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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여자정신대(挺身隊)의 기억과 진실 [Ⅱ]

식민지조선의 현실과 여성

[박광준 일본 붓쿄대학 교수] 이번 글에서는 식민통치시스템과 그 특징, 조선의 빈곤실태와 여성의 삶, 그리고 여자정신대 나이 또래 여성들의 노동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이러한 부분들은 여자정신대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따지고 보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정신대에 관한 오해가 오래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오해에는 다음 네 가지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첫째, 정신대를 포함한 노무 동원 논의에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한 논의들이 적지 않았다. 식민지 경험은 일본으로 동원된 사람들 만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全)민족적 수난이었다. 조선 내 공장에도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고 혹은 지금은 이름조차 찾을 수 없는 사업체에 동원되어, 그 피해를 하소연할 곳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어린 학생들도 공부 대신 송진 채취에 동원되었다.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둘째,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극도의 빈곤이 파생시킨 다양한 사회악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식민지기 내내 전통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빈곤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여성차별, 그리고 경제활동 유인을 억압하는 의식구조에는 이렇다할 개선이 없었다. 더구나 일제 말기는 극단적 전시체제였다.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전혀 정상적 사회가 아니었다. 여자정신대가 일했던 기업의 급여봉투에는 [천황을 위해 살고 천황을 위해 노동하며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세 줄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셋째, 비과학적 설명의 만연과 표절을 예사롭게 생각하는 문화가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조선은 말 언어와 기록언어가 다른 언문 불일치 사회였고, 사대부라도 한문 문장 만들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이나 다른 이의 문장 일부를 떼어 와서
글을 짓는 경우가 흔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최초의 언문일치 저술인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상당 부분 그대로 번역해 실은 것이다. 나는 오늘날 학계의 기준으로 이러한 당시 풍토를 비난할 의도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다른 저작이나 신문보도를 검증 없이 그대로 옮기는 경향이 해방 이후 한동안 학계에도 만연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릇된 사실인식을 확산시키게 했음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역사관과 관련된 문제로서, 학계와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피지배층을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대원들은 주체적 인간이었으며 우편이나 전신연락 등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고향집에 연락해서 미숫가루나 고구마, 김치 등을 부쳐 받았다. 일본 공장에서는 집단으로 항의를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정신대로 일본에 간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심정으로 정신대에 지원한 한 소녀는, 자신이 일하던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공장의 허가를 얻어 토야마(富山) 공장으로 찾아가서 언니를 만나기도 했다.(현재 특급열차로도 4시간 이상 거리)

 

모집인을 통하여 일본으로 간 일반 조선 여공들은 조선에서 들었던 노동조건과 현실이 다르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서에 집단으로 몰려가 해결을 요구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일하는 아버지 이름만을 들고 도쿄의 파출소에 찾아가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읍소하여 결국 아버지를 만나는 여공도 있었다. 조선 내에서도 공장주의 횡포를 막아달라고 여공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진정하는 신문 기사가 1920년대 이후 적지 않게 보인다. 여공들은 스스로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주체적 인간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지배자 중심의 역사관에 반성을 요구한다. 미야지마(宮嶋博史)는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조선 농지 40% 수탈설]에 대해 [토지 40% 수탈설만큼 조선 농민을 우습게 보는 시각도 없다]는 논평했다. 이 말은 농민 등을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보아온 역사관, 그리고 그 뿌리에 있는 민중에 대한 폄하적 인간관에 대한 통렬한 충고이다.

 

 

식민지통치기구와 조직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합병되었고 다음 날 조선총독부 체제가 시작되었다. 무관인 조선 총독은 일본국왕에 직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책 결정에서 일본 내각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총독 역임 후 일본 총리대신이 된 자가 3명이나 있었고, 거꾸로 총리대신 경험자가 총독으로 부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조선 총독은 요직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개별 정책에서 일본 내각과 의견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총독부는 일본내각(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업을 찾기 위한 조선인의 일본도항을 1940년경까지 추진했다.

