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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독립운동에서 뿌리내린 정의와 평화 정신

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37)

독립운동은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 선전 노선의 두 방향으로 이뤄졌다. 이 두 노선은 상호 보완하면서 그 역할을 다해왔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게 된 영향과 효과를 어느 노선의 기여도가 더 컸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굳이 말을 한다면 외교 선전 노선에 대한 그간의 역사적 평가와 서술이 지나치게 소홀히 다뤄진 점이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무장투쟁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거와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극적인 요소가 풍부한 반면, 외교 및 선전 노선은 명백한 셩과를 내지 못한 가운데 장기적으로 진행됐던 원인도 있을 것이다.

 

한국독립을 향한 외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 전개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5월 시정방침에서 외교 선전 활동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즉 일본의 침략주의가 세계평화의 화근이 되고 한국의 독립이 세계평화에 필요하다는 점, 일본과 맺어진 을사늑약 등 조약의 부당성과 1919년 3.1운동 시기에 행해진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각국에 알리며, 한민족이 독립국민으로서 자격이 충분함을 실증 자료로써 선전한다는 목표였다.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열강들은 조만간 일본이 세계평화의 화근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과 적절히 협력하여 자국 이익 챙기기에 바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정의와 평화’ 운동의 고귀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의 기대를 모았던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 태평양군축 회의(1921), 대미외교까지 국제기구와 국가를 상대로 한 외교성과는 맹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미한 듯 보였다. 하지만 줄기찬 외교 선전 효과는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명시한 카이로선언(1943)에서 마침내 드러났다.

 

임시정부의 최초 외교 활동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파리강화회의를 대상으로 한 파리위원부에 의해서였다. 파리 강화 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 전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개최되었다. 이 무렵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선언은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고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기 전부터 민족단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식 파리위원부 대표는 1919년 4월 이후 독립항고서를 파리강화회의 클레망소 의장과 로이드 영국 총리, 윌슨 대통령, 오르란도 이태리 총리 등 각국 원수들에게 보냈다.

 

이 독립 항고서는 한국의 독립 필요성, 일본에 의한 한국 강탈과 이로 인한 조약의 폐기, 3.1운동 독립운동 시위와 일본의 탄압 활동,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통제 실태와 부당함, 일본의 침략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소개 등 16개 항목을 담고 있다. 한국독립 문제는 평화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으나 한국인의 충정을 알리고 일본이 자행한 인권 유린 상황과 잘못된 국권 강탈 사실을 국제회의에 참가한 열강들에게 최초로 호소한 점은 그 가치가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하겠다.

 

일본이 1차 대전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가한 파리 조화 회의에서 무슨 성과를 기대한다는 건 애초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각국 언론들과 여론을 대상으로 한 활동은 매우 장기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프랑스 신문들이 한국의 사정을 전하고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대해 동정했으며 이를 외면한 파리강화회의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파리대표부는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와 국민 정치연구회 등 민간단체들을 대상으로 선전 활동을 폈다.

 

대표적인 성과로, 1920년 1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와 함께 한국 문제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정치가와 학자, 언론인 등 각계 유명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되고 호응을 이끌어냈다. 파리위원부는 또 「회람(Circulaire)」, 「자유대한(La Corée Libre)」이란 간행물을 발행해 유럽 각 언론기관과 정부, 저명인사들에게 보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유럽 각국의 181종의 신문에 517회의 기사에 게재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사」, 정용대 저술)

 

1919년 8월에는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 대회에 파리위원부 이관용 부위원장과 한국사회당 조소앙 대표가 참가했다. 조소앙은 이 대화에서 「한국독립 승인요구서」를 제출했고, 25개국 대표들은 만장일치로 「한국민족독립결정서」를 통과시켰다.

 

이 결정서는 “국제사회주의대회는 민족자결의 견지에서 한국민족의 권리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야만적인 폭력과 압제에 대하여 항의한다. 동 회의는 이민족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스러운 독립국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한국의 요구를 만장일치로 가결한다. 동 회의는 국제연맹에 한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고 명시했다. 국제회의에서 최초로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인정받는 외교적 성과였다.

 

영국을 향한 한국의 독립 외교 활동은 이한응 열사의 순국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영 외교관이었던 이한응 열사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1904년 한일의정서로 인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이에 항의해 1905년 5월 12일 런던 공관에서 자결했다.(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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