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방우주를 둘러싼 국제 경쟁이 군사력뿐 아니라 산업, 외교, 과학기술 전반으로 확장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민간 기술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일본·인도는 제3국과의 협력을 통해 전략적 입지를 넓히는 등 ‘우주 안보’를 둘러싼 패러다임 전환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역시 단순한 기술 확보를 넘어, 민군 협력과 산업 생태계 육성, 제도 정비를 포함한 ‘전략적 혁신 시스템’ 구축이 요구되고 있다. 기술 개발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한 만큼, 민간의 역동성과 국제 협력이 결합된 종합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 국방우주, 전략적 전환 기로… 민간·산업 연계 통한 ‘혁신 시스템’ 시급
한국의 국방우주 정책이 단순한 기술 추격을 넘어서 전략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난달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방우주 강국 건설을 위한 정책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우주를 통해 안보, 산업, 외교적 가치를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술개발 중심 기조에서 벗어나, 민간과 산업, 정책이 연계된 ‘총체적 혁신 시스템’으로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우주공공정책팀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이제는 기술 확보를 넘어 임무 중심의 우주 개발 철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존의 3차 우주개발 진흥계획까지는 위성 확보, 발사체 기술 개발이 목표였다면, 4차 계획에서는 우주탐사, 수송, 산업 창출, 안보, 과학 확장 등 다섯 가지 장기 미션 중심으로 재편됐다”며 이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했다.
반면 한국은 좁은 국토와 높은 위도 등 지리적 제약으로 글로벌 우주 경쟁에서 불리한 여건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 안 팀장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려면 기술개발을 넘어 정책, 제도, 산업 전반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국가 차원의 우주 혁신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단순한 R&D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민간 기업의 참여 확대와 벤처 육성, 금융·제도적 기반 정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누적 우주 R&D 투자 규모는 세계 6~7위 수준으로, 단순한 예산 확대보다는 주어진 자원을 얼마나 전략적으로 운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지적이다. ‘5대 우주 강국’이라는 상징적 목표보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성과 중심의 접근이 요구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심순형 산업연구원 안보전략산업팀장은 우주산업과 방산 산업의 전략적 연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지상·해상·항공 중심의 방산이 이제는 우주, 사이버, AI 기반으로 확장되고 있다”며 “K-방산이 축적한 성과를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국방우주산업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 팀장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사례를 언급하며, 민간 우주기업 스타링크(Starlink)의 위성통신 기술이 전장에서 전략적 가치를 입증한 점에 주목했다. 그는 “우리도 우주기반 감시정찰, 통신체계 등 군사역량 확보를 통해 국방산업 수출의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주 안보’ 새판 짜는 세계 주요국… '국제 협력'과 '민간기술 연계'가 핵심
글로벌 안보 지형이 급변하면서, 국방우주 전략 역시 기술 우위 경쟁을 넘어 외교·산업·민간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복합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양강 구도에서 벗어나, 다자협력 및 지역연합을 중심으로 한 전략 다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독자적인 발사체 역량과 우주 자주권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일본과 인도는 제3국과의 기술·경제 협력을 통해 국방우주 분야의 시너지 극대화를 모색 중이다. 이 같은 흐름은 한국의 국방우주 전략 수립에도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남기헌 국방연구원 획득방산연구실 실장은 미국, 유럽, 호주, 영국, 독일 등 주요국의 방위산업 전략을 분석하며, 각국이 자국 현실에 맞춘 체계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공급망 회복력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공동방위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호주는 자국 방위산업의 자립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우주 기반 안보 전략과 맞물려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방위산업에 ‘비전통’ 민간기업의 참여가 확대되고 있는 점이라고 그는 짚었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수백 개의 민간 혁신 기업들을 방위산업 생태계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주 기반 통신, 감시정찰,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을 방산 시스템에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 실장은 “민간 기술의 발전 속도가 국방기술을 앞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기술을 방산 분야에 빠르게 접목하기 위해선 유연한 표준화·모듈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EU는 400여개 민간기업의 참여를 유도하며, 기술 획득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방우주 전략에서 기술 개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적시 전력화’다. 