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의 대중음악신을 보면 10대와 20대, 30대를 대표하는 음악은 힙합이라고 할 수 있다. 엠넷의 힙합 오디션인 ‘쇼미더머니’를 통해 많은 래퍼가 MIC(마이크)을 잡고 등장했고, 이들의 비트와 래핑에 실려 나오는 메시지에 젊은이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이들에 마치 대항하듯 등장한 대중음악은 다름 아닌 ‘트로트’였다. 특히 트로트는 젊은 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팬덤 문화가 중장년층으로 확산하면서 2030세대가 갖지 못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 현상을 넘어 경제 현상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
현재 트로트 팬덤을 이끄는 건 오팔(OPAL)세대다. 일본에서 유래한 말인 오팔은 ‘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자로, 일본의 경제전문가 니시무라 아키라는 자신의 책 ‘여자의 지갑을 열게 하라’에서 이 오팔족(族)을 처음 언급했다. 국내에서는 김남도 서울대 교수가 ‘트렌드 코리아2020’를 통해 소개했다. 책은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한 5060 ‘액티브 시니어 소비자’를 ‘오팔세대’로 명명했다.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 개띠의 58과 발음이 같고, 액티브 시니어의 다채로운 행보가 모든 보석의 색을 담고 있는 오팔 보석의 색을 닮았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소비시장에서 이 오팔세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골든그레이, 어반그래니, 실버서퍼 등 오팔세대의 특징을 표현하는 다양한 신조어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획일화된 연령 정의는 없지만, 이들이 은퇴하는 시기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창조되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는 미국 시카고대학의 심리학 교수였던 뉴가튼이 75세 이후를 노인으로, 50~75세까지로 구분하며 등장했다. 40~49세의 은퇴를 앞두고 준비하는 세대를 프리 시니어(Pre-Senior), 50~75세의 경력, 경제력 및 왕성한 소비력을 갖춘 세대를 액티브시니어(Active-Senior)로 정의했다.
욜드(Young-old)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신조어로 1946~1964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하는 ‘젊은 노인층’을 가리킨다. 이 세대는 건강하고 부유하며 그 규모도 커 은퇴 후에도 사회·경제·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이코노미스트는 2020년 세계경제대전망(The World in 2020)을 통해 이 욜드 집단을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노인 집단과도 다르다고 평가하며 이들 세대의 선택이 각종 서비스 분야와 금융시장, 유통 트렌드까지 뒤흔들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우리 정부도 오팔세대, 5060세대를 이전 세대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 ‘신(新)중년’으로 명명하고 정책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신중년은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고 재취업 일자리 등에 종사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과도기 세대를 지칭하는데, 이들은 2017년 기준 1,378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4, 생산 가능 인구 5)의 1/3 수준이다.
노동시장에서 은퇴해야 하는 연령대로 인식되는 고령자나 노인을 대신해 활력있는 생활인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담은 정책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식과 경험을 갖춘 퇴직 신중년들의 재능을 은퇴 이후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 개인 소득을 창출하면서, 동시에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방향을 삼고 있다.
‘경제력 + 향수’로 트로트 열풍 이끌어
이들 오팔세대의 특징은 ‘경제력’과 ‘향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한 경제·사회·문화적 성장과 진화를 경험하면서 이전 세대와 다른 배경을 보유하고 있다. 1970~2000년대 고도 성장기에 청·장년기를 보낸 세대로 사회적 제도와 인프라 혜택을 누리면서 산업화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GDP 연평균 성장률이 19.6%로 경제성장의 결실을 경험한 집단으로 대부분 금융과 부동산으로 자산을 형성했다.
또 해외 대중문화가 유입되고 한국 영화와 대중음악이 전성기를 맞았던 1960~1970년대에 유·청년기를 보내며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경험했다. 이 때문에 문화적 자부심이 강하며 사회적 교류, 문화 향유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여기에 부모 세대에 비해 많은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상대적으로 소득과 소비에서도 여유롭다.
특히 이들이 본격적으로 은퇴하기 시작한 2010년 이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남은 인생을 수용하는 노인이 아니라 활발한 사회 활동과 네트워킹으로 자기 정체성과 젊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기대수명의 연장으로 은퇴 전 본인의 경력을 토대로 스타트업에 자문 역할을 하거나 유튜버로 거듭나는 등 자아실현을 위한 제2의 삶을 개척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스스로 ‘뒷방 늙은이’를 거부하고 진취적으로 자신의 외모와 건강을 관리하며 여행과 문화생활 등을 통해 ‘나’를 위한 소비에 적극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바로 트로트다.
경제력을 갖춘 오팔세대는 지난해 트로트 열풍을 이끌었다. 그동안 클래식과 대비되며 대중음악 내에서도 ‘저소득’, ‘저학력’, ‘촌스러움’ 등을 상징했던 비주류 트로트가 오팔세대의 팬덤으로 재부상한 것이다. 앞서 밝힌 오팔세대의 경제력과 향수가 맞물리면서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세대 내 유대감을 조성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장년층을 토대로 한 우리나라의 이러한 트로트 열풍 현상을 “트로트 르네상스(trot renaissance)”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유통‧금융에도 새로운 큰손
파급력은 향수의 자극, 문화적 공감대 형성을 넘어 새로운 소비시장의 형성으로까지 연결되는 추세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자기 삶에 능동적인 오팔세대는 디지털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고 적극적으로 취향을 드러내며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50대 이상의 유튜브 콘텐츠 소비가 증가하는 가운데 유튜브상에서 인기를 끈 트로트 가수는 쉽게 수백만 뷰를 넘기며 ‘중통령’(중년들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젊은 세대들의 아이돌 가수들을 팬덤 문화를 그대로 학습하고 모방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부, 지하철 전광판 홍보, 스트리밍, 앨범 및 굿즈 구매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주도적으로 애정하는 스타를 지원하며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유통업계와 광고주들도 이들 계층의 소비행태 변화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유통업계는 이러한 트렌드에 주목해 유기 수저 세트, 친필 사인 양주잔, 실크 스카프, 돋보기 목걸이 등 오팔세대의 취향을 고려한 굿즈를 출시하고, 떠오르는 트로트 가수를 광고 모델을 발탁하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오팔세대의 지지로 트로트 가수 정동원이 동원참치의 광고 모델로 기용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금융업계 역시 이전 세대와 다른 사회·문화적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노년기 삶에 대한 태도, 타 연령대 대비 많은 자산규모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문화를 포함한 소비시장에서 오팔세대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순자산 규모는 50대 가구주의 순자산 규모가 가장 크고 60대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연간 문화 활동 관람률도 5060세대가 가장 높으며, 연평균 관람 횟수도 20대와 동일하다는 서울시 조사 결과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5060세대의 음악·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 증가율도 100%를 상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쇼핑 및 간편결제 사용률도 증가하는 추세다.