 

일본의 전통적 통치체제는 조선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메이지유신(1868) 이후 일본 국가체제는 [미숙한 민주주의와 강한 법치주의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진다. 에도(江戶)시대에도 인민에 대한 장악력은 조선왕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다. 조선에서도 국가권력과 행정력이 국민생활의 말단까지 미치게 되었다.일본 헌법은 식민지에 적용되지 않았고, 식민지 거주자는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국정의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일본 거주자라면 조선인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조선인 첫 일본 제국의회 국회의원인 박춘금은 1932년 중의원(衆議院) 선거(도쿄4구)에서 당선된 인물이다.(5년 후에도 당선) 그 밖에 지방의원 선거에서도 조선인의 당선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의 지방 행정조직은 [13도(道) 12부(府) 317군(郡) 4,322면(面)]이었는데, 합병 직후(1914년) [12부 220군 2,522면]으로 개편된 후, 1931년에는 지정면(指定面)을 읍으로 승격시키는 변화가 있었으나 큰 틀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해방 직전에는 [21부 218군 2도(울릉도 및 제주도), 114읍, 2,211면]체제였다. 부는 도시지역으로 주로 개항지였으며 따라서 식민지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지방조직의 중추는 군(郡)이었지만, 면(面) 조직을 공식화하고 그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일제 지방개혁의 기조였다. 면은 지방공공단체는 아니었으나 제한적 재정권(면민에 대한 부과금 징수나 부역 징수 등)이 주어졌다.

 

경찰제도는 정신대를 비롯한 노무동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자였다. 직업알선은 경찰의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무동원 전반에 경찰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군헌병대가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헌병경찰제도는 3.1운동 이후 중앙집권적 경찰제도로 전환되어, [총독부 경무국-각도 경찰부서-각 군 경찰서-경찰관 파출소 혹은 경찰관 주재소]체제가 확립되었다. 다만 군헌병의 관여(조선에는 2개 군단 병력이 주둔했다)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국경이나 군사시설지역 등, 그리고 주재소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헌병분대가 경찰 역할을 담당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 예산은 약 5,000만 엔이었는데, 그 중 약 1,250만 엔이 일본의 무상보조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재정자립을 추진했지만 그 후에도 재정보조금을 줄이지 못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재정에서 일본의 보조금이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고 해서, 조선인의 재정부담이 적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의무교육이 시행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학교 운영이 학부모 부담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국민학교 건립이나 면사무소 건립 등도 대부분 조선인의 잡부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세금이나 잡부금 징수도 매우 철저했다. 식민지지배와 조선인 관료 조선총독부의 요직은 압도적으로 일본인이 차지했다. 총독부 직원의 계급은 국왕으로부터 임명되는 칙임관(勅任官), 총독이 내각에 신청하여 임명되는 주임관(奏任官. 1등-8등), 조선 총독이 임명하는 판임관(判任官)이 있었다. 칙임관은 장기간 근무한 주임관 중에서 극히 일부가 선정되었다. 한반도에 관한 역사가 커밍스(Bruce Cummings)는 식민지 말기 10년 동안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에서 차지하는 조선인 비율은18-22%, 절대수로 본다면 442명 정도였고, 경찰의 경우는 13-19% (210명에서 251명)였으며, 조선인 판사나 검사 역시 그 정도 비율이었다고 추산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직원 수는 151,700명 중 조선인은 74,107명(48.9%)이었는데 상대적으로 하급직들이었다. 거기에 읍면 직원이 79,523명이었다.


지방행정기관의 관리는 조선인이 보다 많았다. 대한제국 군수는 유임되어 합병 초기에는 모든 군수가 조선인이었다. 군수 대부분은 의병토벌 등에 기여한 무관출신자 혹은 한말 정치변동 속에서 일본에 망명한 적이 있는 친일 관료들이었으며, 일제의 조선 침략에 적극 협력했던 일진회 회원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군수는 조선인으로 임명한다는 원칙은 해방 때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실제 군청 행정에서 그 실권은 하급자인 일본인 관리에게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일본인 우위, 즉 민족 차별은 확고한 원칙이었다. 일본이 자치단체적 성격을 부여한 면장도 거의가 조선인이었다. 주목할 점은 도시지역인 부(府)의 장인 부윤(府尹)은 일본인으로 임명했다는 점이다.(예외적으로 개성부의 부윤은 조선인)

 

도장관(지사)의 경우, 조선총독부 출범 시 13개도 중 조선인 장관은 6명이었다. 당시 도지사는 대부분 개화기 일본 망명 경험자였지만, 1930년대 이후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관리를 거쳐 도지사가 되는 조선인도 있었다. 조선인 관리의 임금은 일제 말기에 본봉은 일본인과 같아졌다고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외지(外地)수당을 비롯한 수당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임금 차별은 현격했다.

