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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27) 새로운 변신 요구되는 풍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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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래 현대까지 우리 민족 전체에게 가장 끈질기게 깊이 영향을 미친 사상을 들라고 하면 ‘풍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 사상은 한국인의 사상과 종교인 유교와 불교, 무속, 도교와도 공존이나 접촉 결합 될 수 있었다. 유교와 불교는 조선조 내내 배척 관계였고 유교와 무속 간은 불편한 관계였음을 상기해 보면 풍수 사상은 타 종교와 뿌리를 공유하면서 상보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뿌리라고 함은 풍수 사상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생기(生氣)로 상호 감응하여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원리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천인 감응설이 풍수 사상의 근간이다.

 

천인 감응설은 한무제의 동중서에 의해 전지 자연과 인간 사이를 음양 매개로 하여 서로 감응한다는 체계로 정리됐다. 천인 감응설이 점차 각론으로 발전하여 갔는데 그 갈래 중의 하나가 풍수 사상이다. 풍수 사상은 한 나라 청오자의 「청오경」과 위진남북조 시기의 진나라 곽박(276-324)이 지은 「금낭경(혹은 장서)」에서 비롯 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핵심 논리는 조상의 유골이 길 한 땅에 묻히거나 흉한 땅에 매장되는가에 따라 후손 들이 복을 받거나 화를 당한다는 동기감응론에 근거한 다.

 

오늘날에도 수만 년 전에 죽은 옛사람의 유골이 발견되고 있다. 땅속에 묻힌 유골이 썩지 않는다는데 착안한 이론이다. 이집트는 유골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듯 사체를 보존하려고 미라를 만들었다.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한국의 산들은 대부분 그다지 높지도 않아 일찍이 풍수 사상의 원형이 발달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풍류도와 풍수 사상이 그 흡사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일한 자연주의적 생명의식에서 태동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풍수 사상은 신라 하대 도선 대사(827-898)에서 뚜렷하게 모습이 드러난다. 도선은 구 산선문 중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맥을 이은 승려로서 전남 광양 옥룡사에 독자적인 자리를 틀었다. 도선이 지은 「도선비기」는 책명이 기록돼 있을 뿐 책은 전하지 않는다.

 

 

중국의 풍수 이론은 당나라 양균송이 산과 물의 형세를 보고 풀이한 형세론을 주장하면서 크게 성행했다. 양균송(834-906)은 「감룡경」 「의룡경」 등을 지었는데도선의 생존 시기와 비슷하다. 도선은 당나라 밀교 승려인 일행 선사(683-727)로부터 풍수를 배웠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중국 선종은 시초부터 풍수 사상의 택지법을 받아들여 풍수 좋은 곳에 절을 짓고 참선을 하고자 했다. 일행 선사는 당 현종의 명을 받아 다른 학자들과 더불어 곽박의 「금낭경」을 주석하기까지 이르렀다. 도선은 이러한 형세론 적 풍수 사상을 받아들여 「도선비기」에서 우리나라 산수 형세에 맞는 풍수론을 펼쳐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풍수 사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사실 훈요십조의 8훈에서 ‘차현 이남은 배역의 형세….’ 운운하는 대목에서부터 풍수설의 오남용 조짐이 보였다. 풍수론은 당나라 말의 형세론 이후에는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완성된 형태로 도입되고 우리나라 산세에 맞게 적용 되면 이론적으로는 그만이다. 그때부터는 활용만 남은 셈이다. 풍수론은 고려 시대에 도입 및 정착 시기를 지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 시기에 걸쳐 유행하면서 극심한 폐해를 드러냈다. 풍수 사상이 신앙처럼 굳어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가 발복 신앙이고, 둘째는 예언 기능이다

 

유교는 도덕 윤리 및 정치사상이므로 기복 기능은 없다. 불교는 사후 극락왕생을 비는 건 있어도 살아생전에는 선한 업을 쌓을 뿐이다. 무속 신앙도 화를 피하려고 귀신을 쫓아내지만 복을 얻는 기능은 약하다. 풍수 사상은 음택을 한번 잘 쓰기만 하면 후손들이 발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그런 까닭에 가난한 백성들도 기를 쓰고 풍수사를 불러 좋은 묘를 쓰려고 했다.

 

언제나 불안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예언은 점술을 쳐서 할 수도 있으나 풍수설로도 할 수 있다. 풍수설로 엮어내는 예언은 스케일이 크고 신비로운 까닭에 정치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정감록’은 풍수설을 근거로 해서 예언을 펼친 것으로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온 여러 풍수론적 예언들을 한데 모아 놓은 작자 미상의 책이다. 조선왕조에 반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만큼 필사본이고 이본이 많았을 것이다.

 

정감록 처음에 수록된 감결은 정감과 이심, 이연과의 대화로 시작한다. “천지 음양에 대해서 말해보자. 곤륜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우리나라 백두산을 거쳐 평양에 이르렀다가 송악을 거쳐 한양을 지나 계룡산에 기운이 들어가니 새로운 왕조인 정 씨의 도읍지가 된다. 다시 그 맥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가 전주에 이른다. 또다시 그 기운이 송악에 도달하여 왕씨 왕조가 복위된다.”라고 예언 했다. 그러면서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를 거론했다.