오팔세대 겨냥 금융상품 속속
우선 금융업계는 이들의 ‘소비’에 집중하고 있다. 오팔세대 소비와 문화생활에 특화된 카드를 출시하고, 은퇴 후 삶을 위한 자산관리 브랜드를 구축하는 등 5060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롯데카드는 지난해 고객의 연령별 소비패턴을 분석해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I’m ACTIVE’ 카드를 출시했다. 롯데카드는 결제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스포츠 레저, 반려동물 관련, 병원·약국 이용 비중이 높고, 유기농 식품의 경우 2030보다 2배가량 많이 구매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특성을 반영하여 피트니스(운동·레저스포츠), 웰빙(건강보조식품·유기농샵·보험료), 의료(병원·약국·동물병원) 부문에서 결제 시 부문별 5% 캐시백 혜택을 준다.
우체국도 건강, 여가 및 반려동물 등에 관심이 많은 액티브 시니어 고객을 대상으로 한 ‘라이프플러스’ 신용·체크카드 출시한 바 있다. 연회비 없이 국내외 전용으로 발급되며 OTP생성기가 포함된 일체형으로 동물병원, 스포츠시설, 대형마트, 편의점 등 이용 시 혜택을 준다.
은퇴 후 안정적인 삶을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도 제공한다. 우리은행은 시니어마케팅 전담조직을 확대하고 금융서비스 외에도 시니어플러스 홈페이지 오픈했고, 시니어 전용 모임 공간인 우리시니어플러스센터를 신촌과 명동에 운영하고 있다.
팬덤 활용한 마케팅 전략 고려해야
이와 관련해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이전 노인 세대와는 구분되는 오팔세대의 양적·질적 특성에 비추어 볼 때 금융업에서도 팬덤을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는 “오팔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자산규모가 크며, 문화 융성기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한 세대로 성취 지향적이고 문화적 자부심이 강하다”라며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스스로 노인이라고 인지하는 연령이 점차 높아지면서 라이프 스타일을 젊게 유지하려고 하며 소비와 자아실현을 지향한다”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젊은 노인인 욜드세대는 저성장시대의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으면서 ‘욜디락스’(Yoldilocks)가 새로운 발전 전략으로 제시되기도 한다”라며 “건강과 경제력을 지닌 오팔세대가 생산과 소비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욜디락스는 젊은 노인층을 의미하는 욜드(YOLD, young old)와 이상적인 경제상황을 의미하는 골디락스(Goldilocks)의 합성어로 욜드세대가 주도하는 경제성장을 의미하는데, 실제로도 최근 유튜브 등 미디어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다.
보고서는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오팔세대의 팬덤은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찾고 위안을 얻는 수단으로 관련된 소비에 매우 적극적이며 지속력이 강하다. 특히 팬클럽 활동을 통한 네트워킹과 소비를 통해 대상에 몰입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나를 표현함으로써 사회생활을 할 때와 같은 활력을 느낀다”라며 “시간적 여유가 있어 결집력과 행동력이 매우 강하며 활동 빈도도 높고 1020세대와 달리 좀 더 관대하게 스타를 바라보기 때문에 지속성이 긴 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팬덤의 경제적 파급력이 커지고 있으며, 새롭게 팬덤 문화를 주도하는 오팔세대는 MZ세대 이상의 소비 잠재력을 보유한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다”라며 “팬덤도 사회상에 따라 지속적으로 진화하며 최근에는 소비 패러다임을 소유와 경험에서 ‘관여’로 이동시키며 팬슈머와 같은 열정 소비자를 창출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 지점은 MZ세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인데, MZ세대의 아이돌 팬덤이 ‘공감’과 ‘성장’이라는 키워드라며 오팔세대의 팬덤은 자식뻘인 트로트 가수를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소비 패러다임이 ‘관여’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다른 말로 ‘양육자 마케팅’이라고도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고서도 “팬덤 문화를 1020세대만의 전유물로 간주하지 말고 오팔세대까지 넓혀 그들의 선택에 주목하고 마케팅에 활용할 필요하다”라며 “소비자 분석 및 마케팅 전략 수립을 위해 참여형 프로그램과 자문, 의견수렴 등 개방형 소통 창구를 확대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현재 MZ세대에 치중된 팬덤 마케팅 전략 수립에 있어 시간적·경제적 여유 측면에서 젊은 세대보다 고관여 가능성이 큰 오팔세대를 재고해볼 필요하다”라며 “‘2030축의 전환’의 저자인 마우로 기옌은 실버 세대의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향후 세계의 부와 힘이 10년 이내에 밀레니얼 세대에서 실버 세대로 이동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밝혔다.
MeCONOMY magazine April 2021