 

일제의 조선인 관리 양성 원칙은, 첫째, 식민통치 협력자들을 최고 수준으로 처우하는 것이었다. 순종 등 왕족은 차치하더라도, 76명의 조선 귀족을 임명하여(유길준 등 6명은 거부함) 하사금과 은사공채 이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 외에 고위관료 혹은 그 유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처우했다. 그 대상자는 3600명 이상이었고 지급금 규모는 1911년 총독부 예산의 15%를 넘는 대규모였다. 그 돈은 주로 토지구입에 씌여져서 조선귀족들은 대지주로 변신하고 그것이 조선 지배층 지속의 원인이라고 지적된다. 식민통치의 대가로 돈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을사[오적]이라는 정형문구 뒤에 숨어서 안도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야말로 을사오적이라는 낱말을 적극적으로 퍼뜨렸던 장본인일지 모른다.

 

총독부체제하 한인지배층의 특징은 [전통적 지배층인 문과급제자가 몰락하고 무관급제자가 승승장구하여 한인 지배층의 핵심을 형성해 가는 것]이었다.(김영모 [일제하 한인지배층 연구] 2009). 국정운영에 자본가와 지주 계급을 끌어들이는 것, 그리고 관료를 추천제로 모집하는 것은 일본 정치문화의 특징적 현상인데, 그러한 관행이 조선에 이식되어, 대지주와 상공인 자녀들이 유학 등을 통하여 식민지 관료나 지도층으로 재등장해 가는 것이다.


지방관리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그들 모두를 일제 협력자라는 동질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하다. 관리를 지망하는 조선인들은 엄청난 숫자였고 그들은 그중의 일부였다. 적지 않은 관리들은 차가운 민족차별 속에서, 조선의 현실과 일본의 통치정책 사이에서 고뇌했다. 나는 조선에서 여성 노동자 등을 보호하기 위한 공장법 도입 논의를 살펴보았는데, 공장법 도입 움직임은 1930년대 그 주무부서인 총독부 사회과장에 유만겸(兪萬兼)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연속적으로 취임했던 사실과 관련되어 있었다.(공장법 제정은 자본주의 진행속도를 늦춘다고 주장한 식산국의 반대로 무산) 유만겸은 그 후 충청북도 지사를 역임했지만 창씨개명(1940.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은 강제, 이름 바꾸기는 자유)을 끝내 거부하여 총독부의 압력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유길준의 장남이다. 한편, 식민지 말기에는 한인 하급관리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그것은 일본이 전쟁체제에 돌입하면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남자 관리들이 징용되자 그 자리가 한인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들 중 다수는 노무 동원의 하수인이 되었고 그 수법이 대체로 거칠었다. 그 점은 많은 증언을 통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방되자마자 민중들이 하급 관리들을 격렬하게 공격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 극단적 빈곤 시달리고 여성 희생 커

 

새삼 언급할 것까지도 없지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은 조선 인민을 살기 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동기가 [국방과 식량의 확보]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란 없다. 조선의 만성적 빈곤 해소는 일제의 정책 우선순위가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통사회에서 빈곤 구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조선과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조선왕조가 국가구제 원칙을 고수했다면, 일본은 철저한 자기 책임주의였기 때문이다. 에도시대에 일어난 근면혁명은 개인책임주의, 자조(自助) 이데올로기를 확립했다. 빈곤 문제는 빈민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고 행정은 다만 그 보조적 지원을 한다는 것이 일본의 원칙적 태도였다. 오늘날도 일본의 노동윤리는 세계에서도 단연히 높다. 식민지기 빈곤 구제비 지출의 대부분은 자연재해 구제비였다. 조선의 만성적 농촌 빈곤이 식민지기에 개선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일제통치하 조선의 빈곤 문제는 [전통적 빈곤문제의 심화와 식량부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식량은 일본 수출로 인하여 절대량이 부족하여 조 등을 만주에서 수입했다. 식량부족은 식량가격의 상승을 불러왔기 때문에 빈곤층의 삶을 더욱 악화시켰고 거기에 인구증가까지 겹쳤다.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은 착취성이 강한 소작료 부담에 신음했다. 자연재해는 곧바로 기근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공업화가 진전되지 않았고 이농 인구를 흡수할 산업이 없었으므로, 농민들은 쉽사리 농촌을 떠날 수도 없었다. 식민통치의 가장 심각한 피해자는 바로 몰락한 농민층이었다. 화전민, 도시 토막민, 일본이나 만주 등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었다.

