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3.8% 수준의 국방비 지출과 주한미군 주둔비 2배 증액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압박이 커지고 있다. 이는 한국이 GDP의 2.6%를 국방비로 쓰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단숨에 1% 이상의 상승폭으로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이다.
더구나 한국은 현금 분담금 외에도 기지 부지 제공, 세제 혜택,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이미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단순한 비용 문제로만 협상이 흐를 경우 동맹의 본질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과거 집권 시절에도 비슷한 과도한 요구가 있었지만 미 의회의 제도적 견제로 현실화되지 못했던 점을 상기시킨다. 이번에도 미국 정치 구조상 대통령의 돌발 발언이 곧바로 정책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만큼, 한국 정부는 섣부른 대응보다 원칙에 기반한 전략적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WP “트럼프, GDP 3.8% 국방비·주둔비 2배 증액 요구”
워싱턴포스트(WP)는 9일(현지시간) 자체 입수한 ‘한미 무역 합의 초안’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3.8% 수준의 국방비 지출 요구를 검토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지난해 국방비는 GDP 대비 2.6% 수준으로, 이를 단숨에 1%포인트 이상 끌어올리라는 압박인 셈이다.
또한 WP는 트럼프 측이 주한미군 약 2만8500명의 주둔비 분담금을 10억 달러 이상 증액하려 했다고 전했다. 이는 한국이 2026년 부담하기로 한 1조5,192억원(약 11억 달러)의 방위비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준이다.
한국 정부는 이미 2025년 1조4,028억원에서 내년 1조5,192억원으로 8.3% 인상된 방위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분담금은 주한미군 한국인 고용원 인건비, 군사시설 건설, 군수지원 등으로 사용되며 전체 운영비의 40~50%를 차지한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점은 미집행액이다. 국회 국방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으로 사용되지 않고 쌓여 있는 금액만 2조1,637억원에 달한다. 방위비를 추가로 증액하더라도 집행 구조가 비효율적이고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 주한미군 변화 美의회 승인 받아야... “섣부른 협상보다 전략적 접근 필요”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는 M이코노미뉴스와의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때 방위비를 500% 올려달라고 요구했던 것도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번 2배 증액 주장 역시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현재 한국이 직접 분담하는 금액은 1조5천억원 수준이지만 기지 부지 제공, 관세 및 세제 혜택까지 합치면 매년 4조원에 달하는 지원을 하고 있다”며 “이런 실질적 기여를 빼놓고 단순히 현금 분담금만 문제 삼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지적했다.
문 교수는 또 “한국은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군사력에서 북한을 압도하고 있고,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다”며 “결국 주한미군의 전략적 목적은 북한 억제를 넘어 중국 견제로 확장된 만큼, 한국은 그에 상응하는 전략적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원칙 있는 대응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문근식 교수는 “관세 협상과 방위비 협상을 억지로 연계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안보 문제는 한미 양국의 안보 이익을 기준으로 차근차근 논의하고, 경제는 경제대로 분리해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즉, 방위비 협상에서는 한국이 이미 제공하고 있는 간접 기여와 미집행 분담금 문제를 투명하게 제시하면서 과도한 증액 요구를 견제하는 동시에, 안보 현안에서는 한미 간 공동 이익을 중심으로 협력 의제를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5조 3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대규모 경제적 기여가 방위비 협상에서 강력한 협상 카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더불어 문 교수는 미국 정치 체제의 특수성도 짚었다. 그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의회의 견제와 입법 기능이 매우 강력하다”며 대통령 개인의 주장이나 돌발적 발언이 곧바로 정책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님을 강조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방위비 인상을 거론했을 때 미 의회는 국방수권법(NDAA)을 통해 제동을 걸었다. 주한미군 병력 2만8500명을 줄이려면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거치도록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2026 회계연도에도 국방수권법(NDAA)에 ‘주한미군 규모 유지 권고’ 조항을 담았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독자적 병력 감축 시도를 견제하려는 의회의 일관된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교수는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국가 전략은 의회를 통해 일관되게 이어진다”며 한국 역시 단기적 요구에 흔들리기보다 미국 의회의 제도적 장치와 장기 전략을 고려한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