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게 다이소 박정부 회장 이야기

  • 등록 2023.01.24 09: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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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대한민국 아버지가 말하는 시대정신
"기본으로 시작하라, 작은 일에 성실하라"

 

“우리나라 경제가 복합위기”라고, “올해는 가장 힘든 해가 될 것”이라고 경제를 안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통계를 들이대며 걱정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힘들지 않았던 해가 없었던 듯하다.

 

특히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들이 자신보다 더 잘 되도록 삶의 전선에서 찢기고 베이면서도 결코 물러날 수 없었던 대한민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이겨낸 고통과 경험을 귀담아 듣다보면 아무리 힘든 해가 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M이코노미 매거진 연중 기획, 2023년 대한민국 아버지가 말하는 시대정신」, 그 첫 번째로 세계적인 축구 스타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 천 원짜리를 팔아 3조원을 경영하는 국민가게 다이소의 박정부 회장의 자서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아들, 두 딸의 아버지인 두 사람이 대한민국의 아버지를 대표할 순 없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본과 디테일은 지금의 힘든 경제를 이겨낼 수 있는 시대정신이 아닐까 한다.

 

(박정부 회장 이야기)

 

무(無)수저 출신인 나는 45살 때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

 
나는 아시아에서 성공하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회사이름을 아성(亞成) 다이소라고 한 여러분과 친근한 ‘다이소’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이름은 박정부. 사람들은 우리 회사가 일본 계열사니, 뭐니 하지만 이름이 일본식일 뿐이고, 진짜 한국 토종의 균일가 사업의 상징이다. ‘다이소’는 우리말 ‘다있소’라고 생각하시라.

 

지금은 회장이지만 내 나이 45살 때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나는 흑수저도 아닌 무(無)수저 출신의 실업자였다.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후 첫 직장. 나는 그곳에서 한눈 팔지 않고 16년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치고 있었다. 생산 책임자로서 최적의 작업조건과 생산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48시간처럼 일했다.

 

이런 공로로 나는 동기들 가운데 입사 6개월 만에 계장으로 승진했고, 창사 이래 최연소 생산책임자가 되었다. 그런데 생산현장에서 노조가 결성되고 투쟁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모든 책임의 화살이 내게 날라 왔다. 나는 현장의 최고 책임자로서 위장 취업자들의 선동과 파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장 무능한 간부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경영진과의 갈등이 심해졌고, 간부회의라도 있는 날이면 나는 입술이 마르고 피가 타들어가는 듯했다. 모멸감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전과 달리 회의실에 가장 말석으로 밀려났고, 회의 중에는 말 한마디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죄인 아니 죄인이 되어 그런 상황을 2년여를 견디다 못해 사직서를 들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나는 절대로 가족보다 먼저 죽지 않기로 했다 
 

“그만 두고 뭘 하려고 그러나?”


사직서를 열어보지도 않은 사장이 물었다. 나는 당시 일본에 사는 동생이 기업의 해외연수 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그 일을 함께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은 아무 말 없이 
알겠다고만 했다. 사장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아내와 두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늦게 결혼한 탓에 두 딸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여 한 번도 아버지! 라고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친척들의 말에 의하면 9.28서울 수복 때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아버지를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회사 뒷문에 세워놓고 총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거였다.

 

그때 내 나이가 7살이었다. 폭격에 불타버린 집에는 아버지 사진 한 장조차 남은 게 없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의 삵 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던 우리 집은 끼니를 제때 챙겨 먹기가 힘들었다. 결국 우리 4형제는 외가로, 큰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힘들었던 나는 당시 “절대로 가족보다 먼저 죽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최소한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결혼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했었는데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긴 터널 속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사장은 가타부터 말이 없다가 2달이 지나자 나를 호출했다. 

 

“자네가 여길 나가서 잘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렇다고 꼭 안된다고도 할 수도 없을 걸세. 그래도 나와 함께 하면 밥은 먹고 살지 않겠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사무실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밥상을 펴 놓고 창업했다 
 

만류는 감사했지만 나는 이미 결심이 서 있어서 “제 할 일은 여기까지인 같다”고 말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풀코스를 뛴 마라톤 선수처럼 기운이 완전히 빠져 나간 것 같았다. 그 순간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남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몸의 모든 에너지가 사라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나 자신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나 자신을 잠시도 쉬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식과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나는 사무실도 없이 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서 밥상을 펴 놓고 창업을 했다.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일본 연수를 기획하는 사업이었다. 나는 이 사업을 통해 일본을 알아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싼 인건비 때문에 제조공장이 없어 대부분의 생활소품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격이 합리적이면서 품질이 좋은 국내 상품을 일본에 팔면 어떨까 싶었다. 1988년 나는 일본 100엔숍 등에 저가 생활용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 한일맨파워를 설립했다. 3단 이민 가방 3개에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6시간씩 기차를 타며 일본 열도를 돌아다녔다.

 

한 번은 비가 오는 날, 어느 거래처에 10분 늦게 갔더니 다른 도매상과 상담 중이었다. 나는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맞은 편 처마 밑에 짐 가방을 들고 2시간을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거래처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나는 ‘내 물건을 내가 팔아야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가장 잘 만드는 나라를 찾아다닌 30년
 

나는 1992년 국내에 균일가 숍을 개점하기 위해 아성산업(현 아성다이소)을 설립했다. 그로부터 5년 뒤 1997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다이소 1호점을 열었다.