 

 

정감록은 정조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바람이 그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정감록은 현실적으로 하나의 떠도는 예언일 뿐 성리학과 불교를 대체할 수 있는 사상도 체계적 교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정감록의 영향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렀다. 다만 풍수 사상 속의 신비한 예언적 이야깃거리로서는 조선왕조가 끝나고 식민지와 광복 후에도 내내 존속해왔다.

 

조선조 말기 풍수 모습 기록

 

제임스 S. 게일은 1888년 조선에 온 영국 기독교 선교사다. 그는 곧 한글과 한문도 능통하여 한영사전을 만들었고, 「천로역정」을 한역했고, 「구운몽」을 영역했다. 실로 천재라고 할 만하다. 그 당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통상 여행 경로를 밟지 않고 호기심을 갖고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있는 장을 찾아갔다. 그가 남긴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을 보면 풍수에 관한 짧은 글이 나온다.

 

게일이 한양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 동소문(헤화문) 주변을 걷다가 백여 구나 넘는 시체를 거적자리로 덮어 놓은 것을 봤다. 사람 시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왜 땅에 묻지 않는가 하고 물었더니, “못 묻어요. 먼저 묏자리를 쓸 명당을 찾아야 돼요. 안 그러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될 수 있으니까요”라는 답을 들었다.

 

또 하루 이틀 지나 동쪽 대로를 말을 타고 가는데 말이 놀라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 다. 말이 진정된 후, 대로 옆을 봤는데 길바닥에 머리통이 뒹굴고 목 잘린 시체 세 구를 봤다고 기록했다. 조선 시대에 시체를 바로 묻지 않는 풍습이 있었지만, 함부로 땅에 매장하지 않는 풍수에 대한 믿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어릴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경남 울주군 농소면 호계리 홍골이란 산골짜기 마을에 경주 최씨 외할아버지 댁이 있었다. 밤이면 믿기지는 않지만,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와 소나 염소를 잡아먹고 갔다는 말들이 이야기되곤 했다.

 

분명한 건 밤마다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제사를 파하고 늦은 밤에 어른들이 둘러 앉아 막걸리를 놓고 오가는 말이 기억난다. 어떤 효자가 한밤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 밤, 명당으로 소문난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장사 지낸 부친의 유골을 몰래 옮겨 파묻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꿈자리가 뒤숭숭한 무덤 주인이 지관을 대동하고 무덤을 파헤쳤다. 무덤 속에 갓 옮겨 놓은 타인의 사체를 보고 대경실색 했다는 얘기였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과학적 감수성을 지닌 풍수 사상의 현대화 필요

 

아직도 지방에 가면 화장을 반대하고 땅에 묻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몰래 무덤을 쓰지 않는 한 명당을 찾아 묘지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해졌다. 물리적으로 매장이 불가능한 현실을 반영하듯 전통적 풍수관에서 벗어나 현대화된 풍수 사상을 모색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정치 사회적 사상과 종교 교리가 시대 변화에 맞게 변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면 많은 폐해를 낳는다.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므로 새로운 사실이 증명되면 이전 사실은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나 정치 사회사상과 종교 교리, 문화적 관습은 이미 시대에 도저히 맞지 않는데도 옛것만을 지키려고 하고 타인과 사회에 강요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기존의 사상과 교리, 관습을 과감히 깨는 지도자가 진정한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광복 후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자존감 회복의 차원에서 우리 전통문화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탄복하는’ 분위기가 있어 왔다. 하지만 우리 민족만의 고유성이란 존재하기 힘들고, 존재한다고 해도 그 고유성은 시효가 있다. 왜냐하면, 환경과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한문을 도입하고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때 민족 고유성만을 주장했으면 역사에서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서 왕과 귀족과 백성을 일치단결하는 사상으로서 역할을 했을 때는 통일을 이룩했으나, 교종 불교가 왕권의 시녀 역할을 하면서 신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었다. 고려 초기는 선종의 신선한 기풍이 살아 있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타락을 면치 못했다. 조선 시대 성리학도 초기에는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불교 폐해를 혁파하는 데에 기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배척하기에 바빴다.

 

우리의 전통사상 가운데 오늘날의 필요성을 보면 풍수 사상이 창조적으로 현대화할 만하지 않나 생각된다. 무분별한 난개발을 막는 논리를 넘어서 자연과 동식물과 인간의 삶을 하나의 공동체적 사상으로 새로 정립해 본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실제 도시 계획과 주택 건설, 농산천의 개발, 대규모 공단 조성, 첨단 산업 클러스터 계획에 적용하는 방법론을 개발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비견되는 반도체 강국인데, 늘 물 부족에 시달린다. 반도체 공정 가동에는 다량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농사에 쓸 물도 끌어다 쓴다고 해서 큰 문제라고 한다.

 

서울과 수도권에 이렇게 많은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는 것은 한강이라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데 한강의 함수량을 생각 하지 않고 계속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대화된 풍수 사상은 개발 만능의 과학기술관을 대체하는 대안 사상으로 재탄생될 수 있을 듯하다.

 

 

MeCONOMY magazine Octo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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