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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임란에서 배우는 위기 극복의 교훈

현대는 위기 연속의 시대 또는 복합 위기의 시대라고 칭할 만하다. 세계가 글로벌 네트워크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고 한국의 위상도 예전보다는 부쩍 높아졌기 때문에 각 부문마다 평탄한 날은 드물고 위기가 아닌 날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위기 다발 시대에 임진왜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한없이 필요하고 소중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비겁하고 어리석고 분열했던 사건들을 낱낱이 살펴보고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교훈을 얻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혁혁한 공만 이야기하면 교훈은 커녕 과장된 자만심만 키우거나 수치를 덮어 또다시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할 우려가 있다. 

 

왕조 체제의 한계 인식 필요

 

왕조 체제는 왕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져 있다.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라도 왕이 채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조광조가 개혁안을 올려도 왕이 회피하면 그가 상소 한 개혁안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부당한 정책도 심지어 사실이 전혀 확인 안되고 소문에 불과한 주장도 왕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바로 시행되는 것이 왕조 체제다. 임진왜란을 불과 3년여 앞두고 벌어진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벌어진 기축옥사가 조선시대에 있었던 허다한 사실 왜곡과 과장, 무고 사례 중의 하나다.

 

조선 시대 붕당이 대표적으로 비판 받는 당시 정치 행태인데, 이것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숙고해보면 왕에게 모든 결정권한이 주어져 있는 데에서 오는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조정 신료들은 오직 왕의 총애를 받아야 관직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로지 왕의 총애를 받고자 정치적 의견과 출신을 달리한 신하들이 편을 갈랐다. 왕들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붕당을 이용했다.

 

세종처럼 뛰어난 왕은 붕당을 억제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왕들의 치세 기간에 붕당이 성행했다. 무능한 지도자는 싫은 소리, 옳은 말을 하는 부하보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거나 최소한 지도자의 말에 거스르지 않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려고 한다. 

 

왕조란 시스템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순전히 한 사람의 군주 혹은 극소수의 측근과 실세들에 의한 인치라는 데에 가장 큰 약점이 있었다. 그런 약점 많은 인치가 5백년 간 계속됐다. 따라서 왕조가 갖는 근본적 결함을 등한히 하고 임진왜란을 바라다보면 전모와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조선 왕조에서 일어났던 행태는 왕조 체제를 유지한 세계 역사에서 유사하게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북한과 독재국가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목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에 대한 무지

 

조선은 세종 때 통신사를 세 번 보내고선 임진란까지 한 번도 통신사를 보낸 적이 없다. 반면에 일본은 태조 이래 60회나 사신들이 왔다 갔다. 조선 사정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김연수 저)

 

일본 정세에 대한 사실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에 대한 조선의 우월의식이다. 외교적으로는 오직 중국 명나라만 받들고 나머지 변방들은 얕잡아 보는 ‘소중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송나라의 주자성리학을 계승한다는 자긍심이 강해 이웃 일본의 부국강병의 실상과 기세를 무시했다. 이런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통신사를 설사 자주 보내 일본의 정세를 파악했다고 한들 임진란 직전에 보낸 통신사 부사 김성일의 보고와는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일본을 몰랐듯이 풍신수길 또한 조선과 명을 너무 몰랐다. 독재적인 정치 지도자가 국제 정세에 무지해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당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는가를 보여준 것이 임진란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웃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상대를 알려면, 그 나라 정치 시스템과 실제 시스템이 굴러가는 모습, 사회에 내재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 요건일 것이다. 이런 선결 지식 없이 상대를 판단하면 크게 오판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류성룡과 이순신에 대한 거짓 상소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데, 영의정으로 있던 류성룡에 대한 파직 상소가 1598년 9월 24일부터 그가 파직되는 11월 19일까지 연이어 올라왔다. 11월 16일 사간원과 사헌부의 상소문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은 간사한 자질에다 간교한 지혜로 명성과 벼슬을 도둑질하여 사람을 해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세상을 속여도 세상이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평생의 심술입니다.

