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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여자정신대의 일상과 노동(상편)

-박광준 일본 붓쿄대 교수의 여자정신대의 기억과 진실(6편)

 

여자정신대를 받아들인 기업들

 

조선정신대가 동원된 사업장들은 조선 총독이 강조했던 대로 군수공장 중 가장 작업환경이 좋은 곳에 속했던 것 같다. 일본인 일본군 강제위안부는 47만여 명이었기 때문에 열악한 공장도 있었다.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던 악명높은 사업장도 있었으며, 독극물에 노출된 정신 대원들이 종전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정신대가 동원된 대표적인 곳은 후지코시강재(不二越鋼材株式会社, 1089명), 미츠비시명공(三菱名古屋航空機製作所, 300명 추정), 교토 마사(東京麻糸紡績. 300명 추정) 세 곳이다. 후지코시는 기계 공구회사였고 당시 종업원 수는 3만6천 명의 대규모였다. 일본학도대 (5,133명), 일본인 일본군 강제위안부(1,600명), 조선 징용자(419명)도 동원되어 있었다.

 

경상북도대, 전라남도대 2차와 경기도대 등이 동원되었다. 공장이 위치한 토야마는 눈이 많고 비교적 추운 지방이다. 대원들은 베어링, 페인트칠, 선반 기계 등에 종사했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중 420명은 1945년 7월 조선 사리원에 설립된 공장으로 전속되어 귀국했고 나머지는 해방 후 귀국했다. 공장을 탈출한 대원이 14명으로 두드러지게 많다.

 

미츠비시명공은 나고야에 있는 항공기생산회사였다. 전라남도대와 충청남도대가 동원되었다. 일은 선반 일이나 페인트칠 등이었다. 1944년 12월 7일 토난카이(東南海)대지진이 발생하여 전남대원 6명이 사망(그 외 일본인 51명 사망, 그 중 일본학도대 13명 사망. 일본 전체 사망자는 1,223명)했고, 뒤이은 공습으로 충남대원 1명이 사망했다. 미츠비시는 여자정신대를 토야마에 있는 두 개 공장으로 분산시켰다. 토야마에서 해방을 맞고 8월 중순-10월경 귀국했다.

 

토쿄마사는 1944년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어 낙하산이나 대포위장망 등을 생산했으나 원래 방적 회사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조선 여공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정신대는 이미 집단모집으로 취업해 있던 조선 여공들과 함께 일했고 교류도 있었다. 대원들은 그들을 언니 혹은 [후루이(나이 많다는 뜻의 속칭)]라고 불렀는데, (글을 모르는) 언니들로부터 편지를 대신 써 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토쿄마사는 1945년 7월 공습으로 공장과 기숙사가 완전히 파괴되어, 대원들은 거기서 멀지 않은 후지(富士)방적 오야마(小山)공장으로 전속되었고 해방 후 10월 말 귀국했다.

 

 

문화충격 속의 집단생활

 

대원들의 일본 생활은 그들의 상상과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배를 주렸고, 노동은 힘들었으며, 공부해서 진학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마디로 가혹했다. 애초에 12세를 노무 동원하는 것 자체가 가혹한 일이다. 그 점은 쉽게 상상되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전제하에서, 나는 이 문제를 ‘문화충격’이라는 관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원들이 강요당한 군대식의 조직 및 일상생활, 이상할 정도로 강한 일본의 노동윤리와 노동강도, 식생활에 관한 문화 등은 조선에서 자란 소녀들에게 충격적인 생활방식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 생활을 더욱 힘들게 했다.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출신 지역별로 그리고 군대식으로 편성되었다. 분대, 소대, 중대 등으로 조직되었고 분대장과 소대장은 대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기숙사는 대개 2층 건물로 8명에서 12명 정도가 한 방을 사용했다. 타타미 방이었고 겨울에는 코다츠라고 불리는 난방기구가 있었다. 겨울에 방이 추웠다는 대원도 있고 코다츠가 있어서 추운 줄 몰랐다고 말하는 예도 있다. 기숙사는 공장과 걸어서 10분 내외에 있었다.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갈 때나 돌아올 때는 몸뻬와 작업모 혹은 머리띠를 두르고 사열 종대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는 여자정신대의 노래나 군가를 불렀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탈출자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열악한 식사와 예비교육 기간의 군대식 교육 훈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정신대도 군사교육이 힘들었다는 증언이 많다.

 

회사선전에서는 여가시간의 꽃꽂이, 재봉, 영화관 등이 있었는데 그럴 기회는 한정적이었다. 일상예절(行儀)을 배우기도 했는데, 예절 자체가 이질적 문화였다. 일본에서는 꿇어앉는 것이 정좌(正坐)이며, 양반다리나 무릎을 세우고 앉는 것은 좋지 않은 행실로 취급된다. 예절교육 한답시고 장시간 꿇어앉기를 강요당했다. 된장국(미소시루)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이유로 벌을 서기도 했다.(일본에서는 밥그릇에 된장국을 부어 넣어 먹는 것은 문제 되지 않으나, 조선문화처럼 국그릇에 밥을 넣어 먹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으로 본다) 조선문화에 대한 배려는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일상생활

 

기숙사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비누나 수건 등 생필품을 팔았지만, 음식류로는 오직 커피 가루나 주스 가루만 팔았다고 한다. 매점 이용에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기록만 해 두고 임금에서 공제했다. 기숙사에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목욕은 한번도 한 적 없다는 증언도 있지만, 대부분 목욕탕을 자주 이용했다고 증언한다.

