 밝은 미소로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 탈북 미녀, 이연아 씨를 만난 건 지난달 중순경이다. TV 속에서 똑 부러지는 모습과 달리 그녀의 실제모습은 더 사랑스러웠다. 이연아 씨는 올해로 한국에 온 지 5년차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탈북 과정을 거쳤을 테지만 그녀의 밝은 모습에서는 그늘을 찾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그녀의 인생스토리는 순간 가슴을 멍하게 했다가 다시 미소 짓게 만들었다.


북한에서 라디오 방송원으로 활동


A채널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북한의 간판 앵커 ‘리춘희’ 못지않은 앵커 실력을 보여주던 그녀는 전직 북한 라디오 방송원이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라지오 방송원’이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TV속에서 격양된 목소리로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던 ‘리춘희’의 모습을 흉내 내며 글 읽기를 잘하던 재능 있는 소녀였다고 한다. 사춘기가 지나고 어머니와 주변의 도움으로 지방 선전 선동 라디오 방송성우 역할을 하게 됐다고. 북한은 라디오 방송이라고 해도 우리처럼 음악을 틀어주고,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김정일, 김일성 고위지도자들의 동향이나 그에 대한 찬양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제가 한 말은 오직 ‘위대하신 수령님을 위해, 우리가 더 열심히 분발해서 생산과 경제건설에서 비약을 일으키자’ 이런 내용뿐이었어요. 한마디로 세뇌시키는 역할을 한 거죠.”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녀는 21살에 라디오 방송원이 된 이후 일주일 만에 실전에 투입되어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저도 충성심에 불타 일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도 너무 신기했죠. 나중에는 콧대가 올라가더라고요.” 그렇게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일을 한지 3년 만에 스스로 방송일 을 그만둬야 했다고 한다.


“경제적인 이유였어요. 월급을 타도 과자 1kg을 살 수 있을까 말까한 돈을 받았으니까 일할 의욕을 가질 수 없었죠. 한국은 일한 만큼 적절한 보상을 주잖아요. 저는 정말 열과 성을 다했는데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기본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급여, 생활비가 안 나오니까 꿈도 사라지더라고요. 이걸 계속하면 꽃제비가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그만 둘 수밖에 없었어요.”


화폐개혁으로 모아 놓은 돈 휴지조각 돼 버려


현실의 벽과 부딪혀 꿈을 접은 그녀는 그 길로 모험적인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장사에 뛰어든 그녀는 중국 장사꾼의 신용을 얻어 대규모로 중국의 중고 옷을 받아 장사를 했다. 10톤 트럭 3개 정도 분량에 달하는 헌옷들을 창고로 가져와 직접 분리하고 정리해 다시 북한의 장사꾼들에게 도매로 팔았다.


“먼지 풀풀 나는 창고에서 하루에 15시간, 16시간 동안 옷들을 정리하면서 일만 했어요. 한 번은 큰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죠. 나중에는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항생제 주사를 맞으면서 일을 했는데 오직 돈을 벌겠다는 목표 하나로 악착같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다 보니 꽤 큰돈도 만질 수 있었고요.”


장사를 해 번 돈으로 꿈에 그리던 시내에 집도 마련하고 목돈도 모으게 된 그녀는 돈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어머니께 돈을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사달이 났다. 중국 돈으로 모아둔 종자돈을 어머니가 북한 돈으로 바꾸자마자 화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2009년 북한 화폐개혁은 북한경제를 파탄 낸 주범으로 꼽히는 악마의 개혁이다. 실제로 화폐개혁으로 그녀가 모아둔 돈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때 정말 엄마한테 심하게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힘들게 번 돈인데,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절제가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엄마 잘못이 아니잖아요. 나라가 잘못한 거지.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어요. 나라에 충성해도 먹고 살기는커녕, 오히려 망하게 만드는 나라에서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그녀는 주변에서 대준 밑천으로 장사를 또 시작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게 망하고 나니까 ‘나를 차라리 죽였으면 죽였지, 세상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리가 없다. 이거는 이 나라를 떠나라는 뜻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겠다는 생각이드니까 용기가 났죠. 그때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탈북을 마음먹게 됐어요. 탈북을 하면서도 고마웠어요. 만약에 한 번이라도 북한에서 성공을 했다면 그냥 거기서 아등바등 살아야 하잖아요.”


