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플랫폼 역사상 가장 가장 빠르게 성장한 채널은 미국의 ‘미스터비스트(MrBeast)이라고 불리는 지미 도널드슨(Jimmy Donaldson)이 운영한다. 그의 메인 채널 구독자는 약 3억 명 이상이고, 여러 언어 채널과 보조 채널까지 4억~5억 명 수준의 구독자를 거느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대부분의 국가 인구보다 많고 세계 최대 방송사 몇 곳을 합친 시청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여기에선 영상만을 만드는 게 아니다. 초콜릿 브랜드, 패스트푸드 체인 등을 운영하는 그는 유튜브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큰 개인 미디어 권력 중 한 사람이다. 최근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은행과 유사한 금융 앱인 스텝(Step)을 인수해 금융사업까지 뛰어들었다고 한다. 금융 앱, 스텝(Step)은 청소년과 젊은 세대가 카드 사용과 저축, 신용 관리 등을 쉽게 경험하도록 돕는 서비스로 특히 부모의 계좌와 연동해 안전하게 금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함으로써 미국에서는 이미 상당한 사용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는 투자나 신용, 돈 관리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릴 때 갖지 못했던 금융 교육의 기반을 다음 세
오늘의 이란 사태를 이해하려면 ‘왜 자원 부국이 어떻게 어려운 길로 들어섰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흔히 이란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네덜란드병’이다. 천연자원 수출이 급증하면서 통화 가치가 상승하고, 제조업과 농업이 약해지며 경제 구조가 왜곡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말은 네덜란드에서 1960년대 천연가스가 발견된 이후 나타난 경제 현상에서 유래했다. 이란 역시 석유라는 축복 속에서 비슷한 함정에 빠졌다. 1970년대 이란은 겉으로 보기에 번영의 나라였다. 석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막대한 외화가 유입되었고, 수도 테헤란에는 고층 건물과 현대식 도로가 들어섰다. 당시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중동의 산업 강국으로 만들겠다며 대대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이 ‘백색혁명’이었다. 백색혁명은 토지 개혁, 여성 참정권, 교육 확대 등 겉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개혁처럼 보였다. 그러나 토지 개혁은 농민에게 충분한 생산 기반을 제공하지 못했고, 많은 농민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 채 도시로 떠났다. 이들이 도시 변두리에 모여 살며 거대한 빈민층을 형성해 나중에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특히 석유에서 나온 돈은 사회 전체로 퍼
연일 이어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그리고 이란의 보복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되살아난다. 이란 혁명 10주년 행사에 이란 정부 초청으로 수도 테헤란을 비롯하여 군 수송기를 타고 이란의 유전과 남쪽 도시를 방문했었다. 당시 거리에는 호메이니의 초상, 혁명수비대의 행진, 그리고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 밖에서 만난 시민들의 표정은 단선적이지 않았다. 혁명의 자부심과 피로감, 종교적 열정과 세속적 욕망이 한 도시의 공기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오늘 자 뉴욕타임스에 토머스 프리드먼이 기고한 관련 칼럼은 복합적인 이란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유용했다. 그는 중동 전쟁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하려면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머릿속에 담아둬야 한다고 했다. 종교, 석유, 부족 정치, 강대국 정치가 모든 주요 사건에 얽혀 있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흑백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다면 차라리 체스나 두는 게 나을 거라고까지 했다. 또 테헤란의 성직자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이번 노력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테헤란 신정정권은 자국민을 학살하고, 주변국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위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판결을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무기징역은 법정 최저형으로 국민의 법 감정에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증언의 신빙성, 절차적 공정성 등에 의문이라며 항소심에서 바로 잡혀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어떤 판결이든 의견이 둘로 갈라지는 장면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논쟁은 다 시 진영의 언어로 굳어가리라. ‘세상사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법도 한데 이번 재판을 지켜보며 유독 한쪽이 쓰렸다. 왜 그랬을까? 분열에 익숙해져서거나 재판이라는 제도가 갈등을 잠재우는 마지막 판결문이 되어 공동체를 설득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1심 판결이 나온 후 필자는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약 2000년 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를 떠올렸다. 