 

공장 안에 우체국이 있었고 소포는 거기서 찾았다. 편지 보낼 때는 우편 검열이 있어서 개봉하여 제출했으며, 그래서 잘 있다는 말만 했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편지를 받은 적도 쓴 적도 없다는 대원도 있는데, 편지에 관한 증언은, 부모가 글을 쓸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도 달랐을 것이다. 기념품을 사서 조선에 소포로 보냈는데, 고향집 주소를 잘못 써서 소포가 되돌아온 예도 있었다.

 

1945년 4월 이후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정상적 연락선 운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편지나 소포 왕래가 어려워졌다. 대원들도 미국이 현해탄에 기뢰를 깔아 두어 배운항을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가족의 사망 등 급한 소식은 전보를 통해서 받았다. 가족이나 친지의 면회도 있었다.

 

좀 특별한 경우지만 자매가 각기 다른 공장의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동원된 후 그 언니가 멀리 떨어진 동생의 공장으로 가서 면회한 때도 있다. 언니(미츠비시소송 원고)는 1944년 봄에 동원되었고, 동생은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담임교사의 말을 듣고 1945년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후지코시에 배속되었다. 언니는 동생 면회 가고 싶다고 공장 사람에게 호소했더니 동생에게 줄 주먹밥을 10개 만들어 주었다. 면회 가니 12살 동생은 배고파 못 살겠다고 울었다고 한다.

 

나고야에서 토야마까지는 하루를 잡아야 하는 먼 길이고 후지코시에 찾아가서 면회 신청하는 일을 일본 경험이 없는 14살 소녀 혼자서 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언니는 [누군가 데려갔고 데려왔기 때문에 갈 수 있었다]고만 기억할 뿐 누가 그곳까지 데려다주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미츠비시 관계자가 데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휴일은 전혀 없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대체로 주 1회나 2주 1회였다. 휴일이나 자유시간 보내기에 관한 증언은 매우 다양하며, 공장이 위치한 지역 사정도 반영되어 있다. 주말 외출은 단체로 나가는 것이며, 인솔자가 있거나 혹은 적어도 5명이 되어야 외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츠비시의 경우, 아츠다(熱田)신궁(전승 기원을 위한 것), 히기시야마(東山)동물원에 여러 차례, 나고야성 등에 갔었다고 말한다. 또한, 고타니 온천에 가서 목욕했다며 물 색깔이나 특징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대원도 있다. 후지코시의 경우, 토요일에 영화를 보았다거나 토야마신항(新港)으로 소풍 갔던 것, 스모(일본씨름) 구경, 서커스 구경을 언급한다. 백화점 구경 증언도 다수인데 음식은 팔지 않았다고 말한다. 배가 고파 음식을 구하기 위한 외출도 있었다.

 

 

공부 기회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은 일본군 강제위안부를 지원한 큰 동기의 하나였는데, 대원들이 상상했던 공부, 즉 진학하기 위한 공부 기회는 없었다. 각 공장은 청년학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원들 증언에 등장하는 학교란 청년학교이다. 일본의 청년학교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업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 시설인데, 14세 정도에 달할 때까지 노동자로서의 소양을 교육하기 위해 공장 내에 설치한 학교이다.(青年学校令, 1935)

 

1944년에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나 고녀(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한 노동자는 모두 사업장 내의 청년학교에서 교육받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청년학교 일본인 교사가 조선정신대에 관하여 남긴 증언도 적어도 두 건 있다. 공부 시간은 아예 없었다는 증언도 있고, 처음에는 주2-3일 공부할 시간과 공부 가르쳐 주는 선생님도 있었으나 점차 선생님도 공부할 시간도 없어졌다는 증언도 있다.

 

토쿄마사에 동원된 대원은, 공부를 하는데 조선과는 달리 일본 교과서에 한자가 너무 많고 어려워서 점차 학교에 가지 않는 대원들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부정기적으로 공부했다는 증언은 모든 공장에서 확인된다. 미츠비시 지진시에 상당수 대원들은 학교에 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학을 위한 공부나 상급학교 진학이 없었음은 명백하다. 예외적이지만, 회사 지원으로 간호학교를 6개월 속성 수료하고 검정고시로 간호사자격을 따서 간호원이 된 경우가 2건 확인된다.

 

미츠비시 대원들 중에는 1주일에 한 번 영어 ABC를 배웠다고 증언하는 대원이 다수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당시 영미는 적국이었기 때문에 학교 영어수업도 없어지고 외국어는 독일어로 바뀐 상태였다. 유독 미츠비시에서 조선정신대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제품 이름을 습득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자유시간에 배운 기술이 귀국 후에 활용되기도 했다. 후지코시 소송 원고는 타이핑을 배워서 귀국후 그 기술로 우체국, 그리고 대통령관저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어 ~여자정신대의 일상과 노동(하편) (m-economynews.com)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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