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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통장과 금융당국의 고래 싸움, 애먼 소비자만 봉변



<M이코노미 이홍빈 기자> 대포통장을 막기 위해 신규 통장 개설을 까다롭게 만든 제도가 도리어 소비자들의 불만을 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통장고시’로 불리며 은행의 각종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직업란을 채울 수 없는 가정주부와 가뜩이나 취업이 되지 않는 학생들은 이 제도에서 배제됐다. ‘통장고시’, 제 이름으로 된 통장하나도 못 만들고 은행 창구에서 허탈하게 뒤돌아서는 150만 통장고시생들의 아픔을 들여다보았다.

대학생 A씨는 입출금 통장을 만들기 위해 최근 은행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매번 허탕만 치고 있다.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에서 요구하는 갖가지 확인절차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정주부 P씨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직업으로 인정도 되지 않고 수입도 없는 가정주부 P씨에게 은행이 요구하는 문턱은 높기만 하다. 이 모두가 대포통장 규제를 위한 정부 방침의 어두운 뒷면이다.

‘대포통장’ 검은 손의 유혹, 잔고도 없는 통장이 300만원으로 변하는 마법 

이처럼 통장고시라는 말이 생겨난 원인은 바로 대포통장에 있다. 대포통장은 예금주와 사용자가 각기 다른 통장으로, 흔히 차명계좌로 불리며 관련 세계에서는 장집(?)이라는 은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포통장은 대포폰과 쌍두마차를 이루며 비자금 은닉, 인터넷 직거래 사기, 탈세, 보이스피싱 등 각종 불법행위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로 사용되고 있다.



대포통장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기 전만해도 길을 걷다보면 전봇대나 담벼락 등에서 ‘통장 삽니다’라는 글귀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회사 세금문제 때문에 다른 통장을 이용해 거래를 해야 한다’며 불법적인 곳에 사용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곤 했다. 잔고도 없는 통장을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부르며 사간다는 말에 길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팍팍한 가정형편에 한숨만 쉬던 가정주부, 취업이 안돼 자신을 죄인처럼 여기고 살던 취업준비생들의 귀는 팔랑일 수밖에 없었다. 단 돈 몇 푼이 아쉬운 이들에게 통장 거래는 마치 연금술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0원짜리 통장이 수십, 수백만원으로 변신하는 연금술 같은 기적은 그보다 더 큰 대가로 돌아왔다. 통장을 사간 사람들은 이들의 통장으로 각종 범법행위를 저질렀고, 범죄행위에 자신의 통장이 사용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사람들은 ‘전자금융거래법’에 따라 3년 이하 징역이나 수천만 원 이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대포통장을 막아라,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

이처럼 대포통장에 의한 무고한 피해가 늘어나자 금융당국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통장개설에 대한 압박을 시작했다. 2010년 3월 금융감독원은 대포통장 근절과 보이스 피싱 예방을 위해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라는 제도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입출금 통장에 대해서만 시행됐던 이 제도는 금융기관 근무일 기준 20영업일 이내 3번째 발급 통장부터 규제를 가하는 정책이었다. 즉 신규통장 2개까지는 자유롭게 만들 수 있으나 20일(은행 근무일 기준)이내 3번째 통장부터는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를 작성해야만 통장을 만들 수 있게 만든 제도였다. 그러나 초기 시행된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 제도는 늘어나는 대포통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2011년 하반기부터는 2번째 통장부터 단기간 통장 개설 신청서를 작성하도록 정책을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 통장 거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14년에 이르러 20영업일 이내 타 금융기관의 계좌를 개설한 흔적과 상관없이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를 작성하도록 금융당국의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금융당국이 대포통장을 막기 위해 등판시킨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는 제도가 시행된 4년의 시간 동안 3번의 규제 강화 조치를 취하며 고군분투 했으나, 불법 거래를 막기에는 모자랐다. 대포통장이 줄어들고 자연스레 보이스피싱도 사그라들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금융당국에 돌아온 것은 ‘시도는 좋았다’라는 범죄자들의 비소(誹笑)뿐이었다. 오히려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통장개설을 위한 은행 업무가 과거에 비해 매우 복잡해지면서 소비자와 은행 양측 모두 불편해지는 이상한 결과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만큼 힘든 ‘통장고시’

대포통장을 잡기 위해 마운드로 올라섰던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 제도가 대포통장을 잡기는 커녕 은행업무의 비효율성과 소비자의 불편만 가중시키는 결과만 나으며 쓸쓸하게 퇴장했다. 예상과 다른 결과에 금융당국은 당혹스러워 했고, 결국 품안에 숨기고 있던 조커 카드를 빼들었다. 통장고시의 시작이었다.

