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퇴비와 가짜 퇴비, 냄새로 구분하다
과연!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직원의 말대로다. 덤프트럭 수천 대 분의 흙으로 메워 새로 만들었다는 2천여 평의 강변 잡종지는 시커멓거나 갈색을 띤 가축분뇨 퇴비를 여기저기에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 어쩌지, 저건 아닌데...” 나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오로지 식물성 퇴비, 그러니까 잡초 퇴비를 넣어 이곳 흙을 낙엽이 썩어 만들어진 부엽토 상태가 되도록 하려고 했었는데 이미 흙 바닥에 뿌려진. 가축분뇨 거름을 회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망한 내가 한동안 멍하니 앞쪽만 바라보고 있는데 눈치를 챈 우즈베키스탄 출신 직원이 살그머니 내게 물었다.
“저 퇴비 40만 원을 주고 사장님이 사서 뿌리라고 해서요. 거름을 먼저 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잖아요....”
“맞습니다. 오키(직원 이름) 씨가 잘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퇴비를 줘야 농사를 짓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오키씨가 뿌린 가축 분뇨 퇴비는 100% 발효가 되지 않은 불량품이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포대마다 인증 도장을 받은 것인데요.” 다른 직원이 나서면서 말했다. “그런데 발효가 안 됐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죠?”
내가 말했다. “퇴비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제대로 완숙된 퇴비에선 향기로운 흙냄새가 납니다. 발효가 제대로 되지 않는 퇴비에선 지금 이 퇴비에서처럼 분뇨 냄새가 납니다. 이건 발효가 덜 됐다는 뜻이지요.”
직원들이 눈을 말똥거리면서 퇴비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그러자 또 다른 직원이 물었다.
“완숙이 안 된 퇴비를 쓰면 왜 안 되는 거지요? 흙에 들어 가면 다 좋은 거름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뇨. 그건 독입니다. 완숙이 안 된 퇴비를 흙 속에 넣으면 흙 속에서 계속 발효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가스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가스 냄새를 맡고 모여든 온갖 해충들이 들끓게 되어 식물이 피해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퇴비를 쓰면 병충해 때문에 반드시 농약을 치게 되어 있지요. 농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인분 냄새를 시골 냄새라고 치부하는 소리가 얼마나 잘못된 말인지 그들에게 설명했다.
“인분 냄새가 난다는 것은 제대로 발효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밭에 거름으로 주는 발효되지 않은 인분은 모든 식물을 죽이는 독입니다. 그런 독이 따로 없습니다. 건강에 해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어느 나라나 인분을 농사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요.”
우리 조상들은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농부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충분히 발효시켜 사용했을 뿐이다. 우리나라 흙은 산성을 띠는 화강암이 부서져 만들어 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식물성 퇴비를 주지 않으면 농사짓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의 조상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산성흙은 비료 성분이 적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대신 미량요소 흡수량이 많아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흙에서 자란 농산물은 맛이 좋고 약효성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똑같은 인삼이라도 고려인삼이 약성을 갖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여름철 장마와 가을 태풍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우리나라는 그 빗물이 흙 속의 비료 성분을 녹여 씻어내려 보내는 용탈(溶脫) 현상이 심해 농경지의 흙은 자연 산성을 띄게 되었으니 퇴비를 주지 않고서는 대대손손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퇴비를 통해 완벽한 영양소를 공급받으면 자라던 우리나라 농산물은 인공비료와 농약이 도입되는 관행농업이 시작되면서 식물성 퇴비의 존재가치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그에 따라 흙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식물의 맛과 영양소가 예전 같지 않아졌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식물성 퇴비 농사를 복원하려고 시도했지만, 농촌의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이마저도 포기한 상태”라고 말을 끝내자, 그들은 이제 이해를 하겠다는듯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H 사장의 직원들과 함께 새로 조성된 밭 가운데로 들어가 흙의 상태를 알아보는데 퇴비에서 나오는 퀴퀴한 가축 분뇨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퇴비에서는 흙냄새가 나야 정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직원들 역시 퇴비를 한 줌 들고 냄새를 맡아 보다가 실망스럽다면서 바닥에 버렸다.
◇조선 실학의 집대성자, 풍석 서유구가 추천한 퇴비는?
“여기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파주시 금촌동인데 그곳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조선시대 백과사전격인 방대한 분량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를 저술한 풍 석(楓石) 서유구(徐有榘,176 4년~18 45년 )라는 분이 살았어요 .”
내가 갑자기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로 서유구라는 사람을 소개하려 하자 직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농업 학자인 서유구라는 사람을 알 턱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서유구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고관대작을 역임한 조선 최고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지요. 1790년(정조14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요. 그런데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숙부인 서형수가 동기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정계에서 축출당하자 1806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아들과 함께 그곳으로 낙향 했고, 이후 18년간 직접 농사 를 지으면서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토대로 《임원경제지》를 썼습니다.
