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의 부상, 더 이상 주변 변수 아니다

  • 등록 2026.02.17 23: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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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정치가 익숙한 양상으로 돌아왔다. 미국, 중국, 러시아는 지역, 무역로, 정치적 동맹에 대한 특권적 주장을 다시금 내세우고 있으며, 종종 냉전 이후 시대를 규정해야 했던 법적 제약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강요된 위계질서에 의해 형성된 국가들, 이를테면 인도, 브라질과 같은 국가들은 다양한 수준의 점령, 지배, 또는 외부의 제약을 경험해 왔다. 이들 국가는 통치 방식, 안보 문제, 개발 전략에서 깊은 분열을 겪고 있지만, 지배와 저항이라는 공통된 역사를 통해 다져진 정치적 문법을 공유하고 있다. 이 문법은 힘들게 쟁취한 자산이며,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들은 필사적으로 지켜내려고 할 것이다.

 

대륙을 넘나들며 동맹을 맺기보다는 양다리를 걸치고, 확고한 결단을 내리기보다는 상황을 살피고, 굴복하기보다는 거래적인 방식으로 협상하려 할 것이다. 또한, 무역을 다변화하고, 자금 흐름을 바꾸고, 대안적인 파트너를 발굴하며, 선택의 폭을 넓히고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리라.

 

이들에게는 공급망, 결제 시스템, 에너지 흐름, 데이터 네트워크, 식량 시장 등 모든 요소가 압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차기 세계 질서는 아마도 안정적인 강대국 연합이나 세계가 대립하는 진영으로 깔끔하게 나뉜 모습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오히려 더 거칠고, 즉흥적이며, 경쟁이 치열한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다.

 

강대국들이 경계를 그으려 애쓰는 한편, 과거의 위계질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 국가가 끊임없이 그 경계를 시험하고, 변형시키고, 재협상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무대에 오르되 단독 주연이 아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 무대에 설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적다. 다만 그 방식은 기존 패권국과 다르다. 중국은 군사력보다는 경제력, 기술력, 인프라 투자와 금융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해 왔다.

 

다만 중국 역시 내부적으로는 인구 감소, 부동산 위기, 성장 둔화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부상은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기보다는, 기존 질서를 계속 흔드는 결정적 변수에 가깝다. 이는 세계가 하나의 중심을 갖기보다는 여러 축이 충돌하는 상태로 장기간 머물 가능성을 시사한다.

 

18세기에 중국과 러시아는 근시안적으로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애썼고, 영국은 증기기관을 완성하며 세기의 승자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분할에 몰두하는 동안 미국은 전력화와 대량 생산을 발명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통치하고 그린란드를 차지하려 애쓰면서 스스로 주의를 분산시킬 위험에 처해 있는 반면에 중국은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에서부터 양자 컴퓨팅과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미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의 경제 규모는 구매력 기준으로 이미 미국의 약 30%에 달하며, 산업 기반과 발전량은 각각 두 배에 이른다. 전기 자동차와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 미국은 항생제부터 희토류 광물까지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니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한다고 해서 눈앞의 현실을 크게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서반구는 세계 인구에서 약 13%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제조업 생산 능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을 우선시하고 아시아에 대한 자원 투입이 감소한다면, 이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지역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선택일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막대한 규모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내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해외에서 "동맹 규모"를 구축함으로써 미국의 파트너 국가들의 집단적 힘을 활용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서반구에 대한 "미국 우선주의" 집착은 이러한 노력을 복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강탈하려는 것은 나토를 분열시키고 유럽을 중국에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혼돈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전문가들의 전망이 가장 냉혹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앞으로의 세계는 점차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보다, 혼돈이 상수가 되는 시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규칙은 약해지고, 위기는 잦아지며, 충돌은 국지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사람은 똑같은 미래가 반복되는 것에 싫증을 느꼈다. 빠르게 움직이고 기존 질서를 부수거나, 적어도 뒤흔드는 걸 대담하고 급진적이며 참신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익숙해져 버린, 돌이켜보면 안일함에 빠질 정도로 익숙해진 국제 질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다음엔 트럼프 미 대통령이 또 다른 국가 원수를 억류하라고 명령할까? 또 다른 러시아 국적 유조선을 나포할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을 중국 본토와 재통일할 때가 왔다고 결정할까? 우리는 이른바 급진적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전 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과도기에 있지만, 앞으로 무엇이 올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 않고 곧 새로운 정상 상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한 유권자, 무역 전쟁, 인공지능(그리고 그에 따른 투자 거품), 고령화, 지구 온난화 등 너무나 많은 파괴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우리는 의사결정권자들의 변덕에 무척 취약하다.

 

기념비를 세우는 데는 열심이지만 국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번영을 가져다주는 데는 서툰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항상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게 해주는 측근들로 둘러싸인 고립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대부분 지표에서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의 지도자이지만 국내외에서 권력 행사를 즐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생각해 보시라.

 

대만과 태평양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 국경을 따라 형성된 인도와 중국의 충돌,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의 동부 국경에서의 충돌 등등 전쟁은 우연히 시작될 수 있지만, 일단 시작되면 통제하거나 끝내기가 어렵고, 마치 산불처럼 모든 걸 집어삼킬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하나

 

한국은 에너지와 자원을 거의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이며, 무역 의존도가 높은 전형적인 개방 경제다. 세계 질서가 흔들릴수록 한국 경제는 그 진동을 증폭된 형태로 받아왔다.

 

에너지 전환 경쟁은 한국 산업의 명암을 동시에 드러낸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조선과 같은 분야에서는 기회가 열리지만, 에너지 가격 변동과 공급망 재편은 제조업 전반의 비용 구조를 위협한다. 미·중 갈등은 ‘선택의 문제’를 한국 앞에 던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리스크로 돌아올 것이다.

 

특히 기술 표준, 공급망, 안보와 산업 정책이 한 덩어리로 묶이는 시대에 한국 경제는 보다 명확한 방향성과 내부 체력을 요구받고 있다. 성장률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회복력이고,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혼돈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불안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혼돈을 단순한 위기의 연속으로만 보지 않고, 무엇이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규칙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원칙을 세울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가를 것이다.


윤영무 본부장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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