2015년 3월부터 대포통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금융사기를 방지해 금융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은행권에서는 입출금 통장 신규발급 절차를 더욱 까다롭게 강화했다. 대포통장근절종합대책 가운데 하나인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는 금융회사에서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도록 통장 개설과 관련된 객관적 증빙자료를 요청할 수 있게 만든 제도였다.

만약 통장 개설을 원하는 사람이 금융거래 목적을 정확히 증빙할 수 없거나 목적이 불분명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은행은 계좌 개설을 거부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종전에 시행됐던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된 규제였다. 신분증과 도장만 있으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던 통장 만들기가 대출만큼 복잡하고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가 시행되면서 통장 개설을 위해 준비해야 할 증빙자료는 다양하다. 지옥이라 불리는 취업문을 뚫고 급여통장을 만들기 위해 당당하게 은행을 방문한 새내기 직장인은 명함과 재직증명서,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과 소득증빙 서류 등을 제출해야 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통장을 만들 때는 더욱 복잡하다. 기존법인을 가지고 있던 사업주의 경우 물품 공급계약서와 납세증명원, 세금계산서, 부가가치세증명원, 재무제표 등 자료가 필요하며, 신규법인의 경우 임대차계약서, 집기류 구입영수증, 창업관련기관 입주확인서, 사업영위 및 창업준비 확인서류 등이 필요하다. 심지어 계모임이나 동창회 등 각종 사적 모임을 위해 만드는 모임용 통장에도 구성원 명부와 회칙 등을 증빙자료로 제출해야 통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마저도 은행과 창구 직원에 따라 개설이 되기도 혹은 안 되기도 하는 복불복 시스템으로 전락했다. 어떤 은행 직원은 명함만 내밀어도 계좌 개설을 도와주지만, 까다로운 창구 직원은 해당 사업체에 확인 전화를 걸어 ‘XXX씨가 회사의 직원이 맞습니까’라고 확인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통장 개설을 두고 고객과 은행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금융소비자원 조남희 대표는 “30년 넘게 거래한 은행에서 통장 발급에 각서를 쓰라는 등 필요 이상의 비상식적 서류를 요구한다. 또 금융당국의 정책은 책임회피만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지나친 규제이며 형식적인 후진적 금융 행태”라며 모든 국민을 범죄자로 가정하고 통장 발급을 줄이는 일은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렇다고 은행과 은행직원을 싸잡아서 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은행 직원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놓인 약자들이라는 것이다. 은행 직원들은 “정확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통장을 열어주었다가 혹시나 대포통장으로 사용되면 통장개설을 도운 은행 직원의 인사에 불이익이 있을 수있다”며 “은행 업계에서도 ‘개설 방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통장 발급을 꺼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대포통장과 금융당국의 고래 싸움에 애먼 일반 소비자들과 은행 직원들만 시험대에 올라간 형국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금융정책, 100만원 한도계좌에 발 묶인 150만 금융소비자

대포통장을 막고자 수년간 금융당국이 실시한 각종 정책은 통장고시라는 사생아를 낳고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소비자들의 불만이 빗발치자 금융당국은 ‘금융거래 한도계좌’라는 소방수를 도입했다. 신한은행, 국민은행, 우리은행, 기업은행, 하나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을 시작으로 시행된 금융거래 한도계좌는 단어 그대로 하루에 거래할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해 놓은 통장이다. 통장고시에 막혀 통장개설이 힘들다는 민원에 별도의 증빙 자료 없이도 금융거래가 가능한 통장을 출시해 금융소비자들의 울분을 달래자는 목적이었다.

금융감독원은 “대포통장을 줄이기 위해 통장 개설시 금융거래 목적 확인서 등 증빙 서류를 제출하게 했으나, ‘통장을 만들기 어렵다’, ‘개인 사생활 침해다’라는 민원이 많았다”며 금융거래 한도계좌제도를 통해 금융소비자들의 여러 가지 불편을 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한도계좌 하루 거래 한도는 은행 창구에서 거래 시 100만원,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인터넷뱅킹 등 전자금융거래에서 거래할 때는 30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또 은행별 1인당 1구좌만 개설가능하며, 한 달 내 신규계좌 개설 이력이 있다면 신규계좌 개설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금융소비자들은 ‘100만원 한도 계좌로 무얼 하느냐 생색내기다’라며 한숨을 쉬는 실상이다.