정권을 잡은 이래로 붕당을 결성하여 국사를 그르치고 사사로이 행하여 백성을 괴롭힌 죄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철(鄭澈)이 악한 짓을 멋대로 할 때에 우성전(禹性傳)과 이성중(李誠中)은 성룡의 심복으로서 간사한 정철에게 붙어서 사대부들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지금까지 화(禍)가 계속되는 것은 모두 성룡이 남몰래 사주한 것입니다. (...)

자기 뜻에 거슬리는 자는 원수처럼 배척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는 진출(進出)이 남보다 늦을까 염려하니 불량한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성룡의 문에 붙어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사론(士論)을 분열시켜 남북(南北)의 설(說)이 또 세상에 떠돌고 있는데, 이는 실로 성룡이 그 시초를 만든 것입니다. (...)

 

오직 화친을 주장하는 한 가지 생각만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직무를 담당한 지 6∼7년 동안 그가 경영하고 조처한 것이 대부분 유명무실하였고, 다만 문자나 짓는 것으로 그날그날의 책임을 때웠으며, 남의 말에 관심을 두지 않고 멋대로 고집을 부려 하는 일마다 정치를 해치는 짓만 했습니다.(...)

폐단을 만들고 그를 빙자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며, 불같은 호령으로 절도 없이 징수하여 끝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촌락을 텅 비게 하였으며, 피해가 가축에까지 미쳐 모든 존재가 하나도 안주하지 못하 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원망은 위로 돌아가게 하고 이권(利 權)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돌렸으니, 성룡은 어쩌면 그렇게도 자기를 위하는 계책에는 성실하고 국가를 위하는 계책에는 성실하지 못하단 말입니까. 관작을 멋대로 남발하여 선심을 쓰고 은혜를 갚기도 하였으며 자기의 심복들을 내외에 포진 시켰습니다.

각 진의 여러 장수와 크고 작은 군읍(郡邑)에는 반드시 친척 중에서 친한 자를 임명하여 보냈고, 참하관(參下官)을 승진시켜 줄 때는 자격이 수령을 감당할 만하다고 하였지만 반은 시골의 친한 사람들이었으며, (...) 미천한 자를 발탁할 때는 둔전(屯田) 지키는 관리를 설치한다고 하였으나 거의 모두가 자신에게 아첨하는 추한 무리들이었습니다. 

 

뇌물과 선물꾸러미가 남모르게 오가니 비루한 일은 말을 하자면 지극히 추할 뿐입니다. 광주(廣州)의 사전(私田)에 백성들을 시켜 경작하고 단양(丹陽)의 신장(新庄)에 포망(逋亡) 한 자들을 소집하였으며, 안동(安東)의 구제(舊第)는 기름진 땅을 많이 점령하였는데도 부역을 하지 않으므로 부사(府使) 정사호(鄭賜湖)가 그 가호에 부역을 시키려고 하자 남몰래 친한 자를 시켜 남쪽 지방으로 좌천시키니, 식자들은 모두 침 뱉고 욕하였습니다.

 

이는 성룡의 죄상의 대략인데, 지난번 중국에 사신 가는 것을 회피한 일로 약간의 견책을 받았으나 다만 정승만을 체직시켰으니, 어떻게 그의 죄를 징계하고 온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하겠습니까. 나머지 위세가 아직까지 치성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시비가 밝혀지지 않고 공론이 시행되지 않으니 후일의 화(禍)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 바 참으로 한심합니다. 삭탈 관작시켜 조야(朝野)의 울분은 조금이나마 쾌하게 하소서.

