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한국독립에 관한 관심은 영국 언론인들에 의해 활발하게 제기됐다.
데일리 메일의 맥켄지 기자는 1906년 한국의 의병 활동을 취재 보도했고, 「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 등의 저술을 발간했다. 정치평론가인 제롬은 한국의 독립요구에 무관심한 국제연맹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조셉 그레브는 한국의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를 폭로했다.
임시정부로부터 런던주재 외교원으로 임명된 황기환은 맥켄지 기자와 협의해 의원과 교수 등 60여 명이 참여한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1920년 10월 26일 발족했다. 한국친우회 발족대회에서 사회자인 하원의원인 뉴먼 경은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분투하고 있는 한국민족을 구제할 수 있는 중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모였다”고 밝혔다. 이 대회에서 ”한국민족의 정의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에 대하여 동정적 원조를 제공할 것, 한국의 기독교 전도에 대한 자유를 옹호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결의했다.
영국 하원은 정부 관계자를 출석시킨 가운데 1920년 4월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 일본의 한국인 탄압,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등 한국문제를 질의함으로써 일본을 규탄했다.
미국에서 독립 선전 활동은 1917년 10월 뉴욕에서 개최된 약소국 동맹 회의였다. 24개국 약소국 대표들이 참여한 이 회의에 재미 한인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는 박용만, 민찬호, 정한경의 3인 대표를 참석시켜 한국독립문제를 제기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 대미외교는 국무성의 냉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이승만 등 3명의 여권을 미국 국무부에 신청했으나 거부됐다. 그래서 자연스레 공식 외교 루트가 아닌 민간 대상의 선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1919년 3월부터 1920년 9월까지 미국 신문에 9천여 회에 걸쳐 한국문제와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한국평론」이란 임시정부 간행물도 1919년 6월부터 발간해 배포했다. 그밖에 「한국의 진상」, 「한국의 재흥」 등 한국인과 미국 작가들이 집필한 21종의 선전용 간행물을 전 미국에 보급했다.
1919년 5월 16일에는 서재필의 권유로 상원의원 톰킨즈가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창립했다. 창립 목적으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원조하고, 기독교의 선교 자유를 보장하고,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악행을 방지하고자 하며, 미국 일반 공중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친우회는 미국 전역에서 호응을 받아 19개 지부를 둘 정도로 성장했다. 비록 국무성의 공식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상원과 하원에서 한국문제가 여러 차례 토의돼 의사록에 기록됐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중국을 제외하고는 외교 활동이 상당히 침체돼 있던 중 1941년에 접어들자 미국과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와 재미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의 호기가 왔음을 감지했다. 임시정부는 그해 주미 외교위원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임시정부는 이틀 후인 12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포고문을 미국, 영국, 일본, 소련 등 4개국에 발송했다. 12월 10일에는 미국 대통령에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할 뜻을 외무부장 명의의 공문으로 전달했다. 외교위원부는 아울러 미국 정부에 대해 한국인의 신분을 일본인과 분리하여 보장해줄 것을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1942년 2월 말과 3월 초에는 전미 한인들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한족 대회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재미 단체 각 대표와 미국인 저명인사 100여 명이 참석해 한국독립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결의문에서 “1919년 선언한 대한민국독립선언서를 다시금 선언하는 동시에 자유와 자주를 우리 것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 싸우기로 선언한다. 1942년 1월 1일에 워싱턴에서 28개국이 조인한 연합국 선언서를 찬성하고 한국 임시정부도 연합국 선언서의 한 나라로 정식승인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한응 열사의 순국이 있었던 1905년부터 1942년 전미 한족 대회의 결의문 선언에 이르기까지 37년간 피와 좌절과 눈물과 실패의 연속 끝에 마침내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에서 미국과 영국, 중국 3개국 정상들이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것임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무장투쟁도 한국독립의 주춧돌 중의 하나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장독립 투쟁은 외국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무장세력은 국내에서는 투쟁할 수 없었다. 한국의 의병은 한반도 내에서 완전히 진압됐고 일본군의 철저한 지배체제가 굳혀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본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한국 독립군은 중국을 제외하고는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내부 분열과 일본군과 전투로 약체였던 까닭에 한국 독립군에 큰 도움을 주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의 승리, 광복군의 존재는 실제 전투에서 거둔 성과가 미미하다고 할지라도 한국이 독립국으로서 인정받는 데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군에 식민지 한국인들이 장교로서나 학도병으로서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들에 만약 광복군이 없었더라면 어떤 인식을 받았을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유별나게 정의와 평화에 민감하게 된 것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선조들이 불굴의 정신으로 약소국으로서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고 내면화한 때문임을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약소민족으로서 국가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민족들이 많다. 한국은 그들을 동정하고 지원할 도덕적, 역사적 책무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