 

당시 민족신문들은 조선의 농촌 빈곤이 극도에 달했음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홍수나 가뭄으로 흉년이 든 해에는 평소 1년에 100석(石)의 쌀 수확은 가진 부유한 농민조차도 소나무 껍질로 입에 풀칠을 해야 할 정도였다. 빈곤과 기근은 사회 전반에 도덕규범의 파괴라는 폐해를 불러왔고 특히 아동과 여성은 가장 취약한 희생자였다. 아동유기가 빈발했고, 양녀나 딸을 유흥업소 등에 파는 행위는 진귀한 일이 아니었으며 소녀들의 가출문제도 심각했다. 소녀 가출이 많았던 것에는 가출 즉시 일할 수 있는 술집 등이 많았기 때문이고, 다시 그 배경에는 남자가 시중드는 여자 없는 음식점에는 들어가지 않는 풍토가 있었다. 기아(棄兒)와 인신매매는 기근 발생 시에 더욱 심했는데, 기아 중에는 여자아이가 많았다. 아동유기는 원하지 않는 출산으로 인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 내 매춘산업의 확산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대구는 특출하게 기아 수가 많아 민족신문이나 매일신보, 그리고 지역신문에서도 [기아도시]라고 일컬어졌다.

 

인신매매 역시 극심했다. 1920년대 초에는 조선에서 버려진 여아들을 상대로 인신매매를 행하는 중국인들 문제가 자주 보도된다. 중국인 [여아도적단], [아해도적]으로 일컬어지는 무리들이 평양지방과 전라도 지역을 무대로 버려진 여아를 노리고 납치하기도 했다. 그 희생자들은 장차 성산업에 종사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신매매를 근절하자]는 신문사설을 비롯하여 여자를 유흥가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기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유괴마](誘拐魔)라는 용어도 등장하는데, 한 사건의 피해자가 100명인 경우나 65명 이상인 엄청난 사건도 있다.

 

여자를 유인 납치하여 해외에 팔아넘기는 사건도 적지않았다. 동아일보(1928.11.14)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자의 동기 대부분이 인신매매 업자의 꾐에 빠진 것이라는 점, 1,743명 중 친권자에게 팔린 사람이 1,485명이요 정부(情夫)에게 속아 넘어간 자도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일본인의 경우 부모·형제를 위하여 몸을 희생한 자가 많은 것이 조선과는 다른 특징이라고 전한다.

 

 

조선의 여공, 가혹한 노동에 반발도
 

여성의 취학 기회는 남자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았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조선인 국민학교 취학률은 1935년 시점에서 17.6%에 불과했고, 특히 여자는 7.3%였다.(남자 27.2%) 1930년 인구조사 결과(문자이해율)를 보면, 경기도 전체 조선인 중에서 일본어 혹은 한글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은 70.7%(남자 57.6%, 여자 84.4%)였으며 강원도의 경우 80.0%(남자 66.9%, 여자 94.6%)였다. 그 후 국민학교 취학률은 급속히 높아졌으나, 1944년 정신대 동원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도 여자의 국졸 학력(여자정신대 새상자)은 중산층과 같은 의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 조선에는 151개의 공장에 직공 총수는 8,203명(일본인 1,486명, 조선인 6,637명, 외국인 98명)에 불과했다. 명백히 산업화 이전의 사회였다. 그 후 산업화는 아주 느리게 진행되다가 1920년대 말에 조선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전력개발과 더불어 일본 중공업이 전개되고 방적 자본이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영세한 공장에 유년공이나 여공도 증가했다. 1920년대 초부터는 방적공장 등 여공들의 애환과 노동쟁의가 많이 등장하고 공장법 등 노동자 보호가 필요하다는 논의들이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방적 자본이 함흥, 광주, 경성(서울) 등에 세운 대규모 공장에는 많은 여공이 채용되었다. 방적 자본의 조선 진출에는 일본에서 여공 모집이 어려워졌다는 사정이 있었다. 일본 산업화는 19세기 말부터 방적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열악한 환경과 가혹한 임금, 질병 등 여공의 비참했던 현실은 이미 1900년에 들어서면서 입소문으로 사회에 알려졌고, 따라서 여공모집이 점차 어려워졌다. 거기에 조선에는 기업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적었다는 점(공장법 미도입 등), 그리고 기업과 행정기관의 이해가 일본에 비해서 비교적 일치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1928년 함흥에서 문을 연 일본 카타쿠라방적(片倉製絲紡績)은 나가노(長野縣) 오카야(岡谷)에 본 공장을 가지고 있었고, 전주와 이리 등에도 제사시험소를 가지고 있었다. 오카야에는 한 때 여공만도 3만명이 모였던 곳인데 1910년대부터 조선여공도 진출했다.