이에 따라 여러 국가들은 획득체계의 민첩성과 유연성을 강화하고 있다. 남 실장은 이러한 흐름이 한국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획득 체계가 경직되면 민간 기술이 제때 방산 분야에 접목되지 못 한다”며 “유연하고 효율적인 조달 체계 구축이야말로 국방우주 경쟁력의 근간”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주요국들은 첨단 기술의 공동개발을 통해 전략적 협력관계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 영국, 호주, 인도 등은 동맹 및 우호국과의 기술협력을 강화하며, 국제 안보질서 내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분위기다. 결국 세계 국방우주 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민간 기술 연계’와 ‘국제협력’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 민군 융합·산업화·글로벌 협력… ‘한국형 국방우주 산업’의 3대 해법
이에 따라 한국도 방위와 우주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 구축과 국제 협력 확대를 통해 ‘국방우주 강국’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민군 협력을 통한 R&D 체계 혁신, 방산 수출과 연계한 우주 플랫폼 패키지화, 상업 위성 서비스 활용과 같은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산업화와 글로벌 연계 없이는 우주 기술은 일회성 성과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민간이 중심이 되는 생태계 전환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심순형 팀장은 현재 한국의 우주 기술과 방산 기술이 이원화된 R&D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통합 거버넌스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위성, 발사체, 지상관제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민간과 군의 기술 협력 범위를 넓히고 중복투자를 최소화해야 한다”며 민군 간 전략적 연계 구조의 정립을 주문했다.
한국형 방산 플랫폼의 글로벌 확산과 함께, 우주기반 솔루션을 묶어 제공하는 ‘우주 패키지 전략’도 미래 성장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심순형 팀장은 “정찰, 통신, 항법 등 우주기반 솔루션을 방산 플랫폼과 함께 수출하면, 고객국의 지휘통제·상황인식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고 장기적인 운용·유지시장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 장비 수출을 넘어, 한국형 지휘체계와 운용 인프라를 글로벌 표준으로 안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폴란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국방과 우주를 동시에 육성하는 전략국과의 협력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권현준 우주항공청 우주항공정책국장은 “한국 우주 산업은 더 이상 연구개발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본격적인 산업화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나로호·누리호 개발이 제한된 투자와 단기성과에 의존했던 점을 지적하며, “10년 단위의 발사체 개발이 아니라 지속적인 생산과 수요 창출이 가능한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해법으로 권 국장은 국방 수요 기반의 민간 산업 활성화를 제시했다. “국방이 자체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용 위성 서비스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미국 국가정찰국(NRO)의 사례처럼 민간 시장이 국방 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간이 수익을 확보하고 사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국방이 ‘앵커 고객’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영 메이사 대표는 위성 데이터를 활용하는 스타트업 입장에서 “정책과 제도가 여전히 하드웨어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며 “소프트웨어 기반 기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국방부가 팔란티어(Palantir Technologies), 플래닛랩스(Planet Labs) 등 민간 기업의 기술을 내재화하거나 하이브리드 형태로 활용하는 전략을 예로 들며, 한국도 민간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뒷받침할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팔란티어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미 국방부, 정보기관 등과 협력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사의 AI 기술을 제공해 전장 상황분석 및 전략수립에 기여하면서 미국 3대 방산 기업 가치를 뛰어넘어 주목을 받았다.
반면 일각에서는 방대한 국방우주 분야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안재명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한국이 국방우주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모든 기술을 다 잘하려 하기보다는, 한두 가지 기술 분야에 집중해 글로벌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효율적인 협력과 특화된 전략이 국방우주 강국으로 나아가는 핵심”이라며 이를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적 컨트롤타워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세계가 ‘우주 안보’를 중심으로 전략 지형을 재편하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단순한 기술 확보를 넘어 민군 융합, 산업화, 국제협력 기반의 총체적 혁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역사적 골든타임이라고 지적한다. 국방우주 전략은 국가 안보뿐 아니라 산업과 외교의 미래까지 좌우할 핵심 축이라는 인식 아래, 지속가능한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