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확, 자유, 존중, 사랑」 좋은 글의 요소를 지키려는 노력
저는 아침마다 108배가 끝나면, 당근과 사과를 먹는 동시에 몇 개의 국내 신문과 뉴욕타임스의 지면을 넘기면서 제목부터 훑어보는 습관이 있다. 그러면 문득 오늘은 이에 관해 글을 써봐야겠다는 충동이 어떤 제목이나 사진으로부터 일어난다.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아이디어가 글로 써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대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당장 써야 하는 글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유야무야(有耶無耶)로 끝나는 게 통례다.
어쩌다가 방송기자가 된 저는 40년 넘게 글을 써 왔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도 글인가 싶을 정도로 부끄럽기 짝이 없을 때가 많아 얼굴이 달아오른다. 다행히 외환위기 전후로 여러 선배와 동료의 도움으로 생활경제를 미시적으로 다룬 MBC 뉴스데스크의 「1원의 경제학」이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많은 위로도 받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분노나 괴로움, 혼란에 빠져 길을 잃었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에 대한 해답은 항상 같았다. 펜을 종이에 대고 일기를 쓰듯 글을 쓰는 것이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좋은 글에는 ▲언어의 정확성, ▲무엇이든 말할 자유,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간에 대한 사랑 등 네 가지 요소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느냐 죽느냐, 햄릿의 종말은 놀라움보다 기대감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거의 맞는 단어와 맞는 단어의 차이는 반딧불이와 번개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말했다. 글쓰기에서 단어의 정확성이 필수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정확하지 않을 때는 글 쓰는 이와 독자 모두가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서다. 따라서 글쓰기는 모든 측면에서 정확해야 한다. 글 쓰는 이라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놀라움을 주려고 하기보다는 독자가 기대를 걸 수 있도록 하는 게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놀라움은 흥미진진할 수 있지만 값싼 흥분일 뿐이니까.
우리가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치는 ‘햄릿’의 줄거리를 알고있어도 수백 년 동안 같은 햄릿 연극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의 삶이 어떻게 불가피한 종말로 이어지는지를 확인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도 인간의 고민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권력 없는 자의 권력’을 주는 자유
글 쓰는 사람의 자유는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이른다. 글이란 글쓴이가 선택한 주제를 어떤 형태로든 말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에 의존한다. 그러니까 자유는 작가에게 권력을 주는 것, 혹은 체코의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말했듯이 "권력 없는 자의 권력"을 주는 것이다.
팩트를 전하는 기사(記事)는 약간 다르지만-기사는 사실에 부합해야 하므로 사실을 뛰어넘는 상상은 허용되지 않는다-수필, 장편 소설이나 단편 소설이나 희곡 등은 장르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이야기로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가장 중요한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감동적인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ghetto, 유대인 거주지)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수용소로 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쓴 시와 이야기와 편지를 돌돌 말아 건물 벽의 틈새에 밀어 넣었다. 그들에게는 들려줄 이야기가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약간의 자유였다.
세상은 희로애락의 거대한 집단
글 쓰는 이는 우리 모든 인간이 귀천(貴賤)과 존비(尊卑)를 불문하고 결함이 있으며 모두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이는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가장 혐오스러운 관점(觀點)조차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과 미지(未知)를 공정하면서도 명예롭게 대해야 하는 글 쓰는 이의 의무다. 저를 포함해 글 쓰는 이는 자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이 있더라도 그를 백안시(白眼視)하지 말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일랜드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소설 ‘Clay’에서 조(Joe)라는 인물은 성실하지 않고 어리석고 위험하지만, 작가는 그에게 ‘눈물의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글 쓰는 이가 세상을 경쟁의 장으로 보지 않고 거대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경이로움, 두려움 그리고 꿈과 슬픔을 공유(共有)하고 있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동등하게 대우할 것
좋은 글에 들어있어야 할 마지막 요소는 사랑이다. 글 쓰는 이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짊어진 짐의 무게를 사랑으로 측량할 줄을 알아야 한다.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는 나무꾼의 어깨 통증을 같이 느끼고, 나뭇짐을 부엌 앞마당에 부려 놓았을 때의 홀가분한 상태를 공감할 수 있으려면 나무꾼을 애처롭게 여기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저마다의 짐을 지고 저마다의 의지로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에 있든, 칠레의 산티아고든,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살든 서울의 변두리에 살든, 글 쓰는 이는 그들을 사랑하고 동등하게 대우할 줄 알 때 좋은 글을 생성 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존경, 그리고 사랑
디지털이 정점을 지날수록 신문이나 시사 잡지, 방송의 말이나 글은 특정한 인간이나 특정 군중을 편애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기편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철천(徹天)의 원수처럼 여겨 세상을 적과 동지로 두 동강 내 버렸다.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와 존경을 갖추고 사랑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자기편의 말과 글이 아니면 외면하는 풍조가 생겼다.
가짜뉴스가 넘치고 인공지능 챗봇이 원하는 기사를 대신 써주는 언론의 혼돈한 시대에 좋은 글의 네 가지 요소를 갖추려고 노력해 온 M이코노미 매거진(월간)이 195호(2024년 12월호 기준)를 발간했다. 3년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잡지계에서 19년 만에 이룬 성과다. 중간에 제호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굴하지 않았고 매일 매일 인쇄 매체를 위협하는 인터넷의 위세에도 꺾이지 않았다.
기후 위기 시대의 새로운 방향타
더구나 3년 전부터는 기후재앙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고자-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환경 타령이냐는 말을 들으면서-기후 환경 분야, 특히 대중의 관심도가 떨어져 국가기관이 맡았어야 할 「흙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어 정확하고 자유롭게 존경심과 사랑으로 관련 분야 사업과 글을 개척하고 발굴해 왔다.
그 노력의 결실로 M이코노미뉴스는 전남 구례군과 함께 「흙살리기 박람회」를 국내 최초로 열게 되었고, 『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캠페인을 전 세계로 확산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기후 위기를 사기라고 치부하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차기 미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기후와 환경을 둘러싼 국제 정치와 사회는 혼란에 빠질 확률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역시 지구를 사랑하고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지구촌 누구와도 손잡고 좋은 글의 네 가지 요소를 명심하며 환경 파괴 없는 경제적 미래를 위한 탐험에 나설 것이다.
그동안 변함없이 좋은 글을 쓰라고 M이코노미뉴스를 아껴주시고 격려를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다가올 새해 여러분의 건승과 가정이 두루두루 편안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