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뿌리 3.1 운동

  • 등록 2024.02.27 08: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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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36)

조선은 근본적으로 왕이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는 전제왕권체제이다. 조선은 일본과 서구열강의 체제를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의 길을 내디뎌야 했지만, 군주가 권력을 백성들과 공유한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아마도 조선왕조가 멸망하지 않았으면 미국식 공치제는커녕 영국식 입헌군주제까지도 갔을까에 대해 의심스럽다. 입헌군주제도 한참 뒤에나 이뤄졌을 것 같다.

 

 

개화파 대신들은 감히 군민 공치지는 감히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러워 했고, 고종은 권력을 공유한다는 관념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종은 대신들과도 국론을 의논할 상대였지, 그들에게 권력을 나누고 공동책임을 진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왕 현종 저)」에 따르면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은 전제 군주제를 기반으로 행정과 입법, 사법제도의 삼권분립이 가능하나, 의회제 도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개화파 고위 관료였던 김윤식도 민주정보다 군민공치가 더 낫다고 하면서도 기존의 군주제 아래서도 군주의 결단만 있으면 군민공치제와 유사한 정치 운영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했다. 김윤식은 ‘체제’와 ‘정치 운영’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고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의도도 읽히는 부분이다.

 

「서유견문」을 쓴 개화파 지도자인 유길준은 의회제도는 정책의 신속한 결정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봤으며 법률의 제정은 군주권에 속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유길준은 다른 나라의 좋은 정체를 본받기 전에 인민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인민의 입법권 참여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다만 공직 참여의 범위를 양민에게도 허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조선왕조의 왕과 대신들의 생각이 전통적인 조선왕조 국가 체제 내의 개혁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역사상 사례를 보면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고종과 대신들의 개혁관을 일방적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체제를 바꿨으나 천황제를 존치했다. 유럽 대륙은 프랑스와 독일, 이태리와 같이 혁명이나 패전을 겪지 않는 나라에선 형식적으로나마 왕조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청나라 말기에 양계초 등에 의해 청 왕조를 유지한 채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가 여의치 않자, 중국민은 신해혁명으로 왕조를 해체하는 선택을 했다.

 

고종은 대원군의 집정기간을 합해 47년간 왕위에 있었다. 나름 대미 외교와 대러 외교를 펼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을 천후해 대일 항거 의병을 돕기도 하면서 분투한 면이 있으나 나라를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을사늑약 당시, 대신들에게 논의를 미루기만 하고 이토 히로부미와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대신이 늑약에 찬성했다. 최종 결정권자인 고종의 재가를 받지 못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다수결로 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고종은 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했으나 열강들은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 백성들은 왕과 대신들의 무능과 배신행위, 졸렬함에 새로운 체제의 꿈을 가지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1919년 3월 1일 이전 10년간 세계정세는 급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에 행운만 안겨주고 조선 민족에게는 불행한 일만 안겨주던 시대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이자 일본도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산둥반도에 상륙하고 독일의 거점인 칭타오를 함락했다. 그다음 해 일본은 산둥반도의 독일 이권과 남만주철도와 안평철도의 사용기한 연장 등 무리한 조건을 담은 요구를 중국에 강요했다. 일본의 야욕을 목격한 미국은 이때부터 일본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을 편들었던 미국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미국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일본이 태평양과 아시아에서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시아라는 ‘먹잇감’을 한참 뜯어먹고 있던 기간에는 서로 협조하기도 했으나 유럽 열감들이 독일 제국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하는 사이에 일본이 아시아를 독식하고 태평양을 위협하자 미국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이 시기 일본의 조선 통치는 다른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통치방식에 비해서 혹독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3.1운동을 일으키게 만든 직접적인 도화선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관망하던 윌슨 대통령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영국 배에 타고 있던 자국인들이 많이 죽게 되자. 마침내 연합국 편에 서서 1917년 4월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 참전으로 전세는 연합국으로 기울어졌다.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종전 후 새로운 평화 질서를 제안하는 「평화 14개 조항」을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밝혔다. 곧이어 나온 「2월 평화정착을 위한 4대 원칙」에서는 제국들의 지배 아래 있는 민족들의 독립을 강조하는 의사를 피력했다. 윌슨의 소식을 들은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을 향한 간절한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3.1운동, 세계사에서 드문 자발적 평화 시위

