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역사를 논할 때 여전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과를 중심으로 한 정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보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정치부문에 비해 경제 부문은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1950년대 경제 부문에 대한 연구가 상당 부분 이뤄지고 있고 그간의 인식을 개선하는 연구도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인식이란 한국경제 발전의 출발점이 박정희 정부 시기가 아니라 그 이전
1950년대였다는 것이다.
김두얼 명지대 교수가 그의 저서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식민지기·1950년대·고도성장기」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펴는데, 상당히 일리 있는 논거를 제공하고 있다. 아랫글은 김두얼 교수의 저서와 한국 경제사에 대한 명저로 평가되는 고려대 이헌창 명예교수의 저서 「한국경제 통사」를 주로 참고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덧붙였다.
◇ 8.15 광복 이후와 전쟁, 그리고 1950년대 경제 발전
일제 식민지의 공업 자산이 광복 후 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궁금한 부분이다. 이헌창 교수는 「한국경제 통사」에서 식민지의 공업 자산이 있었지만, 해방과 분단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유실됐다고 말했다. 조선의 공업은 일본과 연계되어 있었는데, 해방으로 일제 제국주의 경제권이 와해되면서 타격을 받았다. 분단 상황은 남한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북한 지역이 훨씬 공업 발달이 돼 있었으나 남한 쪽은 보잘것없었다. 6·25전 쟁 때 북한군이 남한으로 내려와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그나마 빈약한 공업 시설이 남아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규모가 큰 귀속기업체를 중심으로 제조업의 전쟁 피해 상황 조사에 따르면 1951년 8월 말 건물의 44%, 시설의 42%가 파괴되었고, 사회 간접자본의 32%가 못쓰게 됐다.
일본 강점기 이공계 대학 졸업 출신은 400명, 전문학교 출신은 1,900명, 박사 학위 소지자는 10명 정도였다고 한다. 1946년 7월까지 경성제대 이학부와 공학부 졸업자는 모두 77명이었다고 「한국경제 통사」는 밝히고 있다. 기술자와 과학자의 숫자는 매우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8.15 직후 남한의 공업 생산은 1930년대 후반에 비해 절반 이하로 위축됐다고 한다.
이헌창 교수의 저술에 따르면,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장기 통계를 인용해 1946년 남한의 1인당 GDP는 해방 전 정점인 1941년 남한의 43%, 북한의 35%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겪었으니 남한의 경제 수준은 세계 최빈국에 속했다. 김두얼 교수는 저술에서 식민지 시기 높은 경제성장을 보였고 여러 가지 제도와 인적 자본이 형성돼 있었던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해방 이후 혼란과 전쟁은 한국을 최빈국 상태로 빠뜨렸음을 상기시켰다.
즉 한국은 1950년대 전반기 개발경제학에서 말하는 ‘가난의 덫’ 상태에서 외부의 원조와 도움을 받았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경제 안정화와 성장의 발판을 빠른 시기에 마련했다고
김두얼 교수는 평가했다.
◇ 농지 개혁의 성공
이헌창 교수는 “농지 개혁은 일본 강점기 농촌의 지배적 생산관계인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작농 체제를 확립하였던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그럼으로써 부와 소득의 분배 상태를 현저히 개선하고 농촌의 계급 갈등을 해소하였다”고 평가했다.
북한식으로 농지를 무상몰수하고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방식은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정부가 시간이 걸리고 다소 부작용이 있었다고 해도 유상으로 구매하고 분배하는 방식이 합리적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강제로 몰수하면 뺏긴 자의 마음에 한이 남는 것이고 무상으로 얻으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진심으로 경작을 하겠는가.
‘농지 개혁은 지주제를 해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부 지주가 농지 대신에 받은 지가 증권으로 귀속기업체를 구입하여 산업 자본으로 성장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기반을 조성하였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농지 개혁 후에 일시 소작제가 부활하는 듯했으나, 공업화 진전과 농민 개개인의 이농과 상속, 경제 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과거의 같은 형태의 소작제는 사라졌다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국내 산업 성장의 기반이 된 귀속 기업체 불하 정책
귀속기업체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 광산, 은행, 상점, 음식점, 여관 등을 말한다. 1947-8년 귀속 공장 수는 1500~2000개, 종업원 수는 10만 명 정도였다. 미 군정은 일본인 소유였던 농지, 도시 주택, 소규모 사업체를 1947년 3월부터 불하를 시작했다. 미 군정에 의해 불하된 귀속 기업체는 소규모인 까닭에 귀속 기업지 전체의 30%에 근접하지만, 금액으로는 0.5%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귀속 기업체의 대부분과 은행 등은 새로 수립된 정부에게 이양됐다.
미국은 귀속기업체 불하에 대해 자유기업 원리가 적용되기를 원했다. 당시 제헌헌법과 사회 여론은 사회주의적 이념이 강했는데 미국의 자유기업 원리의 적용 권고가 한국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속기업체 불하는 1963년 5월에 마무리됐다.
