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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CEO

한국의 피카소 김흥수 한올 재단에 깃들다


[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 지난 5월 24일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세계적인 화백 故김흥수의 작품 70여 점이 재단법인 한올에 기증됐다. 2014년 김화백의 작고 이후 갈 곳을 잃었던 작품들이 마침내 안식처를 찾게 된 것이다.


음과 양은 서로 상반된 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어울리게 될 때 비로소 완전에 접근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추상미술의 등장 이후 세계의 화단은 구상주의와 추상주의가 서로 반목적인 상극을 이루어 왔었다. 사실적인 표현은 틀 속에 얽매여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추상적인 표현은 우연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한쪽에만치우쳐 있다는 것은 완전치 못함을 의미한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조형(造型)의 영역을 넘은 오묘한 조형(造型)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진실인 것이다. 극에 다른 추상의 우연의 요소들이 사실표현의 필연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은 더욱 깊은 예술의 창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1977년 7월 7일 김흥수


하모니즘 40주년, 한국이 낳은 피카소 김흥수


올해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김흥수 화백이 하모니즘을 선언한지 40주년을 맞는 기념적인 해다. 191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흥수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191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국내 보다는 해외에서 그 명성이 높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유명 살롱 ‘살롱 도톤(salon d’automne)’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미국 무어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국립 푸슈킨 미술관에 ‛한국인 최초로 전시’를 하게 된 화가라는 영광과 함께 샤갈에 이어 ‛두 번째 생존 작가 전시회’라는 명예를 거머쥐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김화백이 가장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하모니즘’의 창시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1977년 김화백이 창안한 하모니즘은 당시 미술 사조를 뒤집어 놓을만한 혁명적 기법이었다. 


하모니즘이란 구상과 추상을 한 화면에 담는 기법으로 긍정적이고 구상적이며 눈으로 직접 파악해 그려 내는 양(陽)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실체이자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음(陰)을 하나의 캔버스에 옮겨내는 작업이다.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는 “김흥수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에서의 서로 상반되는 요소, 대조적인 요소, 즉 음과 양, 긍정과 부정, 리(裏)와 표(表) 등 자연발생적인 변증법적 논리를 실천하고 있는 아주 독특한 존재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원적 우주관에서 미술가인 김흥수의 개성이 비롯된 것이다. 뫼비우스의 고리 처럼 현재의 영원한 차원 속에서 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존재의 지속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 김흥수의 이원적인 우주는 상대적인 시간의 정지 속에서 그 하모니와 융화를 발견하게 된다. 화면 속에 인간의 호흡을 찾는 것이 바로 김흥수의 끝이 없는 여정의 목표다. 끊임없는 모색과 탐구로 온갖 양식의 변천을 거치면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송에 휘말린 김화백의 작품들


무려 43살이나 어린 제자 장수현씨와 결혼한 김화백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1992년 당시 73세이던 노화가 김흥수는 30살의 어린신부 장수현과 결혼식을 치렀다. 당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주례를 맡으며 “만년 청년과 절세 가인의 결합”이라고 덕담하기도 했다. 김화백과 장수현씨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의 잉꼬부부였다. 나이에 비해 건강함을 자랑하던 김화백은 2000년대 중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장수현씨는 휠체어를 끌며 김화백의 곁을 지켰다. 



평소 그는 “김화백은 나의 신이다. 그분의 그림을 지키는게 화두”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화백과 그녀의 행복한 삶은 2012년 부인 장수현씨가 난소암으로 사망한 이후 급격하게 악화됐다. 장수현씨가 사망하면서 2013년 그가 운영하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소재 ‘김흥수 미술관’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됐고, 김화백의 그림 100여점은 갑자기 갈 곳을 잃어버린 어린양 신세가 됐다. 이에 김화백 측은 평소 알고 있던 승려의 소개로 한 사찰에 그림 73점 등을 옮겨 보관하기로 했다. 당시 사찰에 보관되던 그림은 대충 계산하더라도 수백억원이 넘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김화백의 작품을 보관하기로 했던 진여불교재단은 그의 작품을 항온·항습장치도 없는 컨테이너와 비닐하우스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고, 김화백 측은 그림을 당장 돌려달라며 2014년 2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 4개월 만에 김화백은 부인 장씨를 따라 먼 길을 떠났고 그의 소송은 상을 치르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장남 김용환 씨가 맡게 됐다. 다행이도 재판부는 “김화백이 대리인을 통해 작품들을 보관시킨 것, 보관과 관련한 계약이 해지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작품을 반환해야 한다”며 김화백 측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우여곡절 소송 끝에 김화백의 작품을 지킬 수 있었던 김용환씨는 그림을 상속받지 않았다. 그리곤 작품 70점(유화 33점, 드로잉 35점, 사진 2점)을 재단법인 한올에 기증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택했다. 김용환씨는 “한올재단이 북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그룹이기에 함흥 출신인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기증하게 됐다. 부친의 예술세계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 하겠다”고 전했다.


