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 이야기

  • 등록 2023.01.22 09: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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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대한민국 아버지가 말하는 시대정신
"기본으로 시작하라, 작은 일에 성실하라"

 

“우리나라 경제가 복합위기”라고, “올해는 가장 힘든 해가 될 것”이라고 경제를 안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통계를 들이대며 걱정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힘들지 않았던 해가 없었던 듯하다.

 

특히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들이 자신보다 더 잘 되도록 삶의 전선에서 찢기고 베이면서도 결코 물러날 수 없었던 대한민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이겨낸 고통과 경험을 귀담아 듣다보면 아무리 힘든 해가 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M이코노미 매거진 연중 기획, 2023년 대한민국 아버지가 말하는 시대정신」, 그 첫 번째로 세계적인 축구 스타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 천 원짜리를 팔아 3조원을 경영하는 국민가게 다이소의 박정부 회장의 자서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아들, 두 딸의 아버지인 두 사람이 대한민국의 아버지를 대표할 순 없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본과 디테일은 지금의 힘든 경제를 이겨낼 수 있는 시대정신이 아닐까 한다.

 

(손웅정 씨 이야기)

 

“아들의 경기가 있는 날, 아버지인 나는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이다. 아들이 유명하다보니 흥민이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적이 많다. 나는 흥민이가 경기하는 날이면 밥 먹는 걸 포기한다. 경기하는 날 뭘 먹었다하면 체하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속으로 관중석에 앉아 관람한다.

 

말이 좋아 관람이지 흥민이와 같이 뛰는 심정이니 얼굴이 펴질 때가 없다. 차라리 내가 뛰는게 속이 편할 것 같다. 흥민이가 골을 넣었으면 좋겠지만 아버지인 나는 오늘도 흥민이가 부상 없이 행복한 경기를 마치기를 기도한다.

 

관중의 환호소리가 커질 때마다 내 심장은 덜컥 내려 앉아 걱정은 더 깊어간다.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걷는다는 게 아마 이런 것일 듯하다.  나도 흥민이처럼 축구를 했다. 국가대표 B팀이긴 했으나 태극마크를 내 가슴에 붙여본 그래도 잘 나가던 선수였다.

 

당시 신문 스포츠 면에는 내 이름과 사진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생각하면 공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서, 축구가 뭔지도 모르면서 남보다 조금 빠르게, 악바리같이 몰아붙이고, 운동이 너무 좋아 반쯤 미쳐 있었을 뿐, 함부로 덤벙거리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였다.

 

부끄럽다. 더구나 내 나이 스물여덟 때, 나는 축구선수로서는 이른 나이에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막노동판에서 일했지만 난 떳떳한 아버지이고 싶었다


짧은 프로시절 모아둔 연봉은 은퇴 후 생계에 별 도움이 안됐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춘천 국민생활관 생활체육시설에서 일용직 헬스 트레이너로 일을 했다. 한 달 급여로 27만 원을 받았다.

 

이걸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공사판에 나갔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날품팔이였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생활체육시설에 출근하면 새벽부터 청소를 했다. 사람들이 맨발로 들어와 운동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티끌하나 없었다.

 

락스와 장갑, 수세미를 들고 남자화장실에 들어가 구석구석 닦아 냈다. 그때만 그런 건 아니다. 지금도 나는 어느 숙소에 묵거나 호텔에 가도 내가 머무는 곳의 청소는 하루에 한 번씩 내 손으로 직접 한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성격 탓이다. 


“프로선수출신인데 그런 일을 해?”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나는 “그런 건 다 옛날이야기”라고 했다. “지금 내 상황은 이거고, 막노동판에서라도 벌어서 살아야 하는 게 지금의 나”라고 말 했다. 

 

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이라면 가족을 부양하는 게 첫째 의무다. 나는 내 뼈가 부스러지더라도 가정을 이끌어야 했다.  방과 후 체육교실 강사, 학교 시설 관리 일, 투잡, 쓰리잡 닥치는 데로 생활비를 벌어 네 식구 살림을 꾸려갔다.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단칸방을 전전했고, 컨테이너에서 살기도 했다. 궁핍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만큼은 가난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화장실 소변기에 붙은 명언을 섭렵하는 책벌레였다 
 

돈을 많이 버는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시간만큼은 원 없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아버지이고 싶었다. 나는 솔직히 나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눈이 무서웠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다. 아마 우리 아이들은 알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다섯 가지 뿐임을. 

 

첫째, 공차는 것, 둘째,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것, 셋째, 운동장에서 뛰는 것, 넷째, 사색하는 것, 다섯째, 책 읽는 것이다. 무식하고 배운 게 없어서 그런 탓이겠지만 나는 읽고 배우고 그것을 내 안에 쌓아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소변기 앞에 좋은 글이 있으면 그냥 나오질 않고 화장실 안을 돌며 다 읽고 나온다.

 

소변기 앞에 붙어있는 명언을 읽고 마음을 고쳐먹고 재기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글은 타인의 인생을 바꿔놓는 힘이 있다. 1989년 내가 프로시절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첫째 아들 흥윤이를, 1992년 축구선수가 아닌 평범한 시민일 때 둘째 아들 흥민이를 얻었다.

