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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의 진대법 정신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왕에 관한 이야기, 외교와 전쟁 추이, 별자리의 움직임, 기이하고 신령스런 현상, 그리고 자연재해 기록이 거의 전부다. 그 가운데 자연재해 부분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왕조가 자연재해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학자 신형식 선생의 저서 「삼국사기 종합적 연구」(2011, 경인문화사)에 삼국사기의 천재지변을 자세히 논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천재지변 가운데 농작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재해를 꼽아보면, 가뭄 108회, 홍수 42회, 대풍 32회, 지진 91회, 병충해 38회, 상해(서리 피해) 37회, 설해(폭설) 26회, 박해(우박피해) 36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신라와 고구려의 창건 시기인 BC 57년, 백제 창업 BC 18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하는 935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치면 그리 많은 자연재해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있었던 해에는 어김없이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을 것임이 틀림없다.

 

 

고구려 제9대왕 고국천왕(재위 179-197)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삼국을 통틀어 영명한 왕으로 칭할 만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초로 진대법을 실시했다.

 

“고국천왕은 이름은 남무이고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었다. 왕이 죽자 맏아들인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둘째를 왕으로 삼았다. 키가 9척이고 큰 솥을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다.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 너그러움과 날카로움을 겸비했다. 재위 2년에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재위 6년에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 왕이 왕자를 보내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해 왕이 친정에 나서 무찔러 적군의 목을 벤 것이 산더미와 같았다. 재위 12년에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어 그 자제들이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남의 자녀들을 약탈하고 백성의 토지와 집을 빼앗으니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더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

 

재위 13년 좌가려가 군사를 모아 왕경을 공격하니 왕이 지방의 군사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진압했다. 반란을 평정하고 왕이 말하기를 ‘근자에 벼슬은 정실에 의하여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으므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나의 왕실을 동요시키니 이것은 내가 정치에 밝지 못한 탓이다. 너의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하부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이에 4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니 왕이 안류를 불렀다.

 

안류는 왕에게 말하였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중대한 나랏일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손자인데 그의 성질이 굳세고 지혜가 깊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하므로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하고 있으니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실진대 이 사람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고 그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외람하게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앉았으나 덕이 엷고 재주가 없어 사리에 정통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곤궁하게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리고 왔으니 이는 비단 나에게 다행일 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의 행복이다. 그대의 가르침을 달게 받겠으니 그대가 마음을 다해 주기를 바란다.’

 

을파소가 생각하기를 자신의 마음은 나라에 이바지하고 싶으나 맡은바 직위(중외대부)가 족히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여 대답하기를 ‘저의 우둔한 품으로는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줌으로써 위업을 달성케 하소서.’ 하니 왕은 그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나랏일을 주관케 하였다.”

 

을파소가 선대왕 시절 대신을 지냈던 가문의 손자였다고하나 농사를 짓던 현자일 뿐이었다. 당시는 지역귀족들과 권력을 여전히 분점하고 있으면서 왕권을 강화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평민이나 다름없는 을파소가 오늘날 총리와 같은 국상으로 임명하였으니 반발이 있었다.


“(을파소가 국상으로 임명되자) 근신과 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 대신들을 이간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귀한 자나 천한 자나 할 것 없이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리라’ 하였다.”

 

과연 을파소는 국상의 책무를 잘 행하여 나라가 안정되었다. 왕은 을파소를 천거했던 안류를 불러 “만일 그대의 말이 없었더라면 내가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사업이 정돈된 것은 그대의 공이로다”하고 그를 대사자로 삼았다.

 

을파소를 기용하고 반발하는 귀족들을 물리쳤고, 또 그를 천거한 인물에게도 공을 치사한 것으로 볼 때 고국천왕은 매우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을 다루는 것이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세력을 멀리하고 뛰어난 인물을 택하여 맡기고 기다린다는 것은 결단력과 깊은 심지를 갖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고국천왕은 마침내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진대법을 실시한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을파소가 건의했다는 언급이 없었으나, 적어도 법제화와 시행은 을파소가 주도하였을 것이다.

 

“재위 16년,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서 곡식들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하다가 길에 앉아서 우는 자를 보고 어찌하여 우는가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을 팔아 어머님을 봉양하여 왔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곳이 없으므로 곡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슬프다!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막다른 골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무한 다음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들에 명령하였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제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광범위하게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 사이 관가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 있게 꾸어주었다가 겨울 10월에 가서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니 경향 백성들
이 크게 기뻐하였다.” (신편 삼국사기, 신서원 / 삼국사기,명문당 참조)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이전 왕들에게도 있었다. 민중왕 2년에 “여름 5월에 나라의 동부지역에 큰물이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 태조대왕 66년에 “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에 이어 즉위한 산상왕 재위 7년까지 국상으로 있다가 죽었던 것으로 봐서 진대법은 계속 실시됐을 것이다. 고구려의 진대법을 두고 중국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중국 제도의 도입이라기보다는 고조선의 홍익 정신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을 않을까 싶다. 굶주리는 동족을 돌보고자 하는 씨족 사회의 덕목이라고 보면 인류 보편적 동정심의 제도화로 볼 수도 있다. 진대법에 대해 훈고적 기원 찾기는 자칫 진대법이 함축하는 ‘인간사랑’의 뜻을 훼손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종교학자 윤이흠 선생은 그의 유고집 「한국의 종교와 종교사」에서 삼국 시대 이래 중국 한자를 문자로 받아들여 기록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고유의 제도조차도 중
국의 한자 용어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제도를, 그 용어가 유사하다 하여 깊은 숙고 없이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경계한 바 있다. 매우 타당한 지적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근래에 드러난 여러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로 볼 때 중국 기원의 한 줄기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3차례나 송나라를 다녀간 유학자로서 고국천왕의 진대법이 중국 제도의 모방이었다고 하면 밝히지 않을 리가 없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대로 홍익인간 정신의 제도화로 봐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닌 듯하다. 역사에서 보듯이 가진 자가 나누지 않으면 가난한 백성은 유리걸식하게 되어 나라가 쇠망한다. 통일 신라 말, 고려 말, 조선조 말 모두 가난한 백성을 거두지 못한 것이 멸망의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21세기 주기적 경제재해 시대, 한국의 ‘진대법’은 무엇인가

 

예전의 자연재해에 해당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경제적 약자층이 겪는 ‘경제적 재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세기말부터 경제위기의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그 파급의 강도도 깊고 넓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AI혁명의 파고가 거세게 넘실거리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AI혁명의 추세는 노동을 대체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데, 한국 과학기술계와 정책은 처음부터 인간 노동과 동반하는 방향으로 개발하고 그것을 제도와 시스템으로 도입하기를 바란다. 인간의 노동을 배제하는 AI혁명은 결국 극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케하고 다중을 곤핍하게 만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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