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지난 10월 24일 국립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에서 미국의 AI 안보 각서(National Security Memorandum for AI)를 발표했다. 제목에서 금방 알 수 있듯이 AI를 단순히 첨단산업의 한 갈래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국가안보의 영역 안으로 포섭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설리번 안보보좌관은 AI안보론을 펼친 이유에 대해 첫째, AI의 발전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는 점을 먼저 꼽았다. 그는 다른 첨단기술의 발전 속도보다 예상을 훨씬 초월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전 속도는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군사 기술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빨라 안보의 불확실성을 급격히 증가시키고 있다는 점을 둘째의 이유라고 지적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AI기술의 불확실성을 가장 큰 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AI기술의 세 번째 특징은 지금까지 기술 발전 양태와 달리 민간 기업들이 AI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리번 보좌관은 말했다.
지난 80년간의 기술 발전사를 보면 정부의 연구소와 공적 펀드, 정부 발주 조달에 의해 원천기술의 개발이 이뤄져 정부가 충분히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술이 핵 기술과 우주 기술, 인터넷이라고 말한 그는, 하지만 최근의 AI기술 혁명은 그런 경로를 밟지 않고 지난 10년간 민간 기업들이 기술도약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이번 각서에서 미국 민간 기업들의 AI기술이 적대국들에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관리할 것을 처음으로 명확히 선언했다. 그리고 AI기술의 선점을 위해 우수한 해외인재에 대한 비자 발급 제한 규정을 풀겠다고 밝혔다. AI기술에 필수적인 반도체에 대한 지원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설리번 보좌관의 발표, 일주일 후 AI 반도체 개발에 1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AI 반도체는 5년안에 개발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 나온 보스턴컨설팅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주도하는 반도체 투자는 1420억 달러로,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규모인 390억 달러에 비해 3.6배나 많은 규모다. 블룸버그 뉴스는 지난 6월 중국 메모리 기업 CXMT의 모회사인 이노트론이 AI용 메모리와 패키징 공장을 2026년 중반 완공을 목표로 상하이에 건설하기 위해 24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 한국이 선택할 AI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의 방향성
제이크 설리번 안보보좌관이 바라본 AI 콘셉트는 AI기술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AI 분야에서 미국이 가장 앞서고 있는 만큼 그것을 지켜냄으로써 세계 패권 국가로서 지위를 유지하려는 복안이다. 물론 동맹과의 협력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의 협력을 추구하면서도 미국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일본과 영국, 호주 등 다른 AI 강국들과 횡적으로 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첨단기술 개발에서 미국이나 중국과 같이 정부 주도로 하면 된다는 사고에 지나치게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피할 수 없지만 정부가 AI와 반도체 개발과 통제를 모두 관장한다는 콘셉트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보조금이란 게 많을수록 또 오래 지속될수록 그 효과는 줄어들고 종국에는 역효과가 일어날 것이다. 결코 보조금의 전면 부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조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 반도체 제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반도체 제조업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인텔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회복은커녕 파운드리 매각까지 검토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을 현 CEO인 팻 겔싱어 이전 경영자의 재무와 수익 중심 경영 방식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일리 있는 설명이긴 해도 인텔 몰락의 주된 원인으로 돌리기엔 무리다.
흔히 한국경제의 선진국 추격 성공을 정부 주도와 지원으로만 해석하고, 당시 일반 국민들이 보여줬던 ‘잘 살아보자’는 열망과 근면정신에 대해선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 화웨이와 BYD(전기차 기업)의 놀라운 성장을 정부의 보조금으로만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중국 기술기업의 성장 배경에서 그들의 애국심, 미국에의 반감 등의 정신적인 요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첨단기술의 추격과 경쟁력 유지라는 측면에서 개도국과 선진국 간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인사 전문가들은 선진국과 선도 기업이 후발국 내지 추격 기업들을 뿌리치고 첨단기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는 주로 고연봉을 중요시한다.
미국의 경영학자들과 인사 컨설턴트들의 이런 주장을 한국 전문가들도 그대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고연봉을 주고 인재를 붙잡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렇지만, 한국 기업들에게 고연봉을 미끼로 인재를 빨아들이는 미국과 중국 기업들을 따라 하라는 조언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한국 반도체 기업과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기업 간에는 각각 처한 환경과 조건에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주로 설계 기업이므로 기술자들에게 고연봉을 줄 수 있지만,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설계에서부터 중간급 엔지니어와 노동자들까지 고르게 분포돼 있는 인력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보다 제조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평등의식이 강한 한국의 노동 문화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의 쏠림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이다. 한국에서는 임원들의 막대한 고연봉에 대해서도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런 판에 일부 기술자들의 고연봉과 엄청난 격차가 있는 다수의 직원들 간의 이중 구조는 기업의 단합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재정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구조임을 모르는 주장이라고 본다.