 

3.1운동은 미국과 중국, 연해주, 도쿄에서의 ‘독립선언’에 자극받아 천도교와 기독교인들이 주동하고 학생들과 노동자, 시민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월 1일 만세 시위는 서울과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7개 도시에서 맨 먼저 일어났다.

 

1919년 그해 1월 21일 아침 비운의 왕인 고종이 승하했다. 고종의 장례 일이 3월 3일로 잡혔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50만 명 정도가 서울 일대에 모여 있었다.

 

민족대표 33인들이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경에 연락해 자진해서 체포됐다. 탑골 공원에서 경신중학교 학생 정재용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에 맞춰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삼창을 불렀다. 시위대는 종로 거리를 누비다가 경운궁 대한문 앞에선 여러 거리에서 모인 시민들과 합세해 독립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는 3월 1일 그날, 500여 명의 시민이 악대까지 앞세우며 시가행진을 했다. 2천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자 일경은 소방부들과 재향군인회를 동원하여 해산시키려고 했다. 집계에 따르면 두 달여 진행된 3.1운동 평화 시위는 1천200회 이상, 참가 인원은 100여만 명에 이르렀다.

 

3.1 운동 이후 새로운 지도 세력의 등장

 

고종 치세 아래에서의 국정 주도 세력은 고종과 대신 및 과거에 급제한 관료들,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유림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의병으로 참여하는 것 외에는 국정에 참여할 수 없는 전제군주체제였다. 이들이 국정을 주도하다가 결국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승렬 씨가 저술한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에 따르면 3.1운동 주도 세력은 3.1운동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구한국 고위 관리 중에서 명망 있는 인사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우고자 5명을 접촉했다. 최린은 한규설을 만나고, 최남선은 윤용구와 윤치호, 김윤식을, 송진우는 박영효를 찾았다. 이들 다섯 명은 한사코 참여를 거절했다. 이들 중 일부만이라도 민족대표를 수락하였더라면 아마도 민족대표 33인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 성격이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민족대표 33인의 대다수가 천도교와 기독교로 구성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변화였다. 이전 체제였으면 민족운동의 주도 세력 중의 하나로 ‘감히’ 행세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됐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자유와 신분 차별 철폐 등 평등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다수가 친일로 변절하기도 한 바 있지만, 이들이 주동한 3.1운동은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에서 소중한 씨앗이 됐다.

 

3.1운동의 선언서를 지금도 읽어보면 이렇게 고상하고 수준 높은 독립선언서가 인류 역사상 더 있을까 싶다.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를 꼼꼼히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샘하여 쫓아내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 배들이 부귀공명의 희생이 되어 압제와 수탈에 빠진 이 비참한 상태를 바르게 고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하고 인간다운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맙시다.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에서 인용)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 주도 세력은 자국의 부국강병이란 목표만 성스럽고 타국의 권리와 순수한 이치와 감정은 힘으로 억압하고 말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야만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식민지 지도자들은 1919년 3.1운동에 이르러 마침내 자유의 귀중함을 몸으로 용기 있게 나타내고, 한민족의 자기 성찰력과 고상한 품성이 전혀 훼손되지 않았음을 독립선언서에서 읽을 수 있다. 조선 민족이 결국 독립할 것이며 일본 군국주의는 멸망의 길로 들어갈 것은 독립선언서와 폭압적인 식민통치에서 볼 때, 예견된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에 힘입어 결성된 그해 상해임시정부는 군주정체를 완전히 결별하고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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