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수석논설주간]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깨달음’이 왜 중요한가 하면 깨달음이 있어야 행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아무리 머릿속에 많이 쌓아 놓고 있어도 행동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우리 주변에 머리가 명석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박사 학위를 받고서도 행동이 영 아닌 사람들을 많이 본다.
지식만 많이 섭취하는 건 오히려 해로울 가능성이 높다. ‘지식’을 깨달음이란 과정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도그마’에 빠진다. ‘도그마’에 빠지면 자신의 행동은 되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정죄하게 되고 자꾸 꾸짖는 사람으로 변한다. 정치적 도그마와 종교적 도그마, 이념적 도그마는 사회를 편 가르게 하고 민심을 사납게 만들어 결국 폭력적 사회를 조장한다.
그렇다고 ‘깨달음’이라면 다 찬양받을 만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보편적 진리와 바른 도덕윤리의 기초 위에서 깨달음이라야 한다. 간화선에서도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불교의 보편적 가르침을 먼저 숙지 한 바탕 위에서 참구를 강조하고 있다. 극단적 종교지도자도 나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폭력을 서슴지 않는 논리를 펴고 테러를 행하고 있다. 이들은 보편적 진리와 도덕윤리와 유리된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오늘날을 종교의 위기라고 한다. 불교의 쇠퇴는 기정사실화된 것 같고 지금은 기독교의 위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기독교는 과학의 시대에 절대신에 의존하는 점, 끊이지 않는 성직자의 타락, 기복적 요소의 만연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종교 위기의 원인은 불교 신자든, 기독교 신자든 신앙인들의 바른 행동이 잘 나타나지 않는 데 있다고 본다. 신앙과 행동이 일치 하지 않는 현상이 종교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이런 원인 분석이 타당하다고 할 것 같으면 불안에서 벗어난 자유함을 얻고 자비와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행동을 수반하게 되는 ‘깨달음’의 중요성이 다가오게 된다.
인도에서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널리 전파했다. 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학이 중심이었다가 점점 ‘깨달음’으로 옮겨갔다. 깨달음의 방법으로 참선이 중시되고 드디어 간화선이라는 방법을 발견해낸 것이다.
간화선이 나온 배경에는 참선의 혼란과 타락이 있었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이란 주관적이다 보니, 아리송한 선문답이 횡행하고 조사선의 법어를 지식으로 이해하고 이성적 논리로 깨달았다고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에 송나라의 대혜종고(1089-1163)가 참선 본연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일갈하고 간화선의 체계를 세우게 된다. 간회선은 고려 보조지눌 선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도입된 후 면면히 이어오다 현대에 들어 성철(1912-1993) 스님에 의해 크게 현창되었다.
깨닫는 방법으로서는 ‘간화선’이 끝이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간화선에 대해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하는데, 명상을 해보면 왜 간화선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명상을 해보면 고요하니까. 온갖 잡생각들이 끊이질 않고 떠오른다. 망상들을 끊어내기 위해 호흡에 집중하고 시선을 코끝 아래에 둔다는 등의 방안이 나온 것 같다. 물론 단전호흡 효과도 있을 터이다. 그래서 신경 안정, 마음 안정의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참된 진리의 내면화와 바른 행동으로 이끄는 것과 같은 ‘깨달음’과는 상관없는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들 사이에 열풍이 불고 있는 명상이란 게 이런 거라고 본다. 간화선은 이런 명상과는 다른 깨달음의 수행방법이다. 그것도 단 한 번의 깨달음을 통해 인생의 겉과 속을 완전히 바꾸는 행등을 수반하는 방법이다.
근래에 생활선이라고 해서 여러 번의 깨달음을 주장하는데, 근기가 약한 일반인들에게 나름 의미가 없잖아 있다고 하지만 단 한 번의 큰 깨달음을 강조하는 간화선이 본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혼탁하고 방황하는 현 세대에게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화두’는 망념을 끊고 지혜를 얻는다
「간화선 입문」(조계종 포교원 간행)을 보면 최초의 화두는 부처가 영축산 법회에서 꽃을 들어 보인 일, 또 다자탑에서 늦게 온 가섭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은 일, 그가 열반에 든 뒤 역시 뒤늦게 스승의 임종을 보지 못해 슬피 탄식하는 가섭존자에게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일 등을 꼽는다. 이 세 번의 화두를 가섭존자가 접하고 모두 깨달은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 부처의 세 가지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 진의를 몰랐는데, 가섭존자는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 말이 ‘화두’다. 화두는 의심의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도 답이 있거나 객관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 의심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과 세상살이, 우주에 대한 의심이 화두에 속한다.