김흥수와 한올재단의 만남


지난 5월 24일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재단법인 한올에서 김흥수 화백의 작품 기증식이 열렸다. 김화백의 아들 김용환씨는 총 70여점의 작품을 한올에 기증하는 파격적인 행보로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기증 작품 중에 ‘꿈(1970~1973)’, ‘오(1977)’, ‘모린의 나상 (1977)’, ‘두 여인(1982)’, ‘전쟁과 평화(1986)’ 등 하모니즘의 창시자 김화백의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포함돼있어서다.  기증식에는 김형성 한올재단 이사장, 박광진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등 미술계 원로들이 자리했다. 김형성 이사장은 “김화백의 작품과 철학은 세계 미술사에서 인정하는 국보급 유산인데 이를 한올재단이 맡기에 너무나 막중한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다”고 운을 뗐다. 이어 “한올 재단에서 김흥수 화백의 작품을 맡고 있는 동안 김화백의 작품이 국내외에서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회를 열어 김화백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만들고자한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특히, 올해는 김화백이 하모니즘을 선포한지 40주년이 되는 기념적인 해로 12월 10일부터 3개월간 제주 현대미술관에서 김화백의 전시회를 열고, 이후 2019년 김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과 해외에서 전시회도 기획하고 있다고 알렸다. 김흥수 화백과 오랜 시간 지내온 박광진 명예교수는 “김화백의 꿈을 이뤄주지 못해 후배로써 미안하고 죄스럽다”고 털어놨다. 박 교수는 “생전에 김화백은 서울 한복판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보고 눈을 감는 것이 꿈이었다. 불같은 성격의 김화백은 문화부장관에 이유 없이 찾아가 ‘내 미술관을 지어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작품을 후대에 알리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화백의 작품은 국가기관에서 맡아서 관리해야 하는 국보급 작품이다. 이를 한올재단이 기증 받은 것은 굉장한 행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축사를 전했다. 


가슴 따뜻한 예술청년 김흥수


김흥수 화백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폭군’, ‘고함쟁이 영감’이라고 불렀다. 웬만한 실력의 그림이 아니면 그림은커녕 화가 취급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누구 앞에서라도 할 소리 못할 소리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슴이 따뜻한 인간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1988년 초 프랑스에서 전시를 준비하던 중 화방에 맡겨두었던 초창기 하모니즘 작품 18점이 화재로 불타버렸다. 자식과도 같은 그림을 보낸 그는 허공을 쳐다보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슬퍼했다. 이에 손에 집문서를 들고난 화방주인은 “전 재산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라며 김화백에게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가로저으며 “도로 가져가시오. 이 엄동설한에 이것을 나에게 주면 집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어디에서 살 것이오. 보험금을 받더라도 공장부터 먼저 차리고 자립하는 길을 마련하시오”라며 불타버린 그림 값 대신 집문서를 가져온 화방주인을 되돌려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가슴 따뜻한 예술 청년 김흥수 화백은 애석하게도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그의 작 품은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으며, 그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높은 예술성에 도달해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인 거장을 낳은 대한민국은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 만약 김흥수 화백이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한국은 정말 운이 좋습니다. 20세기 말 그림의 천재를 뒀으니...”라며 부러워하던 파리 뤽상부르그 박물관(Luxembourg Museum)의 이야기가 너무나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MeCONOMY magazine Jun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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