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의 이단아인 스피노자(1632~1677)는 23살 때 ‘신을 다르게 이해한다’는 이유로 암스테르담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을 당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지 않고 조용히 현미경과 망원경용 유리 렌즈를 갈아 만드는 일을 하며 철학 연구에 전념했는데 아쉽게도 1677년 2월 21일 44살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작 《에티카》는 그가 죽은 뒤 친구들이 원고를 정리해 출판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떤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나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답했다. 우주의 조화로운 법칙을 경외했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우주가 수학적 질서 속에서 필연적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할 때 전 세계를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실제로 그는 평생 스피노자를 존경했다.
물리학의 거인이 스피노자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는데 우리 가운데 과연 철학자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를 말하는 노자의 도덕경에 마음이 끌리고 있지만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뒤처지는 철학이 아닐까 싶어 선뜻 마음에 품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기도 전에 검색하고, 숙고하기 전에 화면을 위아래로 ‘스크롤’ 해야 하는 판이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늘 “누가 옳은가?”를 따지며 산다. 정치도, 판결도, 사회적 논쟁도 모두 옳고 그름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러나 철학은 옳고 그름을 즉각 판정해 주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질문은 느리지만 오래간다.
인공지능은 거기에 대해 많은 답을 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정해 줄 수는 없다. 오로지 철학적 사유만이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마침 여의도 앙카라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데 아름드리나무 줄기에 걸어놓은 현판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살아 있는 한 희망 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 그 짧은 문장들이 일흔을 넘긴 내 마음을 이상하게 건드렸다. 거창한 철학도 아니고, 깊은 논문도 아닌데, 새삼 깨닫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소변기 위에 붙여놓은 글귀도 마찬가지이리라. 지금도 그 짧은 글을 보고 누군가로 하여 극단적 선택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르고, 낙심한 마음을 돌려세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한 사람의 철학자를 ‘내 마음의 아이돌’처럼 품어보면 어떨까?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반복해 듣듯이 한 사상가의 문장이나 철학을 반복해 읽고 이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든, 몽테뉴든, 공자든, 장자든 누구면 어떠랴!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를 오래 붙들고 깊이 있게 탐구하다 보면, 어느새 내 인생의 스승으로 내 마음에 들어와 있으리니.
공자는 ‘7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고, 여전히 배울 게 많으며, 여전히 철학의 위안이 필요한 듯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에게 스피노자가 있었듯, 필자에게도 평생을 존경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생각의 근육을 다시 써서 스마트폰을 잠시 멈추고, 종이 위의 문장을 바라보며, 나만의 철학자 한 사람을 조용히 만나보고 싶다. 세상의 소음이 커질수록, 남은 생을 위해 마음속 기준은 더 또렷해야 하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