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생존 전략과 종자
최근 중국은 식량안보를 강화하고 농촌 현대화를 가속하기 위해 2024~2035 농업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며 곡물 생산 확대, 종자 산업 육성, 농기계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식량안보 전략에서 ‘종자칩(种子芯片)’이라 부를 만큼 종자 기술을 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하여 국영기업 중심으로 종자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이는 미·중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대응해 농업 자립도를 높이고 내수를 강화하려는 전략이다. 중국의 움직임은 종자 산업 육성이 국가 생존 전략의 일환임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시 종자 주권 확보가 시급하다.
기후위기와 국제 분쟁, 글로벌 공급망 교란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자국 내 식량 생산 기반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종자 주권 확보는 단순한 농업 기술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전략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종자는 단순한 농자재가 아니라, 국가의 산업 전략·과학 기술·경제적 자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핵심 자산인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은 곡물 수급 불안을 경험하며 자국 품종 보존에 대한 법적·재정적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한국 야생 콩 4,000여 종자를 유전자원보존소에 보관하고 있으며, 이를 미국 콩 산업 육성에 중요한 기초 유전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종자와 밥상 물가
우리나라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센터, 종자산업진흥센터 등을 중심으로 고추, 버섯, 딸기, 감귤 등 다양한 국산 신품종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국산 종자 보급률 확대를 위한 보조금·인센티브 제공 정책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먹는 농산물의 약 70%는 외국 종자에 기반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해외로 유출된 종자 로열티만 1,300억 원을 넘어섰다. 이는 단지 경제적 손실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밥상 주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이다.
우리 국민의 밥상 물가가 심상치 않다. 올해 3월 식품 물가는 전년 대비 2.8% 상승했고, 신선 채소와 과일 가격은 더 가파르게 뛰었다. 많은 전문가가 기후위기, 유가 상승, 자연재해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을 놓치고 있다. 바로 ‘종자 로열티’다. 종자 로열티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 기업이나 기관이 농민에게 받는 사용료다.
한때 종자 자급률이 높았던 한국은 이제 외국산 품종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농민들은 수확물 판매 단계에서도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불합리한 구조에 놓이게 되었다. 이 비용은 고스란히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종자 가격이 기존 품종 대비 두세 배 이상 비싸고, 경우에 따라 매출액의 일정 비율(5~10%)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특히 양파는 국내 재배량의 60% 이상이 외국산 종자에 의존하고 있다. 전국 최대 양파 산지인 전남 지역에서는 매년 약 60억 원을 수입 종자 비용으로 지불한다.
◇국산 종자 개발의 필요성과 가능성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남농업기술원은 2010년부터 국산 양파 품종 개발에 착수했다. 생명공학 기술을 활용해 기존보다 육종 기간을 크게 단축했으며, 현재 단단하고 저장성이 뛰어난 9개 국산 품종을 개발해 무안, 고흥 등 160ha 농지에 보급하고 있다.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파를 활용한 젤리, 드레싱, 소스 등 7종의 가공 제품도 개발해 부가가치 창출에 나섰다. 전라남도는 오는 2030년까지 국산 양파 종자 보급률을 45%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국산 종자가 보급되면 농가 생산비 절감 효과가 상당하다. 전남농업기술원 분석에 따르면, 국산 양파 종자를 사용하면 ha당 약 200만 원 이상의 종자비 절감 효과가 발생하며, 지역 전체로 보면 매년 60억 원 이상의 외화 유출을 막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국산 품종은 기후변화에 맞춰 육성되기 때문에 병충해 저항성과 저장성이 우수해 장기적으로는 폐기율을 낮추고 유통비용까지 절감할 수 있다.
양파 외에 딸기, 파프리카, 쌀 같은 품목도 이미 외국산 종자 의존이 심각하다. 문제는 이 종자 의존이 밥상 물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생산비 상승은 당연히 소비자 가격 인상 압력으로 이어진다. 만약 외국 기업이 품종 공급을 제한하거나 종자 가격을 급등시키면 식량 생산 기반 자체가 흔들릴 위험도 있다. 파프리카 종자 1g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
현재 씨앗을 사고파는 글로벌 종자 시장은 2023년 기준 약 450억 달러(약 60조 원) 규모로, 연평균 6~7%의 성장률을 보이며 바이오산업 중 가파르게 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만큼 종자는 농업만이 아니라 식량안보와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 되고 있다.
세계 각국은 종자 주권을 내세워 자국 품종 보호와 로열티 확보 경쟁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르는 청양고추마저도 로얄티를 내야 재배할 수 있다. 팽이버섯, 양송이를 먹을 때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로 로열티가 빠져나간다. 참외, 배추, 단호박, 양파, 심지어 콩나물까지 외국 종자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한국이 종자 로열티로 해외에 지불한 돈은 무려 1,357억 원에 달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농산물의 70%가 외국 종자에서 비롯된다는 현실은 결코 허투루 볼 수 없다.
다행히 종자 독립을 위한 노력이 착실하게 진행되는 품목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센터의 신품종 개발이다. 센터는 기존 황금향과 병감을 교잡해 새로 ‘미래향’이라는 신품종을 개발했다. 미래향은 감미와 산미의 균형이 뛰어나고 저장성이 좋아 차세대 감귤 품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단순히 한 품종을 넘어서 미래 먹거리를 선도할 전략 품종으로 육성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전통 산채류인 곰취, 두릅, 음나무도 품질 개선이 이뤄졌다. 쓴맛은 줄이고 향은 부드럽게 개량하여 소비자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고급 식자재로써 활용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산딸기, 오미자 품종도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붉은색을 넘어 오렌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깔로 개발해 음료, 디저트 소재로 인기가 급증하고 있다. 맛과 향뿐 아니라 시각적 즐거움까지 제공하는 신품종이 시장을 새롭게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신품종 개발자(육종가)의 권리를 지식재산권(IP) 형태로 인정하고, 국제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품종 보호를 추진하고 있다. 원예특작과학원을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들은 산과수(산림 과수), 버섯, 산채 등 식·약용 57개 품목의 신품종 재배심사를 진행 중이다. 국가 전체로 보면 2024년 신품종 등록 건수는 73건으로, 전년도(평균 30~40건) 대비 2배 이상 급증했다. 이는 종자 자립과 고부가가치 농업을 향한 대한민국 농업의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종자는 새로운 고부가가치 산업
한국은 산림이 국토 면적의 약 64%를 차지하는 나라다. 산림자원을 기반으로 한 신품종 개발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무, 배추, 고추 등에서는 우수한 국산 품종이 등장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버섯, 딸기, 키위, 토마토 등도 수출을 목표로 한 신품종 개발이 한창이다. 외환위기 때 해외로 넘어간 우리의 ‘땡초’, ‘청양고추’까지 다시 우리 품으로 찾아오는 날도 머지않았다.
이제 우리는 종자까지 수입에 의존하는 후진국형 농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는 신품종 개발과 국산 종자 보급에 더욱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농민에게는 국산 품종 선택을 지원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한편, 소비자에게는 품종 다양성과 가격 형성 과정을 투명하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농산물 가격 안정을 바란다면 시장 가격만이 아니라 그 ‘뿌리’인 종자부터 점검해야 한다. 종자 독립은 선택이 아니라, 이제는 국가 생존 전략이다.
이제 한국 농업도 외국산 종자에 의존하는 ‘뿌리 없는 농업’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더 나아가 국내 자생 품종을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품종 다양성의 회복, 그리고 국가 식량주권의 확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