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는 위기감
지난 9월 14일 일본 나가노현에서는 일본 IB교육학회 전국 연구대회에 문부과학성 위탁사업 공동연구 발표가 있었다. 2016년에 창립된 일본 IB교육학회는 올해로 10회를 맞이했으며, 일본 전역의 IB 교사, 연구자, 교육 행정가, 학부모, 일반 시민들이 모여 IB 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논의하는 장이 되었다. 학회장에서는 포스터 세션과 발표가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IB를 막 시작한 공립학교 교사들의 경험담부터 10년 가까이 노하우를 쌓은 선도학교의 수업사례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오갔다. 필자는 발표자로 참석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일본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IB는 이상적이지만, 입시와 현장의 괴리가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2024년에 IB교육학회가 창립되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일본이 2013년 문부과학성과 국제바칼로레아 기구(IBO)와 협력하여 ‘일본어 DP’를 시작한 지 약 12년이 지났다. 그동안 겪어온 시행착오와 성과는 한국 교육이 IB를 도입하고 확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 전반에는 글로벌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버블 붕괴와 장기 불황,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은 일본의 활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젊은 층의 해외 유학 감소는 일본 사회의 “내향화(内向き志向)”를 보여주는 대표적 현상이었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영국, 호주 등으로 많은 유학을 떠났으나, 2000년대 이후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언론은 이를 “세계와의 단절”이라고 표현했고, 경제계는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교육 현장에서는 “여유 있는 교육(ゆとり教育)”의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학습량을 줄여 자율성과 창의성을 기른다는 취지였지만, 사회적 평가는 달랐다. 언론과 학부모들은 “기초학력이 약화되었다”, “일본 아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위기 의식 속에서 일본 사회는 새로운 교육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답 중 하나가 바로 국제 바칼로레아(IB)였다. IB는 단순히 해외 대학 입학 자격증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탐구, 표현 능력을 기르는 세계 표준의 교육과정으로 주목받았다.
◇아베 정권과 문부과학성의 전략
2013년 제2차 아베 신조 정권은 ‘일본재흥전략(日本再興戦略)’을 발표하며 교육 개혁을 국가 성장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그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글로벌 인재 육성”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경제 정체와 청년층의 내향화,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 약화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교육이 이를 타개할 중요한 열쇠로 간주되었다.
문부과학성은 같은 해 IB 본부와 협력하여 2030년까지 IB 월드스쿨을 200교 이상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일본 내 IB 학교 수는 30여 교에 불과했으므로 이는 매우 야심 찬 계획이었다. 실제로 2025년 3월 31일 현재 일본 내 IB 인가교와 후보교를 프로그램 단위로 집계한 수는 총 260교에 달한다.
PYP: 인가교 76교, 후보교 44교
MYP: 인가교 41교, 후보교 18교
DP: 인가교 73교, 후보교 7교
CP: 인가교 1교, 후보교 0교
이는 일본 정부가 설정한 목표가 상당 부분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위 수치는 프로그램 단위로 집계한 것이므로 동일한 학교가 여러 프로그램(PYP, MYP, DP 등)을 운영할 경우 중복 계산될 수 있다. 따라서 국제 바칼로레아 기구(IBO)가 공표하는 학교 수와는 차이가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일본어 DP(디플로마 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기존의 IB는 영어 기반 교육과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일본 학생들에게는 높은 언어적 장벽이 있었다. 따라서 IB는 “특권층 국제학교 학생들의 제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일본어 DP가 도입되면서 일본의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학생들 누구나 자국어로 IB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공교육 혁신을 위한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5년 3월 기준 37개교가 일본어 DP를 운영 중이다.
문부과학성은 IB를 “글로벌 표준 교육과정”으로 규정하면서, 단순히 해외 대학 진학 루트를 제공하는 제도가 아니라 일본 교육의 혁신을 견인하는 제도로 강조했다. 정책 문서에는 “IB를 통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력과 자질을 보장하고, 일본 교육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한다”라는 문구가 반복되었다. 정부는 IB 도입 학교에 재정 지원과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했고, 대학 입학 전형에서 IB 성적을 반영하도록 권고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는 “IB 도입 → 고교 수업 혁신 → 대학 입시 개혁”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구상하고 있었다.
◇글로벌 인재론과 교육개혁의 접점
일본에서 IB 확산이 본격화된 또 다른 배경은 경제계의 압력이었다. 일본경단련(日本経団連)과 대기업들은 “국제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젊은 인재가 부족하다”고 수 차례 경고했다. 특히 2010년대 초반 경단련 보고서에는 “영어 능력만이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 리더십, 다문화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언어 능력 이상의 ‘총체적 역량’을 요구한 것이다. 기업 현장에서는 해외 주재원 후보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국제 프로젝트를 이끌 젊은 리더의 풀이 좁아지고 있다는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정치권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아베 정권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대학 입시 개혁을 추진했다. 영어 4기능(읽기·쓰기·듣기·말하기) 평가 반영, 논술·토론형 평가 강화 등은 기존의 주입식·암기식 교육을 탈피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일본 교육이 오랫동안 지향했던 ‘균질한 학력 보장’에서 벗어나, 개별 학생의 역량을 다각도로 평가하려는 전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일본 교사들에게 생소했고, 교육 현장에서의 실질적 대안이 필요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IB의 수업 방식이 주목받았다.
