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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을 죽였던 조선의 모순, 오늘 한국 정치사회의 반면교사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서기 1567년에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2년 뒤인 1569년 허균이 초당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결혼했다. 그는 서애 유성룡과 서얼 출신인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삼고 문장과 시를 배웠다. 26세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첫발을 내딛는다. 1618년 그의 나이 50세에 광해군의 지시로 저잣거리에서 역모 혐의로 목이 잘려 처형된다.

 

 

허균은 16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7세기 초에 죽은 인물이다. 유럽의 르네상스와 상업혁명, 산업혁명은 14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살았던 예술가와 직인, 항해사, 군인 등 광의의 현장 기술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다. 현장 기술자의 실험과 경험 중시가 17세기 대학의 아카데미즘과 결합하면서 과학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경제발전을 논할 때 당시 천시 받았던 사람들의 점진적인 신분 해방과 자유로운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는 신분 속박으로 중하류 층들이 차별 받았던 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조선이 중국에 비해서 훨씬 심한 신분 차별이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 신분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천시 받던 계층들과 더불어 변화를 시도하려는 거사를 시도했던 인물이 허균이었다. 허균의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직인과 상인들이 좀 더 기를 펴고 경제활동에 이바지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또한 허균은 국제정세와 국방 태세에도 밝았다. 허균이 거사에 성공했다면 그가 처형되고 10년 후인 1627년 후금이 침입한 정묘호란, 후금이 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재차 침략한 병자호란(1636년)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면했을지도 모른다.

 

허균은 성리학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저항한 자유사상가

 

조선 지배 사대부들이 오직 주자학만을 떠받들었던 점은 참으로 통렬히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주자성리학은 공맹 유학을 체계화하고 조선의 퇴계와 율곡 등에 의해 심화시킨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사대부들이 주자성리학 외에는 전혀 허용하지 않았던 그 획일성의 난폭함에 있다. 허균은 이와 같이 숨 막힐 것 같은 획일성을 노골적으로 비웃고 저항했던 거의 유일한 사대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균이 황해도 수안군수로 있을 때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미륵불 등의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합장했다. 허균이 삼척부사로 부임한지 13일 만에 불경을 외우고 부처에 절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사헌부의 탄핵 글을 보자.

 

“문장을 즐기며 학문을 일삼는 자들 가운데 이단의 책을 섭렵하여 견문을 넓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허균이 불경을 외우고 읽은 것은 이러한 정도가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식경을 외웠으며, 늘 작은 부처를 모셔두고는 아침마다 반드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중의 옷을 꿰어 입고 염주를 목에 걸었으며, 절하고 염불을 외웠습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부처를 섬기는 제자’라고 했으니, 이런 자가 바로 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요즘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청컨대 빨리 파직을 명하시어, 모든 이들에게 경계하소서.” (「허균평전」, 202-203, 허경진 저)

 

허균은 파직 소식을 듣고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이 내세우고 오히려 ‘부처를 섬길 것’이라는 시를 지었다.

 

 

혀균을 비난하는 글을 보면 그가 모친 3년 상중에 고기를 먹고 기생과 놀았다는 대목이 있다. 허균은 이런 비난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 이유를 밝혔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나 인륜은 성인의 가르침일 뿐, 하늘이 내려준 본성을 따를 것’이란 논지를 폈다. 그가 유교의 일상 윤리를 불필요한 형식적 속박으로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대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양반들은 부모 3년 상중에 몰래 고기 먹고 기생과 놀았다고 전한다.

 

허균의 신분해방 사상

 

허균은 한 인물이 살다간 삶을 기록한 전(傳)을 다섯 편 남겼다. 다섯 명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신분이 낮았으나 허균이 보기에 뛰어난 면모를 지녔기에 전으로 남겼다. 대표적인 작품은 그의 스승을 그린「손곡산인전」이었다. 기생첩의 소생이었던 손곡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그가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유분방하게 살다간 모습을 묘사했다.

 

「장생전」은 저자에 나가서 동냥하는 비렁뱅이이지만 의협심 있는 장생의 이야기다. 장생은 현실의 부조리에 좌절한 듯 술에 취하여 춤을 추다 숨졌다. 그의 시신이 썩어 벌레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고 묘사됐다. 「남궁선생전」은 아전 출신인 남궁두가 과거 급제로 입신양명하려 했으나 좌절하고 도가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한 줄거리다.

 

 

허균은 또 궁궐에서 두 사람의 왕후를 도합 52년간 모시다 은퇴한 궁녀를 만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궁녀들의 애환을「궁사」100수로 남겼다. 이 모두가 조선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이 묻어 있다. 허균이 쓴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홍길동전」은 서얼 출신의 주인공이 의적이 되어 도술로 종횡무진 누비다 이상국가 율도국을 건설한다는 얘기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허균의 유재론(遺才論)

 