 

거기에 있는 스와코(諏訪湖)라는 호수에는 공장생활을 견디기 힘들고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일본 여공들이 투신하는 일이 많아 [까마귀가 울지 않는 날은 있어도 스와코에 여공이 투신하지 않는 날은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일본 방적 자본이 일본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이식했다고 하더라도, 조선 여공들에게는 심각한 폐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조선에 비하여 노동 강도가 높았으며 게다가 조선 여공들은 자본주의적 노동방식이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공장법도 시행되지 않던 조선의 여공 처우가 일본 여공들보다 나았을 리가 없다.

 

혹사 노동을 전제로 한 일본 방적 자본의 속성에 더하여, 조선사회의 여자멸시 문화는 여공의 삶을 더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공장조직의 말단인 반장과 조장은 조선인 남자였는데, 그들에게 여공의 인격존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가혹한 노동조건에 여공들은 반발했고 회사는 폭력적으로 대응했으며 그로 인하여 파업 등이 발생하는 등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카네보(鐘淵紡績. 제사공장) 광주공장의 경우, 15세~17세 여공의 노동시간은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까지였는데, 임금은 하루 25전에 식비가 15전을 제하면 한 달에 손에 남는 돈은 3엔이었다. 1927년 직조산업 종사 여공 임금은 하루 20전에서 40전, 30일 모두 일하더라도 6엔에서 12엔 수준이며, 거기에서 식비 등이 공제되었다. 1932년 경성부 임금조사에 의하면 연소노동자와 여공의 임금은 1일 20전에서 50전, 12시간 노동 여공의 최고임금이 60전이었다. 1935년 10월, 100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의 임금조사에 의하면 연소 여공의 임금은 39전이었다.

 

카네보를 비롯한 일본 대기업 여공들의 임금도 하루 20전에서 45전이었다. 조선 내에서 여공을 모집하는 주된 경로는, [모집쟁이]라고 불리던 모집책에 의한 모집이 많았다. 즉 남자노동자 모집에서 보여지는 연고모집(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고향이나 지인을 소개하여 데려오는 모집방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연고모집이란 대량의 인원모집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다. 여공 1인당 소개료를 지불하는 모집책을 통하여 노동자를 모집하는 일본방식이었기 때문에, 모집쟁이들은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하여 여공을 유인했고, 일단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면 여공의 자유가 크게 제한당했다.


일본의 조선 여공, 한때 11,000여 명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여공의 실태에 대해서는 당사자 면담 조사가 병행된 김찬정 방선희의 훌륭한 선행연구(金賛汀"E方鮮P,『風の慟哭:在日朝鮮人女工の生活と- 史』)가 있다. 거기에 담긴 구술기록은 당사자들의 솔직한 육성이 담긴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선배 연구자들의 노력에 머리가 조아려진다. 일본 농상무성 1917년 공장감독관 조사보고서에는 당시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과 고용 시점이 나와 있는데, 셋츠(攝津)방적 키즈가와(木津川. 大阪府) 공장은 1911년부터, 동 아카시(明石)공장(兵庫縣)은 1912년 6월로 되어 있다. 전자는 1913년 5월 조선에서 16명의 여공을 모집했고 그 이후에도 11차례 모집으로 모두 208명을 모집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 여공이 일본공장에 고용된 사실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다음은 [방적공장의 조선여공]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이다(大阪朝日新聞, 1913.12.26. 필자가 확인한 한 조선 여공에 관한 최초 기사): [오사카지역 방적산업에서는 여공이 부족하여 조선인 여공을 사용하는데 그 인원은 사업장에 따라 50여 명으로부터 5~6명으로 다양하다. 조선인 여공은 일본여공에 비하여 유순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남자 사귀는 성향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셋츠방적에서도 금년 6월 경남 진주로 출장 14세~27세 19명을 모집(3년 계약)했다. 그들은 지금 주야 2교대, 임금은 1일 18전에서 25전까지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몰라 불편했으나, 모 학교 교장을 일본어교사로 모셔 일본어를 매일 3시간 정도 가르쳐서 지금은 일상회화뿐만 아니라 편지도 쓸 수 있다.]

