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수도의 바탕은 시민
이재명 대통령은 2026년 신년사를 통해 서울을 ‘대한민국의 경제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 구상은 단순한 수사나 도시 브랜드 전략이 아니다. 이미 성장률이 1%대에 머무는 저성장 국면에서, 수출만으로는 국민의 체감 경기를 바꾸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에 기반한 정치적 선택에 가깝다.
이제 성장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의 문제이며, 수도의 경쟁력은 초고층 빌딩과 금융상품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판단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울만의 것이 아니다.
세계 최대 경제도시 중 하나인 뉴욕에서도 최근 식료 가격 급등과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도시 차원의 핵심 정치 의제로 부상했다. 2025년 뉴욕시장 선거 과정에서 시장 후보였던 조란 맘다니는 ‘시 소유 식료품점(Municipal grocery stores)’ 도입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뉴욕시 5개 자치구에 시가 직접 소유·운영하는 식료품점을 설치해, 임대료와 재산세, 과도한 유통 비용을 제거한 가격으로 기본 식료를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맘다니 뉴욕시장의 구상은 민간 유통을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도시가 최소한의 공공 유통 채널을 확보해 식료 가격의 기준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민간 시장 전반의 가격 상승 압력을 완충하겠다는 접근이다. 실제로 관련 여론조사에서 뉴욕 시민의 약 3분의 2가 도시 차원의 식료 가격 안정 정책 도입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실행 단계는 아니지만, 뉴욕이라는 글로벌 금융·서비스 중심 도시에서조차 장바구니 물가가 도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서울 경제 수도’ 선언과 맘다니 뉴욕시장의 ‘시의 소유 식료품점’ 공약은 서로 다른 정치·제도적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것은 대도시의 경쟁력이 더 이상 성장률이나 금융 규모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시민의 생활비, 특히 식료와 같은 필수 영역의 안정성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한다는 인식이다. 경제 수도란 자본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시민이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지향점은 같다.
◇경제 수도는 생활 중심이어야
서울은 지역내총생산(GRDP)이 500조 원을 상회하는 세계적 경제도시다. 하지만 시민의 일상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주거비와 함께 식료·외식비 부담은 서울 민생의 가장 취약한 고리로 떠올랐다. 특히 1인가구 비중이 40%에 육박하는 서울에서 식비 지출은 더 이상 조절 가능한 소비가 아니라, 회피할 수 없는 고정 비용이 됐다.
서울은 제조업 중심의 성장 도시가 아니라 서비스업과 소비, 플랫폼, 외식·관광·문화 산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룬다. 이 구조에서 식료와 외식 물가가 불안정해지면, 그 충격은 즉각적으로 소비 위축과 자영업 부진, 고용 불안으로 이어진다. 장바구니 물가의 작은 변동이 도시 전체의 활력을 흔드는 이유다.
경제 수도를 말하면서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울 경제 수도 모델은 금융과 개발 중심 모델이 아니라, 생활 인프라가 탄탄한 소비·서비스 중심 도시 모델이다. 그 핵심 축 가운데 하나가 ‘공공식료 기본사회’다.
◇ ‘공공식료 기본사회’의 효과
‘공공식료 기본사회’란 식료를 시장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생산·유통·접근의 핵심 경로를 공공적으로 설계·관리함으로써, 먹고 사는 문제를 개개인에게 부담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보장해야 할 기본 조건으로 전환하는 사회 모델이다. 특히 그동안 생산과 도매 단계까지 형성되어 온 공공적 연결 구조를 넘어, 앞으로는 소매 단계까지 공공의 책임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시민의 일상에서 식료 접근성과 가격 안정이 실제로 체감되도록 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는 단지 공공의 개입을 확대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소비자의 삶과 직접 맞닿는 지점까지 공공의 역할을 옮기겠다는 구조적 전환이다.
‘공공식료 기본사회’는 공공조달, 공동물류, 디지털 정산과 가격 추적 같은 체계적 장치를 통해 가격 형성의 경로 자체를 안정화한다. 이는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방식이 아니라, 가격이 급등하거나 급락하는 구간을 완충함으로써 소비 위축과 민생 불안을 예방하는 구조다. 전체 소비자물가는 비교적 안정돼 보이지만, 식료와 외식 물가가 체감 경기를 좌우하는 최근 국면에서는 이러한 경로 안정화가 실질 가처분소득을 방어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물가 안정 효과는 통화정책과 금융 여건에도 간접적인 긍정 효과를 가져온다. 물가 변동성이 낮아질수록 중앙은행은 과도한 긴축이나 완화에 치우치지 않고 보다 유연한 정책 운용이 가능해진다.