이 교수는 “(일본)제국주의 자본이 미 군정기에 국가자본으로 접수 관리됐다가 불하 조치로 인하여 한국인 민간자본으로 전환하면서 산업 자본이 성장하고 오늘날 자본가 층의 원류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귀속 기업체와 무관한 중소자본의 기업체와 대기업체들도 많 았기 때문에 귀속기업체 불하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이 교수의 지적에 동의한다. 경제 발전은 특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특혜가 오히려 해당 기업과 업종에 안주하여 결과적으로 쇠퇴의 원인이 되는 일이 실제로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귀속기업체 불하의 의미는 자유기업과 시장 자본주의의 원리를 정착시키는 방향성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아주 유리한 조건에 불하를 받았다고 해도 기업가의 경영 능력이 떨어지면 회사의 존립도 가능하지 않다.
◇경제 안정화에 도움을 준 미국 원조
1945년부터 1961년 미국으로 받은 원조액은 31여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의 경제원조는 남북 분단, 일본경제권과의 분리, 6.25 전쟁이란 온갖 악재에 노출된 한국경제를 살리고 안정화시킨 ‘생명줄’과 같았다. 이 교수는 저서에서 “1953-61년간 수입 총액 31억 달러 중에 공공원조에 의한 수입은 22억 달러로 71.6%였다. 당시 상업적 수출은 미약하고 유엔군에 대한 재화와 용역의 판매로부터 상당액의 외환 수입이 발생하였다. 원조는 경제 안정에 필요한 소비재와 농업에 필요한 비료, 그리고 공업화에 소요될 원자재와 생산수단을 도입하는 주된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 6·25전쟁 후 1950년대 제조업, 연평균 10%대 고성장
김두얼 교수 는 저서에서 1965년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10% 수준의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평균 5.3%의 성장률을 보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균 경제성장률 5.3%는 결코 낮은 수치가 이니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1950년대 전력 생산도 연평균 13.1%로 상승했으며 이 수치는 1960년대 전반의 전력생산 증가속도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헌창 교수도 「한국경제 통사」에서 “원조를 매개로 하는 국가의 특혜적인 지원과 저임금 노동력에 힘입어 공업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1953-61년간 제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1.5%여서 국제적으로 높은 편이었다.”고 밝혔다. 원조자금이 비료와 전력, 시멘트 등에 투입되는 바람에 중화학 공업이 경공업보다 빠르게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후반부터 대기업의 성장과 비중이 두드러졌다.
이승만 정부는 여러 가지 수단의 수입대체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내 경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교수가 정리한 구체적인 수입대체 공업화의 수단을 열거하면, 비료와 시멘트, 판유리 등 기초 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의 건설을 추진했다.
또 원조 물자의 실수요자 배정, 수입대체품목의 수입 금지와 양적 제한, 최종 소비재 수입품에 대한 고관세 부과, 원료와 원자재 수입품에 대한 낮은 관세 적용, 자본재와 원료의 수입에 대해서는 유리한 환율을, 최종 소비재에 대해서는 불리한 환율을 적용했다. 외자 대출과 국내 자본의 융자에서도 국내 공업의 육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기업들에 저리로 투여됐다.
이 교수는 자유당 정부의 수입대체 공업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투자와 수출의 촉진을 통해 원조가 줄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 환율과 은행 금리의 왜곡으로 인해 기업의 이권추구 행위가 성행했고, 기업의 혁신과 수출에 대한 자극이 제공되지 못 했던 점도 지적했다.
이 교수는 4·19혁명의 경제적 배경으로 저곡가와 고리채에 따른 농촌의 피폐, 저임금과 실업 등에 의한 도시민의 생활난, 그와 대비되는 특혜와 부정을 통한 축재에 대한 불만, 원조의 격감에 따른 미래의 불안 등을 꼽았다. 이 교수의 설명이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휴전 이후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사이, 7년간 이런 부분을 극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아무리 유능한 정부라고 해도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두얼 교수는 수입대체산업과 수출산업을 별개로 분리해보는 기존의 시각을 부정하고 연속적인 발전 단계로 파악했다. 김 교수는 1950년대 동안 우리나라 제조업은 내수시장을 기초로 성장하면서 수출을 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을 갖추었고 실제로 수출을 위해 노력을 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1950년대 생산 능력은 1960년대 대내외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자고 도성장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봤다. 김 교수의 주장이 타당한 것 같다. 1960년대 고도성장은 평지에서 갑자기 돌출하듯이 이뤄지지 않았을 터, 그 이전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란 주장은 상식에 부합한다.
김두얼 교수는 이승만 정부 시절에 다양한 수출진흥책이 모색되고 시행된 점도 지적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6년에 수출 5개년계획을 마련했고, 수출보상금제, 수출장려보조금, 수출입연동제, 무역법과 관련 법령 정비 등이 1950년대 중·후반 시기에 차례로 시행됐다는 것이다.
1950년대 경제안정과 성장은 막대한 원조를 준 미국과 이를 잘 사용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미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자유시장 경제의 방향으로 나간 점, 국가 재정이 어려운 가운데 수입대체 공업화를 다진 이승만 정부의 노고를 폄하할 수 없다고 본다. 아울러 보국안민의 기업가 정신을 실천한 해방 후 창업 1세대 기업가들, 하루 2교대 11~12시간의 노동을 감내한 노동자들, 가난한 농어촌 현실에서 자식 교육을 위해 애를 쓴 부모들의 희생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50년대 경제안정과 성장의 토대는 한 마디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오고자 힘을 다했던 정부와 국민의 재건 정신으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부 논자 들이 정경유착과 부패를 지적하기도 하 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들의 현대사와 비교해 차분히 살펴보면 한국의 부패 케이스는 지나치게 과장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