미국 CEO들의 천문학적인 연봉문화, 고급기술자들에 대한 고연봉은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도덕적 타락’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미국의 쇠퇴는 청교도 정신과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청지기 의식을 훼손하고 오직 돈을 추구한 기업 문화에 비롯된 원인이 크다고 본다.
중국의 노동 문화는 미국과 유사한 면이 있다. 고급 기술자들의 고연봉에 대해 일반 직원들의 반감이 크지 않은 것 같고 그럴 ‘여유를 보일 경제단계는 아직 아니다. 중국은 미국을 추격하기 위해 무엇이든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는 듯하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보다 규모가 무척 크기 때문에 다른 분야를 희생시켜서라도 AI와 반도체, 양자컴퓨팅 등 첨단 분야에 세계의 인재를 흡수할 여유와 의지가 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의 AI 전략은 대규모언어모델(LLM) 개발에서 보듯이 막대한 자금과 세계최고의 인재들을 끌어 모아 개발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우리나라가 잘할 수 있는 전문AI‘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현재 네이버와 LG 등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정부의 지원도 이와 같이 전문AI 분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도 우리가 기왕에 잘하는 메모리 분야를 지키면서 AI와의 접목기술, 파운드리, 시스템 반도체, 자동차용 반도체 등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확장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다. 미국과 중국은 안보상의 이유로 자국 내에 첨단기술 생태계를 독과점 형태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잘못하면 어떤 분야에서도 특출한 경쟁력을 갖지 못할 우려가 있다.
사실 미국이 반도체 생태계를 자국 내에 모두 회복한다는 가정은 환상에 가깝다. 일본도 메모리 분야의 경쟁력을 다시 가져오려고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한국 메모리는 이미 HBM 제품을 내놓고 있고 중국 메모리 기업들도 한국과 미국을 추격하려고 노력하는데, 언제 공장을 완공해서 수율을 맞추고 의미 있는 제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ㄷ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첨단 기업들의 인력경영에서도 한국만의 길을 걸어갔으면 한다. 고연봉보다는 고용 안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여태까지처럼 세계 반도체기업들의 ‘인력 공급처’가 돼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예전부터 실적을 보여주지 못하는 중년 직원들을 조기에 내보내려는 문화가 남아 있다. 한국의 중장년 직장인들의 상당수가 실적을 내지 못하는 것은 연공서열, 불공정한 인사평가 등 낡은 인적 경영 방식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주52시간 근무제는 당장 뜯어고쳐야 한다. 주52시간 근무제는 반복된 단순노동이 많은 공장이나 서비스업 등에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기술전문직, 영업직, 연구개발직, 고위직에게는 타당하지 않은 제도다.
이제 우리 기업계와 노동계, 학계는 미국과 유럽의 제도와 관행을 벤치마킹할 때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창조적으로 새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좋은 제도라도 시행해보고 적합하지 않은 거라면 즉시 수정하는 유연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다른 나라의 모범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위상을 가지게 됐다. 늦었지만 서로 역사와 문화와 실정이 다른데 꼭 같아야 한다는 가정이 문제였음을 깨달아 갖고 있는 중이다. 한국 경제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인사관리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 패권 경쟁보다는 평화와 상생 정신이 기후위기 시대의 정신 코드
서양은 대립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한다는 사고가 있다. 힘에 의한 평화라는 군사사상이다. 패권 경쟁이란 게 서양인들의 사고에서 익숙한 개념이다. 동양인은 서로 달라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사고를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서양의 지식 관념이 한국에도 깊이 침투해 있는 까닭에 패권과 동맹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긴 하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를 위한 패권과 동맹, 아니면 화이부동 중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너무 단선적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은 당시 중국 국민당 대표인 장개석만 도운 것이 아니고 모택동도 도와줬다. 미국 언론들은 모택동을 칭송하고 장개석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판적이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양다리 정책이 중국의 공산화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믿고 중국의 경제발전을 도운 것도 미국이다. 오늘날 미국이 중국의 AI기술 발전 속도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지만, 그 모든 AI와 반도체 기술들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미국 첨단기업에서 일하다 돌아간 중국계 미국기술자들이며 그들에게 막대한 자본을 대준 곳은 다름 아닌 월가이다.
지금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와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동시에 AI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에서 우위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듯 보여도 갑자기 상황이 종료될 수 있다. 국가나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에 옮긴다고 해도 그대로는 되지 않는 게 역사의 흐름인 것 같다. 한국은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고난의 근·현대사가 가르쳐준 평화와 상생의 소중함을 지켜내는 데 힘을 다한다는 방향성만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