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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미국이 먼저 반한 한국 인디(indie)‘줄리아드림’을 만나다.

표현이 자유로워서 좋아요


한국 인디음악은 메이저 시장인 K-POP에 가려져 마이너라는 인식을 하며 미디어와 대중들의 관심에서 외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씬에는 숨어있는 보석 같은 존재가 많다. 독립적인 환경에서 음악 제작하고 연습하는 뮤지션들의 열정에 비해 대한민국의 평가는 관심도에서부터 -POP과 비교도 하기 힘들다. 우리 인디음악은 대중이 위상을 높이고 가치를 인정한다면 제2의 한류로 만들기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성장했다. 스스로 자금을 마련해 얼마 전 미국투어를 성공리에 다녀온 줄리아드림이라는 밴드는, 우리나라에서 들어보기 힘든 사이키델릭 록을 하는 팀이다. 이 팀은 미국시장에서 첫 공연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미국 진출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번 호에서는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한 인디밴드의 미국 진출기를 들어보기위해 밴드 줄리아드림을 만나봤다.


줄리아드림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박준형(기타), 손병규(베이스), 염상훈(드럼)으로 이루어진 사이키델릭 록그룹으로 60~70년대 주를 이룬 사이키델릭이나 프로그레시브 록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곡을 만들고 연주하는 밴드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줄리아드림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역을 하고 25살에 처음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어요. 상훈이는 그때부터 함께 했는데 3인조로 활동을 하다가 팀이 깨지면서 여러 밴드를 함께 옮겨 다녔죠. 그렇게 3년쯤 활동하다가 지금의 줄리아드림과 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구상이 떠올랐죠. 그래서 상훈이와 함께 베이스포지션을 찾기위해 1년 가까이 오디션을 봤고, 2013년 상훈이와 같이 군악대를 나온 병규(베이스)가 합류하면서 지금의 줄리아드림이 만들어진 겁니다.


줄리아드림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가 있나요?


밴드이름은 원래부터 좋아하던 핑크플로이드의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곡 제목이에요.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줄리아에서 느껴지는 여성적인 이미지와 여성과는 거리가 먼 저희 음악의 상반된 이미지가 좋았어요. 그래서 이름을 줄리아드림이라고 지었어요.


장르가 어려울 것 같은데...?


우리가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를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 시대 음악이 좋다고 생각해요. 표현이 자유롭다는 점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감정에 대해 직접 표현이 가능한 음악이라면 우리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하다 보니 그쪽 장르와 맞은 거지 ‘우리가 이 장르를 해보자!’ 해서 한 것은 아닌 거죠. 물론 사이키델릭이나 프로그레시브 장르가 우리 생각을 표현하기 좋은 장르였죠. 실제로 Minor extacy blues라는 제목의 블루스풍 음악도 있고요.


사이키델릭이라는 장르가 생소한데 소개해주시죠.


사이키델릭이 생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이 음악이 원래 약물 음악이에요. 간단히 말하면 약물을 하면서 느끼는 감흥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 사이키델릭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에서 뭐 이런 걸 하나’ 이렇게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하는 음악은 훨씬 더 모던하고 들었을 때 이해가 될 만한 수준의 음악이에요.


줄리아드림의 음악은 일반적인 곡들보다 길게 느껴지던데...


길게 만들려고 만드는 건 아니고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곡이 길어진 거죠. 보통 4~5분 듣고 딱 좋다 이런 음악이 아니고 음악 자체에 빠져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요. 중간에 즉흥적인 연주도 많이 들어가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길어진 것 같아요.


대표적인 곡은 어떤 건가요?


대표적인 곡이 ‘가위’라는 곡인데 이 곡은 1·2·3으로 나뉘어요. 앨범에는 3곡으로 나뉘어 있는데 실제로는 한 곡이죠. 가위는 말 그대로 가위눌림을 바탕으로 쓴 곡이에요. 가사도 가위눌림에 대한 은유가 담겨 있고요. 파트2 같은 경우 장시간 동안 기타 솔로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가위눌림. 자체의 비명이나 괴로움을 표현하고자 했어요. 이 곡에서는 가위눌림. 자체가 아니라 삶에서 오는 무게나 괴로움에 대해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곡이 지금까지 연주한 곡 가운데 제일 길죠.


곡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곡을 만들 때 처음에는 잼을 해서 만들어요. 잼으로 연주하다가 이거 좋다고 하면 그 부분을 떼어내서 곡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아이디어는 즉흥적으로 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인데 좋은 곡은 내버려두고 안 좋은 곡은 내치고 아쉬운 부분은 수정하면서 곡을 만듭니다.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지난해 앨범 내고 쇼케이스한 것과 미국투어 다녀온 게 베스트 에피소드라 할 수 있어요. 우리끼리 재미있었던 사건은 사기꾼을 잡은 애피소드도 하나 있는데. (웃음). 사기꾼은 자신의 아버지께 사기를 치고 한 2년을 잠적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명한테 몇십억 사기 친겁니다. 그 사람이 지방 어디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며칠 동안 잠복해 식당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몰아서 잡았어요. 어쩌다 보니 밴드 활동하면서 사기꾼 잡은 게 특별한 경험이 됐네요.