깨 농사와 저술을 돕던 아들이 갑자기 33살에 사망하자 절망한 그는, 임원경제지 원고를 내던지면서 이 책이 아들을 죽였다고 저술을 포기하려 했었지요. 그러나 환갑의 나이에 관직에 다시 복귀해 전라 관찰사와 중앙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남양주 두릉에서 시봉(侍奉)이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82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과 퇴비가 무슨 관계지요?” 직원 하나가 불쑥 질문을 던지며 끼어들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퇴비 제조법을 정확하게 정리한 분입니다. 저도 그분을 몰랐다가 몇 년 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실학박물관에 갔을 때 2층 전시장 구석에 그 분의 초상화와 전기(傳記)가 있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분이 다산 정약용과 쌍벽을 이루던 조선의 실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서 직접 농사를 짓고 책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제가 아무리 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다녀도 다들 한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보내 버려 답답했는데 드디어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스승을 찾은 기분이었지요.” 나는 그들에게 솔직하게 그가 퇴비 만들기의 하나로 소개한 ‘훈증법’에 따라 팥 농사를 지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들풀을 발효시켜 만든 훈증 퇴비란?
“훈증법이라고요?” 또 다른 직원이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훈 증법의 훈(薰)은 ‘향이 나는 풀’이라는 뜻이고 증(蒸)은 ‘찐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풀을 차곡차곡 쌓고 중간중간에 인분 혹은 가축 분을 깔고 물을 뿌려 발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옆을 짚으로 둘러 묶고 지붕을 만들어 공기가 통하도록 하면서 3~4개월 간 숙성시키지요. 발효되는 과정에서 60~70도의 열이 발생하는데 이 열로 인해 퇴비 안에 있던 기생충이나 해충이 모두 박멸이 됩니다. 퇴비가 완성됐을 때 손으로 쥐어 퇴비 냄새를 맡아보면 은은한 흙냄새가 납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듣자, 나는 어렸을 때 대문 밖에 있던 우리 집 퇴비장이 떠올랐다.
“100% 훈증법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 우리집 대문 밖에 퇴비장이 있었어요. 찬 이슬이 내리는 늦가을에 퇴비장에서 이른 아침이면 김이 모락모락 났어요. 홍어를 그 퇴비에 넣어 삭혔던 일도 있었고요. 이듬해 그 퇴비를 지게로 퍼 논이나 밭에 퍼 나를 때 악취가 아니라 은은한 흙냄새가 났었지요.”
퇴비에서 흙냄새가 나는 것은 풀이 흙에서 자란 것이라 풀로 만든 퇴비에선 당연히 흙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풀을 다시 흙으로 돌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조상들이 전승해준 지속 가능한 자연 환농법이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퇴비를 통해 흙을 살리며 지속 가능한 농사를 수천 년 간 대대손손 지어오고 물려주고 했던 것이었다.
◇미 아웃도어 기업 「파타고니아」 창업주가 감탄한 조선의 지속 가능한 농업
1960년대 주한 미군으로 근무하던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업주, 이본 쉬나르(83살)는 북한산 암벽등반을 자주 했었는데 어느 날 암벽 아래를 내려 보다가 논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고 이상한 호기심이 생겼다.
“한국 농부들은 미국의 농부들처럼 인공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도 손바닥만 땅뙤기에서 어떻게 수천 년 간 변함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그것은 “식물성 퇴비농사였다”고 자서전에서 밝히면서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짓는 한국 농부의 농법이 ‘파타고니아’가 친환경 기업이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쉬나르는 최근 자신을 비롯한 일가가 소유한 30억 달러(약 4조 2000억 원)에 달하는 ‘파타고니아’의 소유권을 환경 단체와 비영리 재단에 넘겼다. 그러면서 그는 “소수의 부자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난한 사람으로 귀결되는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형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키(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직원 이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 지금 여기에 팥을 심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다른 곳을 찾아봐야지요. 팥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콩처럼 뿌리에 공생하는 뿌리혹박 테리아가 질소 비료분을 자체적으로 공급하니까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편입니다. 그리고 빛을 적게 받아도 괜찮기 때문에 다른 작물 중간에 심기도 하는데 산자락에 언저리에 심어보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지금 심을까요?” 한 직원이 물었다.
“아뇨, 팥은 보통 6∼7월에 심어 9∼10월에 수확하니까 5월에 심는 것은 이르지 않을까요? 그럼, 말이죠. 이렇게 합시다. 산자락 주변의 풀을 베어내고 그곳에 팥을 심고, 베어낸 풀을 가지고 완벽한 식물성 퇴비로 만들어 내년에 팥밭을 만들어 봅시다. 어때요? 제 생각이 너무 낭만적인가요?” 내 말에 긴가민가하면서 직원들은 “거기에 팥을 심어서 팥 씨앗 값이나 건지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반론을 제기했다. “어차피 팥은 꼬투리마다 익는 시기가 달라서 한 번에 수확할 수 없고, 그래서 기계화도 어려운 작물입니다. 수확량도 일반 콩에 비해 낮고요. 하지만 산자락 주변만 잘 활용해도 이곳에서 만들 잡곡밥, 떡고물, 빙과류, 찐빵, 황남 빵, 호두과자, 단팥빵, 붕어빵 등에 들어갈 양은 충분히 나올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 산자락 주변 풀을 베어 그 풀로 퇴비장부터 만들어 놓읍시다.”
그러자 직원들이 내 말에 동의하고 예초기와 낫을 가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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