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벌써 한 해를 넘기고 있다. 초기의 혼란과 혼선을 바로잡고 개혁 작업을 본격 시동할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개혁은 신속해야 하고 초점에 집중해야 한다.
어느 나라나 개혁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영국도,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손을 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인간과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 힘겨운 개혁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들이 개혁에 실패하고 성공하는 나라는 드문가. 첫째 개혁의 개념과 방향을 잘못 잡고 둘째, 개혁 과제들을 상품 구매 목록처럼 나열하다가 한두 과제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과 교육, 연금 등 세 개 과제를 들고 있는데, 사실 두 개만 해도 쉽지 않다. 과제가 많으면 개혁 자체가 물 건너 갈 수 있다. 개혁 과제가 많으면 곳곳을 들쑤셔서 상대할 ‘적군들’의 숫자를 늘리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개혁과제라고 건드렸다간 정권 중반기에 윤정부가 만인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
역대 정부 때마다 단골 개혁 메뉴에 들어가는 것이 교육이다. 그러나 교육만큼 범위가 넓고 애매한 것이 없다. 교육이 문제라고 하면서 모두 제도 탓, 선생 탓, 교육당국 탓, 정부 탓, 여당 탓을 한다. 그리곤 엄청나게 예산을 늘리고 특별세까지 만든다.
한국이 평균적인 교육 덕택에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지금도 그 덕을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인이나 기성세대나 그 영향을 받는 청년 세대조차도 ‘대학 가면 팔자 고칠 수 있다’는 낡은 관념에 젖어 있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가 지식과 기술수준이 아주 낮았던 시절에는 그 말이 타당했지만 지금은 전혀 먼 얘기다.
교육과 (직업)훈련은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학교에서의 ‘교육’과 직장에서 필요한 ‘훈련’은 ‘교육’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다. 교육은 보편적 지식과 기초적이고 좀 더 포괄적인 기술의 전달을 의미한다고 하면 훈련은 특정한 작업에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과 매뉴얼의 이해와 초보적인 업무 및 작업 수행을 말한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아무리 우수한 성적을 거둔 4년제 대학과 전문대 졸업생이라고 해도 직장에 새로 입사해서는 새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공과대학과 공업전문대를 나와서 전공에 맞는 직장을 선택했다고 해도 기초적인 이해도에선 나을지 모르지만 직업 전선의 현장 작업에 필요한 업무와 매뉴얼, 노하우는 직장에서 훈련 받고 숙지하고 능숙해지는 연수가 필요한 것이다.
현상이 이러함에도 국가 경쟁력=교육이란 전제 아래 교육부 예산을 대폭 늘려주면 교육부 예산은 ‘넘치는데’ 직업 및 직장 훈련비는 늘 궁핍한 빈혈 상태에 허덕인다. 기술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훈련원 같은 곳도 필요하지만 사실 개별 직장별, 대·중·소기업마다 각각 자신들의 요청에 맞는 훈련이 필요하다.
또 교육과 연구도 다르다. 교수는 연구가 본업이고, 교육은 부수적인 일이다. 교수가 가르치는 일이 주 업무이고 연구가 부수적인 것이 되면 곤란해진다. 4년제 대학은 반드시 대학원 중심 대학이 되고 모든 교수들은 논문을 쓰는 연구자로서 역할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한국 4년제 대학은 개편돼야 한다. 대학이 연구중심이 돼야 노벨 수상자도 나오고 산업 현장에 필요한 원천기술도 개발해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한국 대학은 예산지원보다 더 중요한 시스템 개혁의 필요성을 알게 해주는 포인트다. 기술개발도 당연히 대학과 국책연구원에서만 이뤄지는 건 불가능하고 크고 작은 기업과 기관마다 개발연구원을 두고 개발해야만 기술경쟁력이 높아진다. 산업에 필요한 기술은 산업 현장에서 절박하게 ‘헝그리’ 하게 필요해야 개발된다. 그런 점에서 기업 연구소가 산업경쟁력에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교육과 훈련, 원천기술, 응용기술, 제품 기술, 서비스 기술이 각각 다른 것임에도 ‘교육’이란 느슨한 카테고리에 넣어버리는 바람에 어떤 곳은 예산이 줄줄 새고 어떤 곳은 추운 겨울밤에 오들오들 떨면서 홑이불로 겨울을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인구대비 세계1위의 연구예산을 배정하는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은 세심하고 전문적인 식견과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 과제 선택과 추진, 점검은 모두 대통령이 직접 해야
각 부처에다가 개혁과제를 올리라고 하면 통상적인 과제를 개혁과제인 양 백화점 목록처럼 올린다. 여당에 개혁과제를 마련하라고 하면 유력 정치인들과 가깝고 선거 때 기여한 폴리페셔들이 특정 기득권의 이해가 반영된 아이템을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것들이 참고로는 필요하지만 개혁 과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많다.
개혁 과제란 예산 지원 부족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개혁과제는 시급한 것이며 묵은 관습, 관행, 시스템 장애와 같은 것이며 무엇보다 그간 정치인들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꺼려하기도 해서 안 하려고 했던 것이 진정한 개혁과제다. 개혁과제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면 다 알지만 입에조차 거론하지 않은 성격의 일이다. 개혁과제는 임명직 장관은 할 수 없으며 하물며 공무원들은 엄두도 못내는 일인데 그들도 그것이 개혁이 시급한 것임을 잘 아는 일이다.