 

그 당시 나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동안, 춘천 부안초등학교 행정직원으로 들어가 그 학교 축구부 아이들을 지도했다. 살림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게 즐거웠다.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보다는 축구에 흥미를 먼저 느끼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에겐 나처럼 하는 축구를 가르치기 싫다, 정반대의 축구 수업을 시작하다  
 

어느 날 어린 홍민이가 내게 축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랑 같이 놀아달라는 게 아니었다. 녀석이 마음먹은 바가 있으니 그걸 봐달라는 거였다. 알면서도 나는 녀석에게 되물었다.

 

“왜 축구가 하고 싶어?”

 

“....”


“흥민아,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축구가 그동안 네 맘대로 했던 공놀이와는 아주 딴판이란 걸 알아야해”


“....”


“축구 무지하게 힘들어, 너 그래도 할래?”


“응, 할래,”


아이들이 하겠다고 해서 내가 직접 지도하기로 결심했지만 은근히 조바심이 일었다. 측면 공격수로 뛰던 명색이 프로선수 출신인 내가 선수 한명 제칠 발기술이나 개인기를 전혀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남들보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스피드 하나 믿고 덤빈, 다시 말해 기본기가 없는 선수였다.

 
“그래, 나처럼 하면 안 되는 거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만큼은 나와 정반대로 가르쳐야겠어.” 이때부터 나는 축구 교육에 거의 미쳐있었다. 꿈속에서 나타난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 
으려고 메모장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탄탄한 기본기 덕분에 선발된 독일 축구유학생 흥민이가 6학년이 됐을 때쯤부터 패스와 킥, 드리볼(dribble)등 볼 컨트롤 훈련에 집중했다.

 

내가 공을 던지면 흥민이가 볼을 컨트롤해서 왼발 킥, 오른발 킥을 반복하는 훈련이었다. 나는 볼 줍는 시간이 아까워 100개의 공을 준비해 냉장고 박스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테니스 강습을 하듯 축구공을 다양한 각도와 속도로 홍민이에게 던지거나 차주었고, 흥민이는 킥과 패스를 하며 볼 컨트롤 감각을 키워나갔다.  흥민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수한 고교축구선수를 선발해 유럽과 남미 등 축구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대한축구협회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지만 흥민이는 중2가 되어서 정식 축구부에 소속된 데다가 엘리트 축구와 먼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발되기 힘들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발-제6기에는 독일에서 직접 사람이 와서 아이들을 테스트하고 선발한다는 거였다. 순간 희망이 보였다. 기초가 제대로 된 아이였으니까, 역시 내 예측은 들어맞았다.  2008년 7월 29일 흥민이는 가족을 떠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내가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나태하거나 게으르거나, 남하고 똑같이 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 남 잘 때 같이 자고, 남 먹을 때 같이 먹고, 남 놀 때같이 놀면 절대 남을 앞서갈 수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흥민이가 1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독일에서 계약이 되지 않고 귀국한다 해도 나는 흥민이를 데리고 계속 훈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독일 함부르크와 계약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독일에서 계약이 안 될까봐 두려웠어. 그래서 힘든 것도 끝까지 참고 견뎠어.”


아들의 행복과 성장을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지원한다

 
나는 그때 춘천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독일로 들어갔다. 흥민이는 숙소생활을 시작했고 나는 근처에 방을 잡고 생활했다. 내가 묵은 방은 이름만 호텔이지 하룻밤에 50유로, 우리나라로 치면 여인숙 같았다. 침대는 딱 내 몸을 감당할 정도였고, 방은 3평 남짓이었다.

 

내 형편에 그 이상은 바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홀로 3년을 지냈다. 그때 생각하면 배가 고팠다는 기억밖에 없었다. 나는 홍민이의 훈련과 뒷바라지, 그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새벽에 창가에 서성이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고, 비 오는 날에 창밖을 보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숙소로 달려가 홍민이를 깨웠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막 독일에서 뛰는 유소년 선수에게 전담 마사지 선생님을 구해 항공편 예약을 해주고, 큰돈을 들인다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나에겐 돈도 없었다. 빚만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흥민이를 위해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흥민이가 선수로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구장에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경기력을 펼쳐 관중들의 박수를 받을때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면 그걸 돈으로 바꾸겠는가? 그 행복을 생각하면 나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번 돈을 그대로 다 쓴다 해도 중요한 것은 아들의 ‘행복과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보내기보다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게 하라


축구로 대학에 입학할 수준이 못 되는 아이들 억지로 대학에 보내지 말라. 그저 축구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학에 보내 놓으면 돈과 노력,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자식의 시간과 미래를 낭비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거면 책이나 한번 실컷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믿고 지켜보면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길을 충분히 찾아내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아버지의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두 아들에게 축구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함을, 겸손함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아버지들과 조금 다른 게 있었다면 아마 지독스럽게 모든 것을 단단한 기본에서 시작하게 했다는 것일지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묵묵히 노력해야 된다. 다만 기회는 준비가 행운을 만났을 때 생기는 법, 그 행운 을 성장으 로 이어가려면 기본 을 튼 튼하게 쌓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무너지고 만다. 모든 것은 기본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손웅정 지음, (주)수오서재, 
2022년 10월 24일 1판 11쇄에서 발췌 요약함

 

편집부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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