화두 참구 삼요라는 말이 있다. 화두를 철저하게 파고들기 위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첫째 대신심이다. 내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대분심이다. 내가 본래 부처인데도 세속의 탐욕에 젖어 헤매고 있는 나의 현재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의심이다. 나를 둘러싼 의심을 강렬하게 품어 정면을 맞서는 것이다.
인간은 큰 의심일수록 회피한다는 것이 본래적 특성이라고 한다. 복잡하고 어렵고 골치 아픈 난제일수록 뒤로 미루고 심지어 마치 난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인간과 집단의 특징이다. 간화선이 대의심을 품고 그것을 풀고자 달려드는 자세만으로도 의미 있는 귀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화두를 사무치게 의심하면 ‘의정(疑情)’에 이른다고 한다. ‘의정’이란 의심이 감정이 돼버려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의정이 이렇게 한동안 찰싹 둘러붙어 있다가 의단(疑團), 즉 의심 덩어리가 된다. 이 의단 상태를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비유된다. 길을 걷는 나그네가 저녁 어스름을 지나 한밤중에 달빛은 희미한데 은으로 만든 산과 철로 세운 듯한 벽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힌 절대위기의 상태를 맞이한다. 이와 같은 은산철벽의 상황에 도달하여 수행자가 진정으로 절망하였으되 되돌아가지고 않고 고요하게 마주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사실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처해본 기업가나 연구개발자들, 작가들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간화선의 방법론은 창조법과 유사한 면이 많으나 단지 화두의 대상이 다른 데 따른 차이점이 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방불교에서 발달된 위빠사나 수행법이 있다. 위빠사나 수행법도 굉장히 종류가 다양하다고 들었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부처의 가르침을 명상적 관조를 통해 깨닫는 포괄적 수행인 것 같고 간화선은 불교의 가르침을 나의 경우에 적용하여 철저히 깨닫는 개체적 수행으로 이해된다. 위빠사나는 전공 과목을 두루 알아가는 석사 공부라고 하면 간화선은 특정 논문 주제가 정해진 데를 파고 들어가는 박사학위 공부라고 할까, 간화선은 그 불교적 진리를 나 자신의 상황, 근기, 성향, 목표, 비전 안에 품어내어 나만의 깨달음으로 심고 나만의 열매를 맺되 스승과 타인들도 충분히 인정되는 열매라고 할까. 이렇게 보면 간화선은 깨달음의 자연스런 발전 단계로 보이며 그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성철 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더 이상 닦음이 필요 없는 돈오돈수를 주장한 것도 이런 확신에 도달했기 때문인 듯하다.
여러 개의 화두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개의 화두를 통하여 깨달음의 과정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간화선의 목적인 진정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면 일생에 단 하나의 화두가 맞는 것 같다. 하나의 화두가 한국 불교의 특징이라면 그걸 굳이 무너뜨릴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깨달음이란 본질에 비추어 보면 단 화두의 존재를 붙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하나에 초점을 맞출 때 블랙홀처럼 자신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배우고 사유해온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어떤 ‘특이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불교 진리에 대한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확신함으로써만이 흔들림 없이 세상에 나아가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간화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 명상으로는 자기 확신적인 깨달음을 얻기 어려워
명상은 불교 식으로 말하면 지(止)와 관(觀)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지와 관의 단계를 통과하여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최상급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를 통해 욕망을 멈추고 세상을 관조하는 관을 하고 난 뒤 자기의 깨달음을 찾아가는 간화선으로 간다는 말이다. 물론 간화선을 했다고 해서 모두 확신에 찬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욕망을 내려놓고 세상의 번뇌를 관조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요즘에는 서양화된 명상론이 역수입되고 있다. 그런 서양화된 명상론은 단맛과 매운맛을 교묘하게 결합한, 표준화된 식단의 맛있는 요리 같은 느낌이다. 불편함이 없는, 나이스 한 ‘명상’, 자기 최면, 마케팅 냄새가 나는 소비성 콘텐츠라는 느낌이다.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면 됐지, 더 뭘 바라나?! 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유행처럼 왔다가 곧 사라질 게 뻔하다. 삶의 근원적 고통, 슬픔, 사방으로 포위된 장벽 같은 난제와 인생의 위기를 깨뜨리려면 간화선은 돼야 할 것 같다.
물론 간화선도 서양인의 손에 넘어가면 상업주의적 명상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면도 있다. 현대 대중문화는 어떤 고상한 주제나 소재라도 타락으로 몰고 가는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다. 정말 단단히 마음을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걸레’가 돼버린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힐링’ 열풍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힐링 얘기를 꺼내는 사람조차 사라졌다. 간화선의 대중화와 세계화만큼은 그리되지 않았으면 바람이다.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는 간화선의 본래 정신을 양보하지 않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종교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간화선’은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참된 인생길을 인도하는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MeCONOMY magazine November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