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문학상이 우리나라의 여류작가 한강에게 주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서점마다 그녀의 책을 사겠다는 독자들로 북적댔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서점은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최근 필자가 찾았던 여의도 IFC의 한 서점에는 양장 제본된 그녀의 책이 별도의 코너에 진열되어 있긴 했지만, 오전 11시 시간이 일러서 그랬는지 나 혼자 서 있기에 머쓱할 만큼 한가했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책이 그럴 진데 다른 작가의 책은 오죽할까 싶다. 그렇다면 서점이 사막처럼 바뀌어 가도 작가가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타임스의 서평에 소개된 책을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해 본다.
LIVING THINGS: by Munir Hachemi/Translated by Julia Sanches Coach House Books/139 pp/Paperbook. $ 17.95
◇삶의 파편을 찾아 떠난 젊은 4명의 좌충우돌 아르바이트 일기
무니르 하케미(Munir Hachemi)의 소설, “Living Things, 살아있는 것들”은 4명의 젊은이가 “문학적 자본”을 얻기 위해 무언가 색다른 일을 찾아다니다가 ‘일이란 착취’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뤘다.
2018년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된 “Living Things”는 무니르 하케미의 데뷔 소설이기도 하다. 책에 소개된 그의 경력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쓴 이야기를 마드리드 술집에서 팔았으며, 그러다가 결국 그란타(Granta’s) 잡지에 가장 젊고, 뛰어난 스페인어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젊은 문학 지망생들이 충동적이고 우쭐한 기백으로 모험의 길을 찾아 나섰다가 비우호적인 세상과 맞닥뜨리고 그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좌충우돌의 심리가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의 화자(話者)인 무니르는 자신과 G, Alejandro, 그리고 Ernesto라고 하는 3명의 친구와 함께 “문학적 자본으로서의 경험”을 흡수하기 위해 외국으로 향하던 어느 여름날부터 서로 헤어져 있던 몇 년간을 되돌아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여러 사건을 반복적으로 빠짐없이 쓰려고 노력하면서 이번 만큼은 글에 윤색을 가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기보다 앞에 간 모든 작가를 사기꾼들이라고 간주하면서도 자신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까발릴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자신은 “장식(粧飾)이나 기만(欺瞞)을 조롱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첫 번째 토론자가 될 것”이며, 어떤 이야기를 펼쳐놓고 “이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생각은 저자의 허세다. 그런 저자의 허세는 일종의 강박적인 글쓰기에서 나온다. 강박적 글쓰기란 글을 쓰면서 정보를 얻고 동시에 스토리텔링을 펼치는 일종의 문학적 이론(literary theorizing)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장(章)에 붙은 소제목은 여러 소설 제목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줄리아 산체스가 번역한 이 책은 분노한 젊은 작가의 글답게 생각 없이 마구 써 나간 산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자신이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다는 듯이 으스대고 거친 말로 다른 작가들을 노골적으로 폄훼하는 글로 가득하다.
이 책은 강하고 공격적이며 남자다움과 문학적 가식(假飾)을 섞은 호전적인 칵테일과 함께 본문에서 여러 번 언급한 칠레 소설가, 로베르트 볼라뇨(Robert Bolano, 1953~2003)의 신전에 제물로 바친다.
◇‘손이 더러워지면 질수록 글이 잘 써진다“ 거침이 없는 ’잭 케루악’ 신봉자
4명의 스페인 사람이 차를 몰고 프랑스 남쪽으로 간다. 포도를 따면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돈을 벌 필요까지 없었지만, 자신들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미국의 소설가 케루악(Kerouac, 1922~1969)이나 독일계 미국 시인 부코프스키(Bukowski, 1020~1994), 그리고 볼라뇨를 염두에 두고, 중산층 노동 관광객(labor tourist, 사는 국가와 일하는 국가가 다른 사람)이 되어 일하면서 손이 더러워지면 더러워질수록 글은 훨씬 잘 써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포도 수확 자체가 연기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각자, 그 지역의 어느 모집대행사의 소개로 제품 생산 공장과 동물 가공 처리 시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족과 커플들이 야영하는 어느 캠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몇 유로를 벌기 위해 매일 아침 자동차를 몰아 캠프장에서 멀리 떨어진, 이 소설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소재를 제공하는 무시무시한 일터로 간다.
◇치킨 가공 공장에 다니다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된 주인공
픽션 작가라면 거의 가지 않을 장소에 우리를 데려다주는 무니르의 저임금 노동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설명은 너무나 흥미로워서 주목하지 않고 못 배긴다. 노동에 관해 젬병이 따로 없는 무니르가 치킨-가공 공장에서 교대 조로 일을 하고 나서, 곧바로 육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베건(vegan, 엄격한 채식주의자)이 된 계기는 너무나 생생해서 그저 그런 사실이 문학적 치장(治粧)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외부와 차단된 어두운 환경에 서 죽어 나가기 시작했을 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무니르의 흥미가 발동된다. 경험을 통해 글을 쓰겠다는 그들은 스페인 중산층으로서 지옥 같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어두운 세계를 잠깐이나마 들여다본다.
“Living Things”의 대부분은 화자(話者)인 무니르 본인이 기억을 되살려 쓴다고 주장하는 일기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작가가 툭하면 트집을 잡는 화자(話者)를 언제 조롱할지, 아니면 언제 우쭐해지고 자만을 떨게 할지 알기가 어려울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평범한 화자(話者)가 아니다. 일기를 정리 정돈한다기보다는 일기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편”이라고 무니르는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세련된 문학적 이론을 반쯤 일구는 데 성공했다손 쳐도 그의 문장 표현은 너무 뻔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현실은 소설과 같지 않다’고 한다든지, ‘팩트(facts)는 이따금 형이상학적 침전물을 더 깊이 덮어씌우지 않는다”라든지, “아무리 일기를 꼼꼼하게 써도 기록한 분량만큼 빠뜨리게 되어 있다”는 표현이 그러하다.
◇스토리텔링은 세상이 와해 된 파편에서 본능이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무니르 하케미의 글은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쏟아내는 것이어서 마치 프랑스 문학 이론가인 로랑드 바르테(Roland Barthes, 1015~1980)가 술에 취해 강연하는 것을 듣는 듯하다. 여행 중인 게으름뱅이 작가가 속이지 않고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이런 방식의 글은 이야기의 내용에 훨씬 더 많은 생기를 불어넣는다. 아마 이 소설이 주는 재미라든가 부드럽지 않고 거친 것에서 오는 매력의 한 부분은 무니르와 그의 친구들이 현대 소설에서 우리가 늘 만나곤 하는 고상하고 과민한 타이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멀쩡하게 생긴 것 같은데 돼먹지 못한 이 스페인 문학청년들은 상습적으로 그들이 지내는 캠핑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 때문에 다른 캠핑장 손님들이 화가 나게 만들어 놓고 시종 대마초를 피워대고 주정뱅이처럼 맥주를 들이마셔 대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중간 계층보다 아래에 있는 계층에서 왕왕거리며 울리는 현대의 공포에 무감각하지 않다. 말미(末尾)에 이르면 무니르는 살림이 몹시 구차(苟且)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워킹 홀리데이를 통해, 자신의 천직인 작가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애증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스토리텔링이란 세상이 와해 되어 우리 주변에 조각이 널려있을 때 우리가 본능에 따라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필자 주; 이 글은 롭 도일(Rob Doyle, 1982~ , 42세, 아일랜드 작가)의 뉴욕타임스 서평을 참조했음. 롭 도일의 2014년 소설 『Here Are the Young Men』은 2020년 같은 이름의 영화로 각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