노예였다가 주인으로부터 풀려나 철학자가 된 그는 로마 제국, 특히 스토아 철학이 크게 번성하던 때 활동했다. ‘세상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라’고 가르친 그의 철학적 힘을 빌리면, 세상의 저울이 미세하게 기울어진 느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의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영국 국민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순간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라고 말했다. 30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에서 국민은 헌법을 고칠 수도, 법을 만들 수도 없다. 입법권은 오직 국회에만 있고(헌법 제40조), 국민은 투표로 대표를 뽑는 것 외에는 정치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정치학자들은 이를 대의민주주의의 태생적 한계라고 부른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착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을 ‘선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추첨을 통해 작동했다. 아테네의 500인 평의회는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1년 임기로 교대하며 국정을 운영했다. 왜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는 귀족정의 원리이고, 추첨은 민주정의 원리”라고 명확히 구분했다. 선거는 필연적으로 엘리트를 선출하지만, 추첨은 평범한 시민 누구나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준다. 이 책은 추첨제가 중세까지
서울에서 식품 제조업체 창업을 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작은 소스 공장 하나를 차리려 해도 설비 비용, 임차료, 위생 설비, 냉장·냉동 시설, 포장라인 구축, HACCP 인증 비용까지 합치면 수억 원이 훌쩍 넘는다. 여기에 원재료 확보 비용과 인건비, 물류비까지 더하면 청년이나 소규모 창업자가 이를 감당하기에는 벽이 너무 높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브랜드는 서울에, 제조는 지방에서’라는 이원적 구조를 선택한다. 당연히 서울은 마케팅과 유통의 도시가 되고, 제조는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지금, 이 구조는 재검토할 시점에 와 있다. 최근 K-푸드 수출은 124억 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고, 5년 연속 1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라면, 김, 김치, 소스류, 과일 가공품 등 다양한 품목이 글로벌 시장을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외형적 성장과 달리 제조 현장의 디지털화 수준은 매우 낮다. ◇ 스마트공장의 필요성 국내 식품 제조기업의 스마트공장 도입률은 2.3%에 불과하다. 근로자 10인 미만 기업은 이 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식품산업은 여전히 영세 구조에 머물러 있으며, 원재료 가격 변동과 인건비 상승, 물류비 증
1년 전, 우리의 무심한 일상을 흔들었던 계엄령 포고를 듣고 분노하면서 늦은 시간 각지에서 달려가 계엄군의 탱크를 막아서는 민주시민들의 모습이 생중계됐다. 계엄은 헌법 절차를 통해 해제되었다. 이후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적대국에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의 비상식적인 계략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다시금 악의 평범함을 떠올린다. 새로운 입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던 자들의 수많은 조작과 위증이 특검을 통해 어느 정 도는 사실에 근거한 퍼즐로 맞춰지면서 임무에 종사했던 각 분야의 권력자들과 군인,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그를 위한 방어 전략에 목숨을 건 듯했다. 불법 계엄 파동이후 국가 경제는 휘청거렸고 서민들의 삶은 더 위태로워졌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이 오늘의 현실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사유하지 않는 자들의 평범한 악행이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음이다. 광주 민중항쟁에서 축적된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또 △사이비 신념 △음모론의 확장 △확증편향의 선동과 억지 주장 등등의 부조리한 사태는 최소한의 이해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국정 책임자인 장관이라는 자는 법정에 나와 대통령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
근대철학의 이단아인 스피노자(1632~1677)는 23살 때 ‘신을 다르게 이해한다’는 이유로 암스테르담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을 당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지 않고 조용히 현미경과 망원경용 유리 렌즈를 갈아 만드는 일을 하며 철학 연구에 전념했는데 아쉽게도 1677년 2월 21일 44살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작 《에티카》는 그가 죽은 뒤 친구들이 원고를 정리해 출판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떤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나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답했다. 우주의 조화로운 법칙을 경외했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우주가 수학적 질서 속에서 필연적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할 때 전 세계를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실제로 그는 평생 스피노자를 존경했다. 물리학의 거인이 스피노자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는데 우리 가운데 과연 철학자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를 말하는 노자의 도덕경에 마음이 끌리고 있지만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뒤처지는 철학이 아닐까 싶어 선뜻 마음에 품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