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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개혁’ 대동법(大同法)

17세기 초 죽어가던 조선을 살린 대동법
양반·지주층의 반대로 전국 시행에 100년 걸려
토지를 기준으로 한 ‘조선 제도개혁 결정판’

<M이코노미 문장원 기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의 기근은 유례없는 대재앙이었다.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이라 불리는 이 재앙으로 백성들은 굶어 죽었고 나라에는 전염병이 들끓었다. 임진년에서부터 병자년과 정묘년까지 이어진 지옥도가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백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공납의 폐단은 임진왜란 이후 극에 달했다. 호피 방석 한 개의 값이 쌀 70여석으로 폭등하기도 했다. 연이은 전쟁과 정변, 참혹한 대기근과 전염병 창궐 등으로 국가 시스템 자체가 흔들렸고, 민생과 재정은 파탄 날 지경이었다. 17세기 초·중반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체제 전환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망해 가고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300년 더 생명력을 유지한다. 1392년 세워진 조선은 동아시아 전근대 국가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체제를 유지한 나라가 됐다. 중국의 성공한 왕조라고 할 수 있는 당·송·명·청 등은 대부분 300년 남짓이었다는 걸 놓고 보면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죽어가던 조선에 ‘심폐소생술’을 한 건 다름 아닌 ‘대동법’(大同法) 이라는 ‘개혁’이 있었다.
 

조선을 살린 ‘개혁’

 

이정철 박사가 지난 2010년 출간한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은 대동법의 논의 배경과 실행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또 대동법이 왜 ‘조선 최고의 개혁’ 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지은이는 대동법이 단순히 하나의 조세정책 개혁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적인 모습을 해결한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조선시대 세금제도를 살펴보면, 조선의 3대 세금 제도는 당(唐)나라 때부터 내려온 ‘조용조(租庸調)’ 체계를 따랐다. 조(租)는 땅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세금 (전조), 용(庸)은 국가에서 하는 대규모 공사에 차출되는 것이나 군에 복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전체 세금의 60%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던 조(調)는 지방의 특산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 조(調)였다. 풍흉으로 생산이 일정치 않을 경우 납부에 문제가 많았다. ‘공납’으로도 불린 조(調)는 이른바 백성을 가장 괴롭히는 ‘가렴주구’의 수단이 됐는데, 상인이나 관원이 대신 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방납’,  ‘대납’의 폐단이 컸기 때문이다.

 

조선을 살린 개혁은 이 ‘공납’을 바로 잡는 데서 출발했다. 관료들이 공납을 토지 소유에 따라 일률적으로 쌀로 바치게 하고 이 쌀로 조정이 직접 지방특산품을 구입하자는 것이 대동법의 시작이었다. 대동법의 뿌리는 1569년(선조 2년) 율곡 이이(李珥)의 ‘대공수미법’이다. 이이는 징수된 공납미를 정부가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고, 이들에게 왕실·관아의 수요물을 조달하게 해 종래 불법적으로 관행되던 방납을 합법화시켜 정부의 통제 아래 두고 이를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왜란이 발생해 군량미 확보가 다급해지자, 류성룡 등에 의해 다시 대공수미법이 제기돼 1594년 가을부터 전국에 시행됐으나 1년도 못가 폐지되고 말았다. 이처럼 개혁이 번번이 좌절된 것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형편이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세가들과 방납업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방해 책동했기 때문이었다.

 

기억해야 하는 이름 ‘경세가’ 김육

 

1608년(광해군 즉위년) 한백겸(韓百謙)과 이원익(李元翼) 등의 건의로 경기도에 본격적인 대공수미법이 ‘선혜법(宣惠 法)’ 혹은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이후 1624년(인조 2년)에는 강원도, 1651년(효종 2년) 충청도, 1658년(효종 9년) 전라도, 1666년(현종 7년) 함경도, 1677년(숙종 3년) 경상도, 1708년(숙종 34년) 황해도로 확대됐다. 명칭은 광해군 이후부터 대동법으로 보편화됐다.

 

대동법의 핵심은 공납의 기준을 사람에서 토지로 바꾸고 부과 비율을 토지 1결당 12말로 고정하는 것이다. 토지 1결은 300두의 쌀을 수확하는 땅으로, 1결당 12말은 4%의 세율을 뜻했다. 이전 사람 중심인 호수별로 세금을 부과하던 것을 토지 결수에 따라 부과하자 조세의 공평성이 크게 높아져 서민들의 부담은 대폭 경감됐고, 부자와 양반들의 부담은 증가했다. 지은이는 효종 때 충청 지방에 실시된 ‘호서대동법’ 이 ‘개혁의 기폭제’가 됐다고 한다. 대동법이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 시행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행됐기 때문이다. 경기 지방에 시행된 ‘선혜법’은 애초 전국적으로 확대할 의도가 없었지만, 호서대동법은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실행 과정에서 반대가 많았다. 주목할 것은 호서대동법이 성공하자 법 시행 직전까지 대동법의 정책 효과를 확신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동법을 지지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이 호서대동법 시행의 중심에는 영의정 김육(1580~1658)이 있었다. 1638년 김육은 충청관찰사에 임명되자마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에는 대동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면서 대동법을 건의하기도 했다.
 

김육은 호서대동법을 성공시킨 후 이제 전라도 지방을 겨냥해 ‘호남대동법’ 시행에 박차를 가한다. 호서대동법이 성공하자 효종 7년(1656)부터 호남대동법의 시행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호서대동법의 성공으로 충청도의 부담이 크게 완화되자 전라도 백성들이 충청도로 옮겨가 호남 지방에 남은 자들의 부담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넓은 토지를 지닌 토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57년 호남대동법이 시행된다.