 

그로부터 25년 만 2023년 대한민국 아버지가 말하는 시대정신에 전국 1,500여개 매장, 용인남사와 부산의 최첨단 물류허브센터, 3만 2천여 종의 상품을 갖추고 매일 100만 명의 고객이 찾는 3조원 매출 신화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2002년 무역의 날에 1억불 수출 탑을 수상했고, 일본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할 때가 2003년이었는데 수출액이 2142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천 원짜리를 팔아 3조원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들어가야 하는지 여러분은 잘 모르실지 모르겠다.

 

사실 그런 사연을 담은 책을 썼던 건 2016년이었는데 출간을 미루고 서랍 속에 넣어 숙성만 시키고 있다가, 재작년 11월에 다시 작업을 시작해서 출간을 했다.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지 나도 몰랐다. 지난해 12월 1주차 예스24 종합베스트셀러 1위였다. 어찌 보면 나는 지난 30여 년 간 싼 게 비지떡이라는 우리 사회의 통념과 싸워왔다.

 

정말이지 원가를 낮추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원가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균일가를 고수하려니 마른 수건 쥐어짜기가 매일의 일상이었다. 상품의 불필요한 속성을 덜어내는 것 뿐 아니라, 원가를 맞출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지구 반대편 어디라도 날아갔다. 

 

그렇다고 무조건 싼 곳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가격보다 최소한 2배 이상의 가치를 갖는 제품을 만들어줄 곳을 찾아 전 세계를 탈탈 털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가장 잘 만드는 나라를 찾아갔다.

 

나는 생산 책임자를 했었고 산업공학과를 나온 덕분에 어느 공장이든 생산시설을 돌아보면 어디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세계 35개국 3600개 업체 제품, 40센트짜리 프랑스산 유리 명품 만들기도


한번은 ‘루미낙’이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프랑스 회사 아크 본사를 찾아갔다. 유리잔을 30센트에 맞춰달라고 했더니 담당자는 황당하다는 듯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유리제품 생산 공정을 알고 있던 나는 가동하지 않는 설비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루미낙’ 브랜드를 노출하지 않고 메이드인 프랑스만 표기하겠노라는 약속도 하고 승부수를 띄웠다.


“40센트로 하시죠. 대신 이윤이 날 만큼 대량 주문하겠습니다.”


그렇게 들여온 유리컵 등 10여종의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소비자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프랑스산이라고 표기되었던 그 유리컵이 ‘루미낙’으로 유명한 아크의 제품이었던 것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 원가를 낮추고 해서 들여오다 보니 35개국 3,600개 업체에 달하게 되었다. 소비자 는 품 질이 나쁘면 천원도 비싸다고 느낀다. 좋은 상품은 소비자가 먼저 안다. 

 

그 수만 가지 제품 중에 판매가 대비 원가가 높고 기능도 좋은 상품만 소비자들은 쏙쏙 잘도 집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균일가 사업은 마진을 좇는 순간 망한다. 값싼 상품을 찾아 이윤을 먼저 추구하기보다 싸고 좋은 물건으로 많은 고객이 찾아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코로나 이전에 나는 매년 20회 이상 해외출장을 나갔다. 마일리지가 150만 마일이 넘어 지구를 60바퀴 이상을 돈 셈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소싱의 달인’이라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인데 이제야 어디를 가도 상품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어느 부분을 보강하고 줄이면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물건 상태만 보면 국내에서 통할지 안 통할지 직감으로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원자(原子)와 같은 작은 성실함이 바꾼 내 운명, 디테일한 습관이 운명을 결정한다
 

“회장님 기본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가요?” 기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회장님이 강조하시는 기본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느 직원에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내가 회장이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아성 다이소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직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성 다이소는 고객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그러니 ‘기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도 고객으로 출발해야 한다.

 

회장이든, 직원이든 자기본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할 때만큼은 고객중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처럼 당연한 것을 꾸준히 반복하는 것, 매일 갈고 닦는 것이다.

 

철두철미 디테일하게 실천해서 쌓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매일의 작은 노력이 쌓여 커다란 성과가 된다. 그것이 기본의 정의이고 디테일이 가진 힘일 것이다. 그렇다. 매일의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오고, 습관이 쌓여 운명이 된다.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원자와 같은 작은 성실함이 내 가난한 운명을 바꿨다는 것이다. 끈기를 가지고 원자와 같은 디테일한 성실함을 쌓아가다 보면 누구나 좋은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내 큰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3~4년 내 밑에서 일을 배웠는데 어느 날 “나는 아빠만큼 못할 것 같다”며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말고 빨리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했다. 그런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고민했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들 키우면서 잘 살고 있다. 우리 손주들은 수재 급이다. 작은 딸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데 회사에선 혼을 내지 않고 다른 데 가서 혼낸다. 그렇지만 혼내는 건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결국 스스로 느껴서 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고객이 두렵다


창업자에게는 정년이 없는 것 같다. 회사가 성장하다보니 내가 실무를 챙길 수 없어 지난해 공동대표에서 사임하고 지금은 큰 틀에서 회사의 장기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도 일은 크게 줄어든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출근하고 있다. 한 달에 최소 1~2번 제주에서 강원 고성까지 전국 매장을 다니며 직원들을 만나고 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지키고 당연한 것을 꾸준히 반복했고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에 몰입한 나이지만 아직도 나는 고객이 두렵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언제까지 균일가 정책을 고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고객에게 가격보다 더 큰 가치를 제공하고, 국민가게, 국민 브랜드로서 국민생활의 일부가 되려는 우리의 목표이자 존재이유가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천원을 경영하라』 박정부 지음, 샘앤파커스, 2022년 12월 16일 
초판 36쇄에서 발췌 요약.

 

편집부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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