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가장 감각적인 분야로 그 속도와 민감도는 그 어떤 분야보다도 빠르다. 최근 패션 광고의 세계에 나타난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인간 모델이 아닌, AI가 만든 얼굴이 브랜드를 대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산업 구조와 소비자 인식 모두를 재편할 새로운 질서의 서막일 수 있다.
◇AI 모델, 어디까지 왔는가?
우리가 말하는 ‘AI 모델’은 단순한 그래픽 캐릭터가 아니다. 딥러닝 기반의 이미지 생성 모델들은 수천만 개의 실존 인물 사진, 인체 구조, 표정의 미세한 변화 등을 학습하며 인간처럼 보이는 얼굴을 만들어 낸다. Midjourney, DALL·E, 그리고 최근의 Sora와 같은 생성형 AI 기술은 인물뿐 아니라 배경, 조명, 의상 주름 까지도 놀라운 정교함으로 구현해 낸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히 보기 좋은 이미지를 넘어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맞는 특정 ‘페르소나’를 전략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광고계의 새로운 언어로 떠오르고 있다.
◇AI 모델은 브랜드에 어떤 무기를 제공하는가?
첫 번째는 ‘커스터마이징’이다. AI 모델은 브랜드 캠페인의 콘셉트, 시즌 테마, 지역 특성에 따라 즉각적으로 수정·보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유럽과 아시아에 다른 감성의 광고 캠페인을 기획할 경우, 인종, 체형, 스타일의 디테일을 자동으로 조정한 AI 모델을 각 시장에 맞게 배치할 수 있다. 촬영장 대여, 모델 섭외, 스타 일리스트와의 협업 없이도 고품질 결과물이 나온다.
두 번째는 테스트의 유연성이다. 신제품 론칭 전 소비자 반응을 A/B 테스트 형태로 미리 파악할 수 있다. 브랜드는 다양한 스타일의 비주얼 시안을 AI로 생성한 뒤, SNS나 디지털 채널에서 반응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캠페인 전략을 결정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개인화다. AI는 소비자 개인의 행동 데이터를 분석해, 각자 에게 최적화된 모델과 메시지를 제공한다. 이는 ‘내 취향 을 읽는 브랜드’, ‘나를 이해하는 광고’라는 인식을 강화해 소비자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단순히 주목을 끌기보다는 정서적 친밀감을 기반으로 구매 전환까지 이어지는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 AI 모델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
Calvin Klein은 AI 기반 비주얼을 이용한 글로벌 티저 영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 촬영된 듯한 세련된 영상 속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데도 소비자는 몰입했고, 브랜드는 이를 통해 ‘디지털 미래’를 상징하는 자신들의 포지셔닝을 명확히 했다. Decathlon은 AI를 통해 다양한 체형과 연령대, 인종의 모델을 생성해 인클루시브 스포츠웨어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특히 젊은 Z세대 소비자들 사이에서 ‘리얼바디 캠페인’으로 회자되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국내의 Musinsa는 AI 툴을 활용해 화보형 이미지 콘텐츠의 실험적 기획을 지속하고 있으며, 3D 기반 피팅 이미지와 AR 스타일링 콘텐츠에도 AI 모델을 도입 중이다.
◇그럼에도 불편한 질문은 남는다
AI 모델의 등장은 곧 인간 모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온다. 특히 프리랜서 모델, 신인 모델에게는 기회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일자리를 잠식 한다는 오래된 논쟁은, 이제 패션 산업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또한, AI가 구현한 인물의 이상적인 외모가 현실과 다른 기대치를 만든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AI 얼굴’이 곧 새로운 미의 기준이 되면, 소비자 스스로 자신의 외모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일부 브랜드 는 AI 모델을 사용할 때, 이미지 하단에 ‘AI 생성’이라는 태 그를 달아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작권 문제도 복잡하다. AI가 학습한 데이터가 누군가의 사진이나 신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다면, 그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현재 관련 법률은 빠르게 변화 중이며, 브랜드와 에이전시 모두 법적 리스크 관리 체계를 갖춰야 한다.
◇기술과 진정성, 그 사이를 설계하는 브랜드만이 살아남는다
결국 AI 모델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기술은 빠르게 진보하지만 소비자는 여전히 ‘진정성 있는 경험’을 원한다. 누가 만들었든, 얼마나 화려하든, 광고가 전달하려는 메시 지에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면 소비자는 외면한다. 인간적 정서, 문화적 맥락, 브랜드의 철학이 AI 이미지 속에 녹아 들어야만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AI 모델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그 흐름 을 어떻게 타느냐는 브랜드의 철학과 전략에 달려 있다. 기 술과 사람 사이의 균형을 감각적으로 설계하는 브랜드, 진짜 스토리를 잃지 않는 브랜드만이 이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글 김자연
MIT(메사츄세츠공과대학)슬론 경영 대학원에서 ‘과학기술이 패션에 미친 파괴적 혁신’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고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4차산업이 패션 비즈니스, 리테일, 마케팅 분야 에 과학기술이 미치는 혁신적 이 영향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 다. 2003년 SBS 슈퍼모델 선발 대회 1위로 입상 후 세계 패션 도 시들에서 패션모델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