특히 식료 물가처럼 통화정책으로 직접 제어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구조적 완충 장치가 작동할 경우, 통화정책은 경기와 물가 사이에서 보다 안정적인 균형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거시경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민생과 금융을 불필요하게 충돌시키지 않는 정책 환경을 조성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공공식료 기본사회’는 유통과 물류 비용을 구조적으로 낮추는 산업 정책적 효과도 갖는다. 신선식품은 거래 부대비용, 운송비, 보관비, 폐기·손실 비용이 고스란히 가격에 반영된다.
현재의 다단계·중복 물류 구조에서는 이러한 비용이 누적되며, 이것이 소비자 가격을 끌어올린다. 공동물류 체계, 표준화된 포장·소분, 디지털 정산 시스템이 결합될 경우 이러한 중복 비용과 비효율이 줄어들고, 이는 곧 유통비 절감과 소매가 안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단기적인 가격 인하보다, 장기적으로 경제 전반의 비용 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가진다.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도 ‘공공식료 기본사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식료 접근성이 불안정할수록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의 영양 불균형과 건강 악화가 심화되고, 이는 의료비 증가와 노동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기본식료와 공공급식, 먹거리 안전망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경우, 질병 예방과 건강 유지라는 간접 효과를 통해 사회 전체의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다. 따라서 공공식료는 단순한 복지 지출이 아니라, 장기적 재정 부담을 줄이는 예방적 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 ‘공공식료 기본사회’와 지속가능성
그렇다면 공공식료 인프라는 어떤 방향으로 구축되어야 하는가? 첫째, 현금 지원이나 일회성 가격 보조보다 가격 형성 경로의 구조적 안정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얼마를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격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전달되는가’를 설계하는 문제다.
둘째, 단발적 대책이 아니라 공공수요를 기반으로 한 장기 계약 중심의 공급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계약재배와 장기 거래는 생산자에게는 소득 안정성을, 소비자에게는 가격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 셋째, 데이터와 투명성에 기반한 정산·가격 추적 시스템을 통해 거래 정보의 비대칭을 줄이고 시장 규율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정책 수단은 디지털 유통 인프라와 생활권 식료 인프라를 결합한 통합 구조다. 서울시는 AI서울온라인도매시장을 구축해 도매·직거래를 아우르는 공공 거래 플랫폼을 직접 설계·운영하고, 공공 기준가격과 투명한 정산 체계를 통해 가격 왜곡과 불공정 거래를 최소화한다. 이 플랫폼은 전통시장과 중소마트가 산지와 직접 연결되는 통로로 작동해 대형 유통사 중심 구조를 완화하고, 도매–소매 간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는 가격 기준선을 형성한다.
이와 함께 생산비 기반 계약재배와 정가 거래를 바탕으로 한 공공형 공동체지원농업(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을 도입해 생산자 소득을 안정시키고, (못난이)농산물 정기 구독과 공공 유통망 연계를 통해 폐기품 감소와 소비자 가격 안정을 함께 달성한다.
여기에 서울퍼블릭마켓이라는 오프라인 공공식료 거점을 생활권 단위로 구축해 도매 가격이 합리적인 소매 가격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소량 소비에 불리한 기존 유통 관행을 개선한다. 나아가 공유부엌·아침센터 등 공공 조리 인프라를 확충해 1인가구와 청년층의 식비·시간 부담을 낮추고, 공공식료를 활용한 ‘건강한 한 끼’ 모델을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육성함으로써, 생산–유통–소비–생활이 연결된 지속가능한 공공식료 생태계를 완성한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공공식료 거버넌스의 정립이 출발점이 된다. 중앙과 지방 차원에서 전담 조직과 운영위원회를 설치해 정책 결정과 집행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고, 위기 시 자동으로 작동하는 가격 안정 프로토콜을 제도화해야 한다.
동시에 공공조달·계약재배 플랫폼을 통해 학교·공공급식, 농식품바우처, 취약계층 먹거리 지원 등을 하나의 통합 수요로 묶음으로써, 생산과 유통의 변동성을 줄이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공동물류 거점, 표준화된 포장·소분 시설, 디지털 정산 인프라는 이 구조를 현실화하는 핵심 요소다.
‘공공식료 기본사회’는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률과 민생 지표가 동시에 악화되는 구조적 국면에서, 생활 조건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단계적으로 확산된다면, 한국 경제의 하방 리스크를 줄이는 중요한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식료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생활 조건이며, 그 가격과 공급의 안정성은 도시와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한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경제 수도’를 지향한다면, 그 경쟁력은 자본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안심하고 장을 볼 수 있는 도시, 생활비 불안이 일상을 잠식하지 않는 도시야말로 진정한 경제 수도다. 장바구니 물가를 외면한 경제 수도는 없다. ‘공공식료 기본사회’는 선택이 아니라, 경제 수도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구조적 대응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