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천 청라아파트 지하주차장과 금산 공영주차타워에서 발생한 잇따른 전기차 화재 사건들은 이른바 ‘전기차 포비아(공포증)’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민들의 공포증은 잦아들지 않은 가운데 정부는 중구난방식 대처로 불안감을 더 키우고 있다.
지난 1일 인천 청라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87대의 차량이 전소되고 793대 차량이 피해를 입었다. 또 수도와 전기가 끊기는 등 아파트 주민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번 사고는 특히 주차된 상황에서 화재가 발생해 공포감이 더 했다. 해당 차량의 배터리 제조업체는 중국 기업 파라시스로 알려졌다.
이어 6일에는 충남 금산군 금산읍 한 주차타워에서 2022년도식 기아 EV6 챠량이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차주 A씨는 전날 오후 7시쯤 주차하고 충전기를 꽂았다고 밝혔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EV6 배터리 제조사는 국내기업 SK온이다.
●“내 일 아니잖아” 주무부처 제각각...컨트롤타워의 부재
전기차 화재 건수는 2021년 24건에서 2022년 43건, 지난해 72건으로 매년 증가세다.
정부는 지난 6월 ‘화성 리튬 배터리 공장 화재’ 이후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를 꾸리며 재난 위험 요소를 점검하겠다고 말했지만 최근 연이은 배터리 화재 사건에도 실효성있는 대책이 전무하다. 사실상 주무부처의 업무를 통합 관리해야할 정부 내 컨트롤타워 부재가 지적되고 있다.
‘인천 청라 전기차 화재’로 논란이 된 배터리 셀 안전 기준 관리는 산자부가 한다. 정작 화재가 난 벤츠 전기차는 국토부가 소관 부처다. 화재 대책 회의를 주관하는 환경부의 주업무는 전기차 보조금, 충전기 설치 사업 등이다. 지하주차장 화재 등과 같은 대형 사회 재난은 행안부 소관이다. 배터리 한 품목과 관련된 주무 부처마저 제각각인 것이다.
전기차 화재는 주차·충전 중에 배터리 결함, 과충전·외부 충격으로 인한 기계적 결함, 셀 불량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앞으로 조사 과정을 통해 배터리 제조사의 셀 불량 문제와 과충전 및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결함을 놓고 제조사 간 첨예한 이견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업계는 배터리 셀 제조사 정보 공개에만 집중하고 있다.
12일 현대차가 가장 먼저 배터리 셀 제조사를 공개했다. 현대차는 홈페이지에 아이오닉5, 아이오닉6, GV60, G80 등 현대차 및 제네시스 등 총 13대의 배터리 제조사 현황을 공개했다. 현대차의 경우 코나 EV, 기아는 레이 EV와 니로 EV에만 중국 CATL 배터리가 사용됐다. 나머지 차종에는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국산 브랜드가 만든 배터리가 적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13일 벤츠코리아가 공개한 전기차 차종별 배터리 셀 제조사 현황을 보면, 차종 16개 중 13개에 CATL, 파라시스 등 중국 업체의 배터리가 탑재된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 청라에서 화재가 발생한 EQE 모델의 경우. CATL과 파라시스 배터리가 함께 탑재됐다. EQE 300에는 CATL이, EQE 350+, AMG EQE 53 4MATIC+, EQE 350 4MATIC에는 파라시스의 제품으로 알려졌다.
전기차 화재가 특정 제조사의 배터리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닌 만큼 배터리 공개와 개선만이 화재 사고 예방의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박진혁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내부적으로 배터리 발열이 일어날 수 있는데 여기서 원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품질의 퀄리티 차이는 있을 수 있다”며 “국내 배터리업체가 단가 계약부터 배터리 품질 관리 시스템까지 잘 갖춰져 있음에도 유독 국내에서 전기차 배터리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전기자동차의 배터리 제조사가 중국이라 문제가 된다는 식의 사고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논점을 흐리는 것이다”며 “정부는 지상으로 충전소를 이전하는 방안과 지하주차장의 폐쇄 공포감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알고도 안일한 대처… ‘전기차 포비아’ 극복이 최대 과제
이처럼 정부와 업계는 전기차 생태계를 위협하는 ‘전기차 포비아(phobia·공포)'를 잠재울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신속하게 내놔야 한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작성한 ‘주차장 구조·안전 기준 및 제도개선 연구보고서’에는 “전기차 전용 주차구역은 화재 안전 측면에서 지상층 옥외공간에 설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명시한 바 있다.
국토부는 전기차 화재안전기준 개정을 위한 태스크포스(TF)에서 지상 설치 의무화를 고려했지만 의견 수렴 과정에서 해당 안건을 제외했다.
이는 정부가 이전 연구용역이나 TF 등을 통해 이미 전기차 충전기의 지하 설치 위험성을 인지하고도 구체적인 안전 기준 개선이나 대책 마련은 하지 않은 것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 교수는 “국토부가 미리 전기차 충전시설 지하 설치의 위험성과 문제점을 인지했다면 지자체 등에 적극적으로 알리기라도 해야 했다”며 “별다른 대책 마련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말한다.
●전기차 배터리 90%이하 충전 효과 있나... 그 외 장기적 대처방안
정부는 13일 긴급 대책회의에서 모든 전기차에 배터리 정보 공개를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또 △전기차 배터리와 충전시설 안전성 강화 △화재 발생 시 신속한 대응 시스템 구축 △지하 주차시설 안전 강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단기 대책은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전기차 화재 방지를 위한 대책 발표도 한 발 늦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앞서 서울시는 다음 달 말까지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해 90% 이하로만 충전할 수 있게 제한된 전기차만 공동주택 지하주차장에 들어올 수 있게 권고했다. 다만 충전율이 제한되면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도 줄어 전기차 차주의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이외에 화재 확산을 막는 스프링클러 시스템의 상시작동 유지, 지상 전기차 충전소 설치를 위한 인센티브 제공, 충전소 인근 화재안전시설(참수조, 이동식 방사장치, 덮개식 질식 소화포) 강화 등의 대안을 당장 반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는 “배터리 제조사 공개도 실효성 있는 조치라기보단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라며 “전기차 보급 초창기에 화재 우려가 많이 나왔음에도 보급에만 치중하고 화재 예방 대책 마련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라고 아쉬워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배터리 제조사 공개와 소방 안전시설 점검은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라며 “앞으로 배터리 기업과 자동차 기업들이 품질 관리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배터리 제조사별 화재 발생률과 불량률 등 유형별로 통계를 내는 등 종합대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