허균은 인재를 출신과 과거시험만으로 선출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늘이 사람이 낼 때에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옛날의 어진 임금은 이런 것을 알고 인재를 더러는 초야에서 구했으며, 낮은 병졸 가운데서도 뽑았다. 더러는 싸움에 패하여 항복해온 오랑캐 장수 가운데서도 발탁했으며, 도둑 가운데서 끌어올리거나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사람을) 쓴 것이 다 알맞았고, 쓰임 받은 자도 또한 자기의 재주를 각기 펼쳤다. 나라가 복을 받고 치적이 날로 융성케 된 것은 이러한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좁고 인재가 드물게 나서 예로부터 그것을 걱정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의 길이 더욱 좁아졌다. 대대로 명망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높은 벼슬자리에 통할 수 없었고, 바위 구멍이나 초가집에 사는 선비는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억울하게 등용하지 못했다. 과거 급제하지 못하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비록 덕이 훌륭한 자라도 끝내 재상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하늘이 재주를 고르게 주었는데 이것을 문벌과 과거로써 제한하니, 인재가 모자라 늘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넓은 세상에서 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진 사람을 버리고, 어미가 다시 시집갔다고 해서 그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만이 그렇지를 못해서 어미가 천하거나 다시 시집갔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에 끼지 못했다. 변변치 않은 나라인데가 양쪽 오랑캐 사이에 끼여 있으니, 인재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할까 걱정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그 길을 막고는 ‘인재가 없다’고 탄식만 한다...한낱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하늘이 슬퍼해주는데, 하물며 원망을 품은 사내와 홀어미가 나라의 반을 차지했으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위 책, 308-310)

 

허균은 중국 사신으로 가서 돌아올 때 다른 사람들은 갖고 간 인삼 팔아 골동품을 사왔는데, 수천 권의 책을 사가지고 왔다. 그의 <유재론>은 폭넓은 독서와 깊은 성찰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글이다. 오늘날의 인재 등용 모습이 허균 시대와 매우 닮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은 실패한 혁명가인가?

 

허균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라든지 당대와 후대의 사대부와 양반들의 평가는 감정 섞인 비난이 많다. 성리학자들이 볼 때 부처를 노골적으로 믿는 행태부터가 못 마땅해보였다. 서얼과 아전들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도 기존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행동으로 비쳤던 것 같다. 허균의 모의는 실패했고 어떤 의도와 계획이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처형됐다. 몇몇 동지들이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진술한 내용뿐이며 허균은 변명 한 번 못하고 서둘러 처형된 것이다. 허균의 거사 성격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행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과는 다른, 체제와 사상의 변화를 수반하는 ‘혁명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균은 글을 통하여 국방이 튼튼하지 못한 이유도 장수를 의심하는 임금 탓이요, 정치가 바르지 못하고 어지러운 것도 왕의 탓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선비들 중에 왕조 체제를 부정하는 듯한 글을 남긴 이는 허균 외에 또 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담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1613년, 광해군 5년에 일어난 계축옥사는 문경새재에서 도적질을 하다가 적발된 박응서, 서양갑 등 7명의 서얼들의 고변에서 시작됐다.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은 이들을 고문하여 거짓 자백케 하여 영창대군과 그를 옹위했던 서인과 남인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들 7명의 서얼들은 허균과 매우 친했는데 모진 고문에도 허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서양갑이 좀처럼 고변하지 않자 그의 어머니를 붙잡아 와 고문했다. 조선 시대의 고문은 너무나 참혹하여 없는 죄를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왕조실록 등에 나오는 옥사 기록을 다 믿을 수 없고 행간을 잘 살펴서 진의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허균의 거사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사대부는 거의 없고 서얼과 아전, 무사, 승려, 노비들이었다. 허균과 함께 처형됐던 우경방은 승려에서 환속한 무사이며, 현응민은 서얼, 김윤황은 허씨 집안의 여종 남편이었다.

 

성리학을 위한 변명

 

허균을 억압한 성리학과 같은 교조적 정치철학과 이념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곳곳에 발견되고 있다. 서양의 중세 이전에 기독교 교리와 신학이 정치적 이념의 역할을 하면서 세속왕권과 충돌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을 불러왔던 것이다. 정치철학과 이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획일화되면서 다른 정치철학과 이념을 일체 용인하지 않고, 민중과 적대 세력에 대한 억압의 도구로 변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리학과 같은 정치이념이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은 조선만의 현상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한국역사만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간혹 그런 곡해를 하고 과도하게 조선을 비판하고 성리학은 본래부터 '문제 많은' 정치철학으로 말하는데 이는 과도한 면이 있어 보인다.

 

인류의 정치철학·이념사를 되돌아보면 언제나 기존의 지배이념을 깨부순 역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새로운 변화와 혁명의 이념을 펼치면 더 나은 세상이 올 줄 알았지만 언제나 또 다른 부정적 모습이 드러났다. 현재 세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이념국가, 사회주의 국가들도 삼분할 수 있는데, 제각각 많은 문제들로 곪아터져 대수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독재체제와 부패, 극심한 양극화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 추락과 무기력증으로 인한 절망감의 만연이, 그나마 이들 체제보다 나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소외감, 양극화가 문제가 대두된 지 오래 됐다. 이에 따라 일군의 정치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20세기 정치이념과 결별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상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 당장 필요한 것은 허균이 양명학과 불교, 도교, 천주교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여주었던  다양성, 포용성, 유연성의 철학이 아닐까 한다.

 

MeCONOMY magazine 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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