정치권 안에서도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의원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금융거래 한도계좌개설현황’을 보면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가 시행 된 이후 한도계좌 개설 건수가 150만건으로 집계됐다”며 금융감독원의 대포통장 근절 정책에 불편을 겪는 금융소비자가 넘쳐난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금융기관에서 통장 발급을 제한하는 것으로 대포통장이 범죄에 이용되는 빈도 수를 줄였다고 할 근거도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대포통장이 사기 등 범죄에 이용된 현황을 보면 ‘단기간 다수계좌 개설 신청서 제도’가 시행 된지 2년이 지난 2012년에는 3만3천777개 계좌가 대포통장으로 이용됐다. 이어 2013년에는 3만8천930개로 오히려 늘어난 수치를 보였고, 2014년에는 7만3천534개로 2013년의 두 배에 가까운 증가세를 보였다. 이와 함께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가 시행된 2015년에도 5만7천209구좌가 대포통장으로 이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점점 더 대담하게 진화하는 대포통장

금융감독원은 2016년도 상반기 대포통장 발생건수가 지난해 대비 2.3% 감소한 2만1천555건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신규 계좌 대신 장기간 사용해오던 기존 계좌들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이른바 통장고시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수신제도부 박창옥 부장도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로 인해 과거에 비해 보이스피싱 사기 건수와 금액이 줄어들고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제도 자체에 불편을 겪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지적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나타냈다.

박창옥 부장은 “금융거래목적확인제도는 단순히 통장 발급을 해주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다”며 관련 지적들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맞섰다. 아울러 “금융당국 주관 하에 보이스 피싱 예방 홍보활동과, 은행연합회차원에서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활동이있다”면서 피해방지를 위해서는 보안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의 정책이 효과를 보이는 듯 하지만 여전히 대포통장으로 인한 피해는 일어나고 있고, 그 수법은 치밀해져간다는 분석도 나왔다.

과거 신규 계좌를 중심으로 발생하던 대포통장 범죄가 장기간 사용해오던 기존 계좌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신규 계좌의 대포통장 이용은 4.9%로 전년대비 7.9%p내린 반면, 계좌 개설 후 1년이 지난 계좌의 대포통장 이용은 63.3%로 전년대비 7.6%p오르며 통장고시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포통장 명의자도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2016년 상반기 대포통장 명의인으로 등록된 개인은 1만2천807명으로 전기 대비 15.5%감소했지만, 반대로 법인 명의인은 전기 대비 18.1%가 늘어난 752개로 뛰었다. 계좌 개설 관련 규제를 피하기 위해 유령 법인 등을 설립하고 법인 통장을 개설해 대포통장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대포통장을 확보하는 방법도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다. 전봇대나 정류소에 부착하는 불법 전단지로 대포통장을 확보하던 과거 행태에서 은밀한 온라인 카페 등을 이용하는 추세로 바뀌더니 이제는 ‘통장 양도 시 일정 사용료를 지급 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공개적으로 대포통장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또 사기범들은 취업사이트 등에 구인 광고를 내걸고 구직자를 대상으로 대포통장을 공개 모집하거나, 일본인 등 외국인을 초청해 관광 등을 제공하고 이들 명의의 대포통장을 개설하는 등 고도로 지능화된 범죄 행위를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금융당국의 선제적 대응이 절실한 시점

금융소비자원 조남희 대표는 “우리나라 금융사는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절차나 국민 편의는 무시하고 있다”며 “근본적인 문제와 대책이 필요하다”고 금융당국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생 동안 새벽시간에는 거래한 기록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새벽에 거래를 한다거나, 계좌에서 100만원씩 수십 차례 빠져나가는 기존 거래 행태와 다른 이상거래에 대한 추적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통장 개설을 고시만큼 어렵게 만든 금융 당국의 정책을 비웃듯 범죄자들의 행위는 대범하고 지능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잡기위해 금융당국이 쳐놓은 엉성한 그물에 걸린 사람들은 억울한 금융소비자가 대부분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소비자 보호를 위한 정책이다’, ‘소비자의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는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의 주장은 국민적 동의를 얻기 힘들어 보인다.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금융범죄와 강력한 규제로 맞서는 금융당국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양쪽의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금융소비자들에 대한 보호가 시급하다.

MeCONOMY Nov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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