탈북 1년 만에 부모님 모셔와


2012년, 그녀는 혈혈단신 한국에 왔다. 그러나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맛있는 걸 먹어도, 좋은 걸 봐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때문이었다. 재회의 기회를 엿보던 그녀에게 탈북한지 1년 반만에 기회가 생겼고 부모님을 한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좋았죠. 괴로웠던 기억 다 잊고, 잃어 버렸던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그때 들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거짓말처럼 예전의 밝고 당차던 저로 돌아올 수 있었죠.”


이연아 씨는 그 이후 공부도 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뉴코리아여성연합 이소연 대표를 만나게 되어 더 활발히 방송 일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항상 밝고 긍정적인 그녀였기에 이렇게 아픈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방송 작가 분들과 인터뷰를 할 때면 제가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니까 많이 놀라죠. 어떻게 그런 일을 덤덤하게 말 하냐고. 그래도 저는 행운아에요. 만약에 북한에서 지금까지 라디오 방송원으로 일한다면, 설령 어떤 이유로 장사를 했는데 만약 아무 일이 없이 돈을 많이 모았다면 제가 한국으로 올 수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도 없었을 테니까요.”


성우시험에 응시했다가 탈락


그녀의 긍정적인 해피 바이러스 때문일까? 그녀는 최근 A채널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 프로그램 외에도 ‘잘 살아 보세’의 성우를 맡아 내레이션도 하고 있다고 했다. 라디오 방송원 경험 때문에 화면에 비치는 방송보다도 이런 목소리로 하는 일이 더 마음도 편하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그녀는 앞으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통일이 당겨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다짐했다. 얼마 전부터는 라디오 방송을 맡아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기에 대한 내용의 방송도 진행하게 됐다고 한다.


“사실 한국 와서 만난 한 성우 분이 저한테 계속해서 성우 시험을 한 번 보라고 권하셨어요. 그래서 한 번 응시했다가 떨어졌죠.(웃음) 정식으로 배운적이 없고 아직 북한 억양도 강하잖아요. 근데 그 성우분이 저보고 ‘탈북민 최초 성우’가 될 수도 있겠다고 하시면서 응원해 주시고 칭찬도 해 주셨어요. 저의 어릴 적 꿈이니까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해서 도전해 보고 싶어요.”


작년 연말부터는 전국에 강의도 다닌다고 했다. 장애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어떻게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지, 남북의 비교 등에 대해 강연한다.


“제가 느끼고,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강의를 하는거죠. 그것만으로도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고 해요.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살았고, 힘든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잖아요. 여기에 올 때는 희망을 품었기에 가능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강의 말미에는 제가 꼭 이런 애길 해요. 여러분들도 더 즐겁게, 더 긍정적으로 사세요. 그리고 힘들 때는 제 이름 ‘이연아’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도 참 밝았지’하며 힘을 내세요. 이 말을 하면 다들 웃으시면서 고맙다고 해요. 제가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웃음을 드릴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요.”


올 3월이면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공부시작


2016년, 탈북미녀 ‘이연아’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바로 ‘배움’이다. 한국에 와서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그녀는 늦은 나이지만 대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이어갈 생각이라고 한다.


“올 3월이면 제가 여대생이 돼요. 사실 갈등도 많았죠. 돈을 벌어야 하는데 공부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줄어들잖아요. 그런데, 둘 다 하자고 결정했어요. 정말 내 인생을 살아보자. 미래를 위해 더 노력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자 이렇게 정한 거죠.”


현재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그녀는 늦은 나이에 학생이 된다는 설렘으로 최근 잠을 설치기도 한다면 해맑게 웃었다.


“두렵기도 하지만, 제가 가진 최고의 무기인 긍정의 힘으로 다 해 낼 거예요.”


세상에 대한 미움과 분노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내일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따뜻한 감동이 전해지는 듯 했다. 해피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는 탈북미녀 이연아 씨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16


조운 기자 jw1211@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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