 

재일조선인 여공의 수는 1922년에는 전국에 11,010명으로 증가하는데, 조선 여공이 증가함에 따라 1919년이 되면 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공장은 조선인 남자를 감독으로 채용하기 시작한다. 1930년 시점에서 일본의 방적 제사여공에서 차지하는 조선 여공의 비율은 3% 정도로 추정되지만, 오사카지역처럼 조선 여공이 밀집된 지역에서는 전체 여공의 20% 정도가 조선 여공인 경우도 있었다. 조선 여공의 동기와 경로를 보면, 조선의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고, 주로 일본기업이 채용한 모집인을 통하여 일본으로 갔다. 모집인들은 빈곤한 농촌 지역에서 여공을 모집했다. 집에서 나가는 것은 [한사람 입을 더는 것]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일하던 친척을 통하여 취업한 경우도 있고, 일본 방적 공장의 모집인을 보았을 때, 이젠 살았다는 기분으로 모집에 응했다는 사례도 있다. 취업 활동에는 여비나 경비가 들기 때문에 빈곤층이 직업을 찾기는 매우어려웠으므로 모집인이 찾아오는 것은 빈곤층에게는 큰 기회로 여겨졌다. 가족관계의 결속이 남다른 조선 사회 특유의 현상일지 모르나, 일본에 있는 부모나 남편 등 가족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의 여공 모집에 응한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이미 여공으로 일본에 가 있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일본 여공이 된 후 일본의 방적 공장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재회한 경우도 있다. 또한 조선 여공이 아버지를 찾아 나서 결국은 10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한 일본 신문 보도도 있다.

 

 

그런데 여공 모집인의 농간에 의한 피해 역시 심각했다. 모집인 보수는 모집된 인원수에 따라 정해졌으므로 그들은 과대광고로 여공을 모집했다. 하루 3엔의 임금이라거나 3년 일하면 300엔을 모을 수 있다고도 선전했다. 노동자 모집에서 숙련공 최고임금 수준을 선전하는 행태는 1940년대 광부 모집에서도 되풀이되던 것이었다. 이미 선지급된 임금을 모집인이 착복하여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피해는 인솔 도중에 여자를 일본 유흥가에 팔아넘기는 경우였다. 이러한 피해사례로 인하여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에는 여자의 일본 도항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기근이 이어지고 식량부족이 심화되자 조선인이 일본으로 나가 취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한편, 합법적 방식으로 모집이 어려운 경우, 밀항으로 여공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조직도 있었는데, 1928년에는 여공 10명을 싣고 일본으로 밀항하던 일당이 경찰에 검거되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여공을 인신매매의 제물로 삼는 마수는 조선 내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에게도 뻗쳤다. 그 중 일례로 여공을 유인 납치하는 조직이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보자.

 

(東京朝日新聞 1927.1.11.)[10일 오전1시경 세타가야경찰서 형사 2명이 밀행 중 어느 밭 안의 비료창고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 조사해보니 한 여자가 건장한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참이었다. 두 사 람을 연행하여 조사했더니 남자는 그 지역 조명규에게 몸을 의탁한 조장수(28세), 여자는 경상남도 출생 김용봉(18세)이었다. 조명규 집에는 여자 두 사람이 더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형사를 발견하자 울면서 구출을 요청했다. 조명규도 연행해 조사하니, 조선여자 2명은 김용봉과 마찬가지로 모두 후지(富士)방적의 여공 정차련(17), 이복희(16)였다. 이들은 한 달 25엔의 월급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조명규의 처 송경(宋慶. 22세) 등이 찾아와서 월급 50엔 받는 공장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므로, 그에 속아서 감금과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민족차별이 현저했던 일본에서, 규칙적이고 장기간의 노동, 불충분한 영양과 열악한 환경속의 노동이 조선 여공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음은 쉽게 짐작이 간다. 휴일은 일반적으로 월2회(혹은 4회)였는데, 결핵으로 사망한 조선 여공이 적지 않았다. 당시 경북 청도 출신으로 오카야의 제사공장에서 일했던 한 조선 여공은 [새벽 5시 기적소리에 잠을 깨어 시작되는 힘든 공장노동이 견디기 힘들어, 기계가 돌아가는 한, 이 고통이 계속된다는 마음에서, 공장주나 감독에 대한 미움보다는 기계를 원망하고 기계를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이 장면은 영국 산업혁명기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기계파괴운동)을 연상하게 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조선 여공은 기계가 자신의 노동을 가혹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고, 영국 노동자의 감정은 주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기계에 대한 원망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공장 기계가 노동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MeCONOMY magazine March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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