미국투어를 다녀오신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다녀오시게 된 건가요?


미국밴드가 한국에 공연하러 왔다가 우연히 같이 공연을 하게 됐어요. 그 친구들이 같이 미국투어를 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원래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차에 좋은 기회가 된 거죠. 한두 번 공연하는 게 아니라 3주동안 12번 공연했는데 미국 서부 전 지역과 캐나다 밴쿠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대장정이었어요. 투어 형태였는데, 영화에서 보면 낡은 밴을 타고 다니면서 공연하잖아요. 미국밴드와 함께 두 팀이 서로 운전해가면서 몇 천 킬로를 달리면서 공연을 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외국에서 밴 타고 여행을 하는 게 로망이었는데 제안이 오다 보니 무작정 시작한 거죠.


주로 어떤 도시에서 공연을 했나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해 오클랜드에서 3~4일정도 공연을 했고, 그다음에는 오클랜드-코티지그로브-벨링햄-올림피아-터코마-시애틀-밴쿠버-에버릿-모스코우-포틀랜드-알라메다 순으로 공연 했어요. 투어 중에 성과도 있었죠. 페스티벌 세 군데에서 초청을 받았거든요. 밴쿠버에서 10월, 8월에 포틀랜드와 시애틀에서 사이키델릭 페스티벌이 3주 차이로요. 상 밴쿠버 페스티벌은 시간상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포틀랜드와 시에틀 페스티벌에만 참석하기로 했어요.


경비 마련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일일단 각자가 흩어져 돈을 벌었고, 페이스북에서 팬들을 대상으로 펀딩도 했어요. 팬들께서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팬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힘들었겠죠. 지금도 정말 감사해요. 미국에 가서는 미국팀이 지인들 위주로 숙박을 마련해 줬죠, 어느 날은 관객 중 한 분이 재워 주신 적도 있고요. 침낭 깔고 지하실에서 잔적도 있고요. 공연장에서 저희앨범 씨디가 상당히 많이 팔렸어요. 100장 들고 가서 100장이 다 팔려서 나중에는 미국 친구들에게 기름 값도 보태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죠. 생각보다 우리 음악이 미국에서는 반응이 좋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더 활동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더라고요.


미국의 공연문화는 어떤 것 같나요?


일단은 우리나라 클럽과는 다르게 미국은 바 같은 개념이라서 우리나라같이 술집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또 항상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돼 있고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죠. 관객의 호응도도 좋아서 공연이 끝나면 무대 위에 올라와 공연이 좋다고 악수도 청하고요. 뮤지션에게 편하게 해주고 대접도 해주는 것 같았어요. 미국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앵콜이 계속 반복되다 더는 연주할 곡이 없는데도 나중에는 마지막곡에 대한 돈을 내겠다는 사람도 나왔어요. 그래서 즉흥연주로 미국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리랑을 연주했죠. 클럽에서 한국에서 온다고 미리 홍보해 준적도 있었는데 공연장이 꽉 찼던 적도 있었어요. 지역 매거진에서 저희 기사를 싣기도 하고 진짜 좋았어요.


밴드를 하시면서 힘든 점은 무언가요?


일단은 금전적인 부분이 제일 커요. 큰돈을 벌어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밴드를 유지하면서 앨범을 지속적으로 내고 싶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앨범을 판매해도 수익이 나오지 않다 보니 가장 힘들죠.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강남스타일 앨범 수익이 6000만원였다고 하니 진짜 힘든 거죠. 팀들끼리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종종 다투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 자체도 우리에겐 즐거움이죠. 거기서 또 시작되는 거니까요. 지금은 힘든 점보다는 음악을 하는 과정과 작업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10년 뒤에 줄리아드림은 어떤 모습일까요?


10년 뒤에도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음악도 만들고 합주도 하면서 연습을 많이 하는 그런 밴드였으면 좋겠어요. 많은 밴드가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안정감을 가지면 그 유명세로 가잖아요. 그게 밴드로써 생명력을 잃게 되는 거거든요. 외국의 노장들은 끊임없이 앨범을 발매하고 연주하는 걸 보고 느끼는 게 많았어요. 줄리아드림은 10년 뒤에도 살아 숨 쉬는, 그래서 멋진 음악을 하는 그런 밴드가 되고 싶어요. 해외에서도 연주할 수 있는 뮤지션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MeCONOMY Magazine Ju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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