그러므로 개혁과제는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 개혁과제를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게 하자는 말이며, 교육개혁하자고 하면 실패가 뻔하다. 단연코 시급한 제1 개혁 과제는 노동개혁이다. 그 다음은 연금개혁이다. 예산이 필요하고 무슨 부처를 신설한다거나 청에서 부처를 승격시키자고 하거나 부총리급으로 직급을 올리자고 하는 것은 개혁이 아니고 예산 타 먹자는 수작에 가깝다.
개혁 과제는 예산과 정부 조직 확대개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더욱이 예산 지원과는 다른 성격의 일이다. 개혁 과제는 결단의 문제이며 그것이 실행되고 일정한 성과만 내면 후세의 평가는 물론이고 당대에도 크게 칭송을 받을 수 있다.
개혁과제가 선정되면 디테일을 아는 전문가는 늘려 있다. 개별 분야의 디테일을 잘 알고 해당 영역의 개혁 과제까지 꿰뚫고 있는 전문가들은 곳곳에 있다. 눈을 크게 뜨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노동 개혁은 왜 필요하고 어떤 방향이 바람직한가
정부가 거대 노조의 불투명한 회계처리 문제와 채용 비리에 대해 메스를 대겠다는 방향성에 대해선 적극 지지를 보내고 싶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 해소 등 노동개혁을 내년 하반기에 착수할 거라고 하는데 상반기에 해야지 하반기에 한다는 말에 불안감이 든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노동개혁 한다고 말을 꺼내놓고 시행 시기를 늦추면 못하게 될 공산이 크다. 지금까지 역대 정권들이 그랬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한국 대기업의 이른바 귀족노조가 뿌리 뽑아야 할 ‘악의 축’은 아니다. 한국 대기업 노조들이 있었기에 든든한 제조업 기반이 국내에 남게 된 긍정적 면이 있었음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주요 결정을 기업가와 경제 관료들에게만 의존해선 안 된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쌀 수입을 자유화 하자’, ‘스크린쿼터 철폐하자’는 주장들이 있었다. 만약 그때 그런 자유주의적 비교우위론을 따랐다면 쌀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오늘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K-영화가 가능하겠는가.
예전에는 미국과 유럽,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하고 그들의 제도와 시스템을 무조건 벤치마킹하면 됐다. 그 나라에 유학 갔다 온 교수들이 그 나라의 제도와 시스템, 관행까지도 국내에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곤 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아주 피상적으로 아는 지식을 가지고 선거 공약이나 개혁과제에 포함시키고 실제로 정책으로 만들려는 굉장히 위험한 시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선진국으로부터 배우지 말아야 할 점은 ‘고용 불안정성’인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선 글로벌 테크 기업들의 해고 선풍이 불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해고를 쉽게 할 수 있으므로 경기가 좋아지거나 기업 사정이 호전되면 고용을 즉각적으로 늘리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선 고용 불안정성을 항상 안고 있으며 회사가 어려울 때 노사가 함께 헤쳐 나가고자 하는 공동체 의식은 희박하다.
쉬운 해고가 이뤄지면 기업에 기술이 내재화되지 못하게 되고 이에 따라 필요한 기술자들을 구하려면 많은 연봉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고용이 안정되면 기업은 기술을 내재화할 수 있으므로 종업원들에게 직업훈련을 제공하여 더욱 제조 및 생산경쟁력을 높일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있다.
한국 기업들의 노사는 그간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용 안정성을 지켜왔다. 올해 세계적인 불황이 닥칠 거라고 국제경제 전문기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예고하고 있다. 힘들고 앞이 안 보이는 불황이야말로 노사가 한 몸처럼 대처해야, 위기 극복은 물론이고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노동자들의 협력 없이 기업 경영자 혼자서, 정부가 아무리 지원한다고 해도 불황 타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 기업들로부터 본받아야 할 점은 ‘공정성’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한국의 직장들은 공정성을 강하게 가져가야 할 때에 이르렀다고 본다.
고용안정 속에서 공정한 룰, 공정한 보상을 실현할 때 종업원들의 생산성과 전문성은 동시에 향상된다. 연공서열,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은 소멸돼야 한다. 회사가 필요한 전문성을 가진 노동자들은 정년을 거론할 필요 없이 본인의사에 따라 평생고용이 실현되는 관행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한국 직장에서 연공서열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팀장이나 부장에게 권력을 주고 팀원들보다 높은 임금을 주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팀장과 부장도 팀원과 동일한 기준으로 일 퍼포먼스에 따라 임금과 성과급을 주는 방식을 택한다. 다만 팀장 또는 부장으로서 업무수당을 주되 그것이 과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팀원들이 팀장이나 부장으로 굳이 승진하려는 동기를 갖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좋고 회사에도 좋은 제도다.
아울러 계약직, 시간별 근무, 요일별 근무제, 프리랜서 등 다양한 고용 방식이 하루빨리 시행돼야 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근무자들에게도 정규직 직원들과 비교해 공정하게 대우를 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급속히 심화되는 일자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