 

 

사헌부가 아뢰기를, 


"풍원 부원군 유성룡은 본래 재치 있고 언변이 뛰어난 자질로서 문필의 하찮은 기예로 수식하여 오랫동안 국정(國政) 을 전담하고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여 국가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죄는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당초 계사년과 갑오년에 왜적의 기세가 약간 퇴축하고 양호 (兩湖)가 온전하였으니 만약 그때에 지성으로 중국에 호소하여 군사와 군량을 요청하고 우리나라의 병력을 수습하여 한결같이 왜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보복하는 것으로 마음을 썼다면 중흥의 업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기미설(羈縻說)을 주창하여 마침내 강화(講和)의 발판을 만들어 인심이 해이해지게 하고 국세(國勢)를 부진(不振)케 하여 오늘날의 혼란에 이르게 하였으니 중외(中外)의 인심이 누가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일을 조처할 때에는 편견을 강력히 주장하고 허위를 꾸며 백성들의 힘을 낭비하였습니다."

 

"왜란 이후 7년 동안 시행한 것은 모두 착실한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소인들을 신임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지방과 서울에 퍼져 있어 백성들을 괴롭힌 죄는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이 흩어지고 국사(國 事)가 나날이 위급한데도 권세가 튼튼하고 기세가 등등하므로 조야(朝野)가 입을 다물어 성명(聖明)께서 그런 소문을 듣지 못하니 공론이 울분을 느낀 지 이미 오래입니다.

대신이 이러한 죄를 지고서는 하루라도 관작을 보전할 수 없으니, 삭탈관작 시키소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상소문을 길게 인용한 것은 확인 안 된 남의 말을 이렇게 잘 꾸며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위의 상소문은 사실과 다르거나 떠도는 말들을 사실인 양 근거로 제시하고 삭탈관작을 주장했다. 이같은 상소문을 줄기차게 올리니 선조도 끝내 파직을 허락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을 근거로 삼아 곤장을 치고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린 일이 조선시대엔 참으로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소문을 올린 자들은 사실 따위는 중요치 않고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과 주장과 앙갚음이 더 중하다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조선 조정이 사실 확인을 안 하는 습관성 행태가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 이순신 수군통제사의 하옥이었다. 선조와 조정 신료들은 일본 첩자의 말만 믿고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포로 가서 가토 군사의 재침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이순신 장군은 첩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설사 출정한다고 해도 남해안 해역 곳곳에서 포진하고 있는 왜군의 공격을 받을 게 뻔했다. 출정을 고심하는 이순신을 왕명 거부로 한성으로 압송 됐고, 장군은 온갖 수모를 당하고 죽음 직전에 백의종군하라는 처벌을 받는다.  

 

오늘날 대형 정치적 사건도 사실 확인이 안 된 채 정치적 이익만을 고려한 왜곡과 과장이 많은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정신문화에 ‘사실 확인’의 전통을 만들어가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임란 후 개혁, 왜 시도조차 안 됐나


무엇보다 선조가 왕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 개혁은 시도될 수 없었다고 본다. 개혁을 하려면 선조가 물러나고 새로운 왕과 새로운 신하들이 정치를 잡았어야 했다. 그게 과연 가능했겠는가. 선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리가 없다. 물려 준다고 해도 효도를 근본 덕목으로 숭상하는 조선에서 상왕의 의사를 반하는 개혁을 시행할 수 있었을까. 가당치도 않은 가정이다.

 

양반 사대부들이 개혁을 강력하게 왕에게 건의 할 수 있었을까. 극소수의 양반들이 그런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 다수의 양반들은 옛 시절의 신분 특권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세제 개혁도 신분 개혁도 군사 개혁도 이뤄질 수 없었다. 왜와 명나라의 놀라운 발전과 기술이 외국 문물과의 교류와 상업 발달에 기인한 것임을 알고도 묵살 됐다.  

 

무능한 왕의 최대 관심은 현상 유지다. 괜한 풍파를 일으키면 가뜩이나 불안한 권력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후반기에 왕이 어려서 왕후나 외척이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권력 집중이 왕이 아닌 다른 세력에게 돌아갔을 때는 한시적인 권력인 까닭에 더욱 ‘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다. 

 

임진왜란을 사람 중심의 분석에서 시스템과 문화의 관점에서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교훈을 이끌어내는 일이 필요한 듯하다.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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