 

김육은 효종 9년인 1658년 9월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호남대동법 실시를 위해 적절한 인물을 감사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호남 대동법이 중단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신의 병이 날로 깊어만 가서 실낱같은 목숨이 얼마 못 버티고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신이 만약 죽게 된다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

 

-김육이 효종에게 올린 상소(효종실록, 1658년 9월 5일)
 

처음 대동법을 경기도에 실시하고 전국으로 시행되기까지 100년이 넘게 걸린 데에는 양반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생애를 바쳤던 김육과 같은 경세가들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왕안석’과 ‘빨갱이’

 

김육이 대동법을 시행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맞서는 모습을 보면 지금 한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과 이를 반대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국가 재정과 관련된 정책이 추진될 경우 조선에서는 자칫 ‘왕안석의 신법’으로 비난받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안민(安民)에는 관심이 없고, 국가의 재정적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비난을 받으면 개혁정책은 여지없이 실패했다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효종 즉위년 김육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김집과 대립했다. 김육은 효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만일 (사람들이 자신을) 어진 이를 업신여기고 변법(變法)을 한 것으로 왕안석을 견주어 공격한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신을 구원하고자 하여도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왕안석과 같은 인물로 몰려 대동법 개혁이 좌절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조선시대 민(民)의 개념에는 양반이 포함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며 “세금을 문제로 왕을 상대해서 민의 이익을 옹호할 때는 대개 자신들도 그 민의 범주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반면 양반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양반은 오히려 민과 구분되는 사회계층의 범주로 여겼다. 양반들이 왕을 상대로 ‘안민’을 이야기할 때만, 당연히 자신들도 그 민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결국 ‘안민’의 혜택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지은이는 “조선시대 안민과 국가재정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 오늘날 경제적 성장과 분배, 개인적 자유와 공동체적 공정성 등의 상징적 관계를 연상케 한다”며 “이 대립항에서 현재 사 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앞쪽의 가치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뒤쪽의 가치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지은이는 “국가재정과 안민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그럴 수도 없다”며 “하지만 이 원칙은 언제나 안정되지 않고 흔들렸다”고 한다.

 

지은이는 오늘날 앞쪽 가치(성장·개인적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뒤쪽 가치(분배·공동체적 공정성)에 대해 ‘좌파적’ 혹은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선 시대에 상대를 ‘왕안석과 같다’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개혁조치들을 반대하는 쪽에서 ‘좌파적’,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이유다.
 

대동법의 제도적 의미들

 

지은이는 대동법에 대해 공물 수취에 관한 구체적 사항들을 정리한 ‘조선 제도개혁의 결정판’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동법은 여러 수취 항목들의 종합으로 지방의 운영비와 그에 속한 사람들의 보수까지 규정해 지방재정을 확립하고 이를 다시 전체 국가재정으로 통합시켰다. 왕실 경비를 정식화했고, 공물 운송비 규정했으며 더 나아가 군비를 표준화했다. 토지를 중심으로 일원화된 공물 수취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런 시스템 일원화는 제도의 공식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부분까지 인정하고 제도화했다. 제도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그 대상 범위가 공식 범위에 한정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공식 부분과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개혁되지 않은 비공식 부분은 끊임없이 공식 부분을 개혁 이전으로 돌려놓는다. 지은이는 이를 지적하며 대동법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비공식 부분을 인정하고 제도화했다는 점을 들었다.

 

지은이는 “관행은 사회적 작동 가능성의 검증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관행을 제도화해야 통제할 수 있다”며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라도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제도의 비공식적인 부분에서 현실적 타당성을 가질 경우 이를 제도화해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대동법은 공물가를 거둔 후 사후 점검하는 규정을 마련했다는 데 제도적 의미가 있다. 어떤 제도라도 사후에 점검하고 그 실시를 강제할 수 없다면, 제도로서 구속력을 갖출 수 없다. 또 대동법은 공물가 집행에 있어 예측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사항들을 ‘여미(餘米)’라는 예비비 형식으로 대처했다. 그리고 이 여미 집행에 대한 점검도 1년에 4차례 필수 항목으로 규정했다.
 

‘대동법’과 같은 개혁, 결국 과거를 돌아보는 일

 

문재인 정부는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는 등 적극적인 분배 정책을 통해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정책의 방향은 맞다는 이야기와 방향 자체가 틀렸으니 폐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날을 세우며 부딪치고 있다.

 

하지만 주요 통계들은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우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럼 다시 과거 성장 중심의 정책으로 돌아가야 할까.

 

김육은 개혁을 주저하고 수신(修身)이라는 관점에서 절약으로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識意正心)’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육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실학자 유형원(柳馨遠)도 수신의 원칙만으로는 경세의 영역을 온전히 포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비용 절약이라는 미봉책이 아닌 현실적인 대책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유형원이 ‘도가 밝아지면 기는 저절로 회복된다’는 종래 성리학의 ‘도기론’(道器論)을 비판한 점을 들며 도기론은 오늘날 성장과 분배,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공공성의 문제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도기론은 과거 자본주의적 경제적 효율성이 분배의 문제도 해결할 것이라는 신고전주의 주류경제학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제학에 기반을 둔 경제 정책이 지난 두 정부를 거치며 실패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대동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다. 지은이는 “국가적 수준에서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은 결국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따져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거의 성공 혹은 실패의 결과가 현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앞으로 나가야 하는 방향과 방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시간이 대동법은 10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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