IB는 탐구 중심, 토론 중심, 프로젝트 중심 학습을 통해 학생이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DP 과정의 EE(Extended Essay)는 고등학생이 대학 수준의 연구를 경험하는 장치로, 기업이 요구하는 ‘문제 발견-분석-해결’ 능력과 맞닿아 있다. TOK(Theory of Knowledge)는 비판적 사고와 지식의 성격을 성찰하게 하는 과목으로, 리더십과 창의성을 기르는 훈련장이 되었다. 이러한 수업과 과제는 일본 사회가 절실히 원하던 글로벌 인재상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IB는 단순히 외국 대학 진학을 위한 교육과정이 아니라, 일본이 당면한 “글로벌 인재 부족” 문제와 “입시 제도 개혁”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기 위한 실험장이었다. 일본 사회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미래 인재상을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IB는 교육 개혁 담론과 글로벌 인재론이 만나는 접점이 된 것이다.
◇지방정부와 학교 현장의 실험
중앙정부의 정책만으로는 IB 확산이 어려웠다. 실제 도입과 운영 단계에서는 지방정부와 학교 현장의 노력이 핵심이었다. 도쿄 시나가와구, 히로시마현 등은 공립학교에 IB를 도입하여 국제학교 중심의 IB 교육을 넘어 일반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열었다. 교실에서는 일본어와 영어가 병행되며, 학생들은 지역사회의 환경 문제를 주제로 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사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요코하마 국제고등학교는 일본 공립학교 중 대표적인 IB DP 운영 사례로 꼽힌다. 필자는 2025년 3월 이 학교를 방문하여 교사와 학생들을 인터뷰하였다. 학생들은 EE(Extended Essay) 과제로 일본과 한국 교과서의 전쟁사 서술을 비교 연구하고 있었다. 자료 수집과 분석 과정은 대학 수준의 연구 방법론을 적용했고, 결과는 영어로 발표했다. 여기에는 지역 대학 교수들이 멘토로 참여하면서 고교와 대학 간의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사카시와 후쿠오카시와 같은 대도시는 IB를 교육정책 차원이 아니라 지역 전략과 결합시켰다. 오사카시는 글로벌 기업과 협력하여 학생들에게 현장 체험 기회를 제공했고, 후쿠오카시는 “아시아 허브 도시”라는 도시 비전을 살려 IB 교육을 국제 교류 프로그램과 연결했다. 이처럼 일본식 IB 정책은 중앙정부의 전략, 지방정부의 의지, 학교 현장의 실험이 맞물려 가능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지역 간 격차도 심화되었다. 재정력이 있는 도시에서는 IB 도입이 활발했지만, 지방의 농촌 지역 학교에는 여전히 접근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본식 IB 정책의 한계
일본식 IB 정책은 성과와 함께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교사 전문성 부족이다. IB 수업은 토론, 에세이, 프로젝트 중심인데, 일본 교사들에게는 낯선 방식이었다. 연수 프로그램이 마련되었지만, IB의 수업 철학과 평가 방식을 현장에 안착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많은 교사들이 “IB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둘째, 대학 입시와의 연계 문제이다. 일본 대학들은 IB 성적을 일부 인정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제한적이었다. 예를 들어, 문부과학성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2022년 기준 일본 내 68개 대학이 IB 성적을 활용한다고 밝혔지만, 대부분 특정 학과나 특별전형에 한정되었다. 국립대학 협회가 공언한 것과 달리, 대규모 대학 입시 체제에서 IB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IB를 선택해도 대학 진학에 불리할 수 있다”는 불안이 컸다.

셋째, 학부모 인식의 양극화이다. 일부 학부모는 IB를 자녀의 글로벌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학부모는 과중한 학습 부담과 불확실한 진학 결과를 이유로 회의적이었다. 특히 일본어 DP와 영어 DP 중 어느 과정을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일본어 DP는 접근성이 높았지만 국제 경쟁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영어 DP는 진학에 유리했지만 학습 부담이 컸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일본의 IB 도입은 중요한 잣대와 거울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앞으로 IB를 도입하려 할 때 일본의 경험에서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입시 제도와의 연계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IB 성적을 대학 입시에 일부 반영했지만, 주류 입시 제도와는 괴리가 있었다. 한국도 수능과 내신 중심의 입시 체제에서 IB가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지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둘째, 교사 전문성 강화이다. 일본 사례에서 보듯이 교사의 준비가 부족하면 IB 철학은 현장에서 작동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도 교사 연수를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수업 시간표와 평가 방식을 IB에 맞게 재설계해야 한다. 셋째, 지역 격차 해소이다. 일본에서는 대도시 중심으로 IB가 확산되었고 지방은 소외되었다. 한국에서도 특정 지역만 IB가 도입될 경우 교육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 따라서 중앙정부, 지방정부, 학교가 함께 협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IB는 일본에서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글로벌 인재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라는 국가적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 일본 사회는 IB를 통해 교육 혁신을 실험했고, 그 과정에서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한국은 일본보다 IB도입이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일본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 일본처럼 제도와 정책 드라이브만으로는 IB가 성공하지 않는다. 교사, 학부모, 대학,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고 협력할 때만 IB는 뿌리내릴 수 있다. 결국 IB는 제도가 아니라 문화와 철학의 문제이다. 그것이 일본의 10년, 그리고 앞으로 한국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글 : 현재균 교육학박사(츠쿠바대학 특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