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후퇴와 이보전진

  • 등록 2026.01.05 15:29:44
크게보기

 

예전에 주한 영국대사를 지낸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나라를 일컬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가 아니라 '아침마다 놀라는 일이 생기는 나라(The land of morning surprise)'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200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보고,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한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한국의 정치를 표현했던 것인데, 그분이 계엄령 선포 이후 지난해 한 해 동안 벌어지는 일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이제는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한 세대에 한 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들이, 일 년 동안에도 몇 차례나 발생하는, 대단히 역동적인 한국의 상황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러한 삶에 익숙한 우리 국민들에게도 힘들지만, 외국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흔히들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을 ‘압축 성장’이라고 표현하면서, 무슨 일이든 급하게 진행하면 부작용과 후유증이 있기 마련이기에, 우리가 겪은 혼란과 아픔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숙해가는 과정이었다 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년은, 그렇게 치부하면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가슴 졸이는 힘든 시간들이었다.

 

우리 국민은 위대했다

 

돌이켜 보면 '다행'이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참으로 아찔아찔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언에, 야간에 담을 뛰어 넘어 국회의원들이 모여 계엄해제와 대통령 탄핵을 표결하고, 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는 그 과정 자체도 역동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조직과 단결은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한 장면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념할만한 일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으로 진행된 것이다. 4.19를 겪고, 5.16을 살아낸 국민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절절한 아픔을 이렇게 숭고하게 승화시켰을 것이다. 부모들이 살아온 그 과정을 배우고 자란 세대들은, 2016년 촛불혁명에 이어 2025년 빛의 혁명으로 확대발전시키면서,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서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으로 만들어 내었다.  

 

지난 일 년은 너무나 바쁘게 진행되어 왔기에, 지나온 시간들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너무나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어야 했기에,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또 한해를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영상과 기사에 남겨진 기록들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한 번 반추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지나 온 과정을 정리하면서 의미를 찾아낼 것이고, 사회학자들은 그 근저에 자리한 역동성의 원인을 분석해 낼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외국의 민주화 투쟁 사례와 비교하면서, 우리 손으로 만들어 온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가치를 정리해 줄 것이다. 

 

오늘도 정신없이 바쁘고, 숨이 가쁘도록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스스로에게 칭찬을 한 번쯤은 해 주어야 한다. 치열한 역사의 한 구석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 혼란의 과정을 흔들리지 않고 지켜낸 우리 국민 모두는, 이제 후손들에게 <위대한 시대>로 기록될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지난해를 마무리 짓고, 떠나보내도록 하자.

 

◇다시 시작된 과제들

 

일 년 정도 하면, 특별검사들의 역할이 모두 마무리가 되고, 내란의 주범들과 공범들에 대한 재판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줄 알았는데, 사법부 까지 엮어진 내란세력들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여전히 반란 수괴들과 그 동조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토벌 전쟁은 진행 중이다. 마음 같아서는 칼로 끊어 내듯이 단죄를 하고 싶지만, 지난 빛의 혁명 과정이 그래왔듯이, 시간이 걸리고 답답하더라도, 올해에도 법과 절차에 따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해 첫 날부터 국제뉴스들도 심상챦은 소식들을 전해 온다. 엄연한 주권국가인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국의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외국의 군인들이 체포했다는 소식은 엄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힘이 없었던 구한말 시기에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국왕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의 군대에 체포되어 천진에서 3년간 연금생활을 했고, 당시 국왕의 부인이던 명성황후는 일본이 보낸 낭인들에게 궁궐 안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6위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면 철저한 실용 외교 뿐 아니라, 자주 국방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빛의 혁명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새해 벽두부터 박근혜, 윤석렬 전임 대통령이 망쳐놓은 한중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차가운 칼바람이 부는 황해를 건너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의 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곧 마무리가 될 것인데, 그 이후에 벌어질 국제 정세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APEC을 잘 치르면서, 동시에 엔디비아의 GPU확보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렴한 노동력이 뒷받침해 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 경제의 살길은 어디에서 열릴 것인지, 아직은 캄캄하기만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작한 무역 전쟁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수출중심의 우리의 경제상황은 고환율과 국제 경기, 무역의 침체,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끝없는 어려움 속에서 길을 찾아야하는 상황이다. 

 

대외적인 변수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그 동안 우리 경제를 견인해 왔던 5대 주력 산업 중 어느 것도 안심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반도체 등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특정 분야에 너무나 집중된 경제 구조는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아직 다양한 신산업들이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의 희망도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AI를 중심으로 하는 제2의 경제성장을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수익창출을 기대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우리는 본 적도 없는 “경” 단의의 과감한 투자를 하는 미국이나, 원자력 발전소 400개 정도의 신재생 에너지 발전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들 신산업 분야에 투입하는 물량과 규모를 보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지 암담해 진다. 

 

내수는 계속해서 침체되고 있고, 정부의 경제 정책과 달리 중소기업들은 계속 파산과 폐업을 반복하고 있다. 보수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보도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을 기성 언론들이 이제 와서 들추어내면서, 마치 출범한지 1년도 않 된 새 정부의 탓인 듯이 공격하고 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그래도 다행인 것은, 또 한 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없이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꽤 잘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인사들을 발탁하고 중용한다거나, 여러 정부 부처의 업무 보고를 전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방식 등은 그 동안 민주당 정권들이 가지지 못했던 실용주의에 입각한 과감한 추진력과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 국민들은 그 속에서 유능한 정부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이제 이러한 방식을 경제 분야를 비롯하여, 그 동안 낙후되고 침체되어 있었던 우리나라의 여러 분야에 확대하고 도입해야 한다. 

 

지난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지급된 재난지원금을 필두로 어려운 시기에 단비 같이 작용했던 민생 회복 지원금을 지급했던 것과 같이, 과감하고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통해 우리 경제의 각 분야에서 다시 한 번 재도약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수 회복을 위한 여러 정책들을 시작하면서, 부자 감세와 같이 지난 정부가 저질러 놓은 과오들을 바로 잡기 위한 본격적인 개혁들도 시작해야 한다. 

 

올해 하반기에는 어렵고 힘들었던 검찰 개혁이 한 단계 마무리될 것이다.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검찰 개혁만으로 우리 국민들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교육, 의료, 주택가격 안정화와 주거 보장의 문제, 복지 확대, 노인 돌봄, 고령화 문제, 신성장 동력의 발굴과 육성,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과 역할 분담,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과 국토의 효율적 활용 등 다수 국민들의 삶과 직결된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 국민들은 단순히 고난을 극복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뒷걸음쳤던 지난 3년의 시간들을 다시 한 번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 보자. 안타깝고 답답했던 지난 시간들을 냉정히 분석하고, 반성해 보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그 냥 흘러 보내 버린 시간들이다. 지금이라도 무엇을 챙기지 못하고 지내왔는지 돌아보고, 살펴보자, 시간이 없어서, 또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도 살펴보자. 새롭게 시작된 2026년을 1보 후퇴했던 시간을 2보 전진하는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가자.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편집국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Copyright @2012 M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



회사명 (주)방송문화미디어텍|사업자등록번호 107-87-61615 | 등록번호 서울 아02902 | 등록/발행일 2012.06.20 발행인/편집인 : 조재성 |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2길 4. 5층 | 전화 02-6672-0310 | 팩스 02-